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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유정 Dec 31. 2021

물 좀 주소

우연은 이름이 많습니다. 간절하면 필연, 깊어지면 운명, 고난 속에 피어나면 기적이라 부릅니다. 기적에는 좀 못 미치는 우연들은 무게에 따라 아싸, 땡잡았다 등으로 불립니다.




예상치 못한 우연은 대개 신기하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스쳐지나지 않고 뇌리에 오래 새겨집니다. 군대 있을 때 기름을 보관하는 유류창고의 자물쇠 비밀번호가 5151(오일오일)이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살다 보면 불과 몇 달 전까지 살던 집 번지수나 고3때 몇 반이었던가 등등 수많은 숫자를 잊어 가지만, 절대 다시 볼 일이 없는 저 자물쇠 번호는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지방으로 이사오기 전, 지하철에서 가수 한대수 님 가족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한대수 님은 <물 좀 주소>로 유명한 분인데 나는 얼굴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한대수 님네 아이가 너무너무 귀여워서 몰래 살짝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더니, 아이는 귀엽게 웃으며 인사를 받아 주었습니다. 순식간에 녹아내린 예비 딸바보는 뭐라도 주고 싶었습니다. 과자도 껌도 없으니 들고 있던 생수병(아직 열지 않은)을 내밀며 “줄까?” 해 보았습니다. 별 것도 아닌데 끄덕끄덕 하며 두 손 공손하게 받습니다. 다시 돌려받았는지 아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준다고 또 받아 주어서 바보같이 좋아했던 기억은 납니다.


잠시 후 역에 내려서 아내가 묻습니다. 방금 그 분들 한대수 씨 가족들인데, 알고 있었냐고. 전혀 몰랐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물 좀 주소>를 부른 가수의 딸에게 물 좀 준 셈입니다. 이 또한 잊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내와도 우연히 만났습니다. 인연이 깊어져서 운명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서로가 없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상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기적 같은 우연도 좀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싸, 땡잡았다 같은 거 말고, 듣는 순간 눈물이 흐를 것 같은 기적이 찾아와 주면 좋겠습니다. 로또도 연금복권도 필요 없으니, 한 번만이라도 기적이 내게 와 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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