여기저기서 받은 다이어리들이 테이블에 쌓입니다. 크리스마스 트리도 줄어들고 머라이어 누님 목소리도 뜸해진 요즘, 다이어리가 '연말 느낌' 담당이 됐습니다. 표지에 2022라고 적혀 있는 걸 보니 2021이 곧 끝나긴 하나 봅니다.
십여 년 간의 직장생활 동안 다이어리를 항상 끼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업무수첩으로만 썼을 뿐, 메모 외의 것을 기록하거나 플래너로 쓴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회사에서 받은 다이어리, 선물 받은 다이어리가 똑같이 메모장이었습니다. 겉멋 들어서 산 소가죽 다이어리 커버에도 메모장만 넣었습니다. 계획을 기록하지 않았다기보다, 딱히 특별한 계획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업무 뿐 아니라 일상도 비슷합니다. 특히 인생의 큰 그림은 노후자금 정도 외에는 딱히 없습니다.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항상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늙으면 뭐 할까, 아내와 얘기도 많이 하고 고민도 많이 했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마음속 인생계획 다이어리가 새것처럼 하얗습니다. ㄱ도 A도 1도 없이 애기 얼굴처럼 뽀얗습니다. 요즘 많이 들리는 ‘중고 신입’처럼 느껴집니다. 이번 생의 다이어리는 이대로 속만 하얗게 있다가 다음 생에 중고 신상이 될 모양입니다.
(‘중고 신입’은 승진을 기다리거나 경력직으로 이직하지 않고 다시 신입으로 이직하는 분들을 칭하는 말입니다. 검색하면 단점이 어쩌구 MZ세대의 특징이 어쩌구 하는 평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의 결정을 함부로 판단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세상이 그런 세상이구나 합니다.)
난임 인생 십 년이 넘었지만, 아이를 언제 가져야지, 언제 어디서 살며 뭘 가르쳐야지, 하고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운 적이 없습니다. 막연히 나도 내 자식 생기겠지, 정도였습니다. 그마저도 생각대로 안 되니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인생 살며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은 많지 않을 텐데, 계획 하나 더 세웠다가는 바닥에 드러누울 지경입니다.
계획적인 삶에 부정적인 것이 절대 아닙니다. 되는 일 없다고 다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투덜이 스머프처럼 살고 있지도 않습니다. 다만, 계획을 세우고 다이어리에 그어진 선 위를 달리는 삶을 선택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아이가 있었으면 선택하고 말고도 없이 내가 긋지 않은 선 위를 달렸을 테니, 선택하지 못했다고 해야 할까요.
'중고 신상' 예정인 인생계획 다이어리는 앞으로도 계속 뽀얗게 보관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안 쓸 거면 딱 한 줄, ‘마누라랑 행복하게 살기’만 써놓고 서랍 속에 넣어 두려고 합니다. 그러다 언젠가 때가 되면 분리수거하고 떠나면 그만입니다. 아, 다음 생에 갖고 가야 중고 신상이겠네요. 신상 빼고 그냥 중고만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