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 애순이가 '힝~' 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 반에도
힝 필살기를 쓰는 아이가 있다.
수업 중이었다.
한 아이가 교실 구석에서 무릎에 얼굴을 묻은 자세로 쭈구려 앉고 있었다.
T: 왜 그러니?
S: 0이가 내가 집으려던 색연필을 먼저 가져갔어요, 힝.
난 아이를 달랬지만 아이는 가만히 앉아서 심술을 부리고 있었다.
심술. 그래, 그것은 심술이었다.
아이는 선생인 내가 자기 색연필(따지고 보면 우리 반 공용 색연필인데) 빼앗아
자기한테 갖다주기를, 혹은 그 뺏었다고 생각하는 아이를 혼내길 바랐던 것 같다.
난 아이를 우선 내버려두고 수업 활동을 시작했다.
아이는 그 자리에 쭈그려 앉은 채 요지부동이었고 난 모른 척했다.
잠시 후, 다시 다가갔다.
T: 속상한 마음을 알겠지만, 그 마음을 이렇게 푸는 건 잘못된 행동이야. 속상할 때 마음을 어떻게 건강하게 푸는지 그 방법을 지금 이 시간에 배우고 있는 거야. 자리에 돌아와 앉을까.
아이는 이해한 건지 모르는 건지 묵묵부답이다.
초를 재자 아예 두 귀를 막기까지 했다.
T: 그럴 때는 '뺏지 말아 줘, 내가 먼저 골랐으니 순서를 지켜줬으면 좋겠어'라고 말해야 해.
아이가 내게 뭘 원하는지 알았지만,
일일이 교사가 개입하면 학생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힘이 안 길러진다.
뜻대로 교사가 행동하지 않아주자, 아이는 계속 힝힝 소리를 냈다.
우는 척 인상을 쓰지만 눈에서 눈물은 안 났다.
이렇게 속상한 네 마음을 푸는 건 잘못된 행동이야.
말이 안 들리는 척 하는 녀석.
그래? 알겠어.
그렇게 3교시가 끝나고 4교시는 전담시간이라 체육관으로 이동해야 했다.
아이는 내가 자기에게 다가가 화를 풀어주고 미안해, 이야기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이렇게 고집을 부리고 떼를 쓸 떄 해주는 대로 해주면 안 된다.
난 딱 무시하고 나머지 애들만 보냈다.
그 아이와 대화 좀 하다가 보낼 테니까 먼저 가라는 말을 속삭이며.
뒤를 돌아보니 누워있는 척 하던 아이가 슬쩍 고개를 들어 내 눈치를 살피는 게 보였다.
어림도 없지.
난 모른 체 하고 할 일을 했다.
어, 이게 아닌데.
아이는 중간중간 내 눈치를 살피면서도
내가 자기를 볼 것 같으면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쓰러진 척을 했다.
이제 선생님이랑 대화할 준비가 되었어?
묻는데 답이 없다. 한 번 더 물어도 답이 없다.
그래? 알겠어.
그러다가 내가 자리를 비우고 불도 꺼진 교실에 혼자 남자 슬쩍 몸을 일으킨다.
어라, 선생님이 이런 반응을 하면 안 되는데.
내가 다시 돌아오자 고개를 홱 돌리는 아이.
그러거나 말거나 난 내 업무를 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점심 시간이 다가오고 3분 정도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오니
이가 쭈뼛쭈뼛 교실 문을 연다.
문 열자마자 나와 딱 마주친 녀석. 움찔거린다.
이제 대화할 준비 되었어?
그제야 아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네.
T: 왜 그랬어?
S:00이가 색연필을 빼앗았어요.000이가 날 화나게 했어요.
T: 그래서?
S: …
T: 그게 네가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될까?
조용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스스로 아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떼를 썼다는 걸.
그러니 왜 그랬냐는 물음에 한참 침묵이 있었겠지.
T: 00이가 네 색연필을 빼앗아서 속상한 건데,
선생님을 힘들게 하고 친구들 수업을 방해하는 게 과연 옳은 걸까?
아이는 고개를 흔든다. 절레절레.
S: 아니요.
T: 그래. 그럴 때는 00이에게 내가 먼저 골랐으니 뺏지 않아줬으면 좋겠어, 라고 말하는 거야. 떼를 쓴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네 마음을, 네 생각을 말해야 해. 널 속상하게 한 친구와 대화하면서 푸는 거야, 알겠지?
몇 번 거듭 말한 끝에 아이가 드디어 알겠다 답했다.
자, 약속.
새끼 손가락 걸고 약속까지 했다.
그러더니 슬쩍 다가와 두 팔을 벌려 날 안는 녀석.
허허, 참.
웃음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기분이 풀려 웃으며 말도 하고, 못한 활동지 가져다가 그거 담에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
9살이란 제 마음 다스리기 너무 어려운 나이지.
천천히, 하나씩 배워가면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