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만큼 빨라지는 거야
한참 직장 다닐 때는 앞으로 30년이란 세월이 참 막연하게 느껴졌다. 사실 그때는 언제나 푸르를 줄 알았던 젊음을 가졌으니 그러했을 것이다. 직장을 한번 옮기고 30년 좀 넘게 직장인으로 살았다. 내게도 50대가 오다니.. 직장인이 아닌 지금의 나는 앞으로 30년, 10년, 1년, 1주일을 생각하고 들여다보는 것을 자주 하는 것 같다. 물론 매일 머릿속을 꽉 채웠던 업무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 빈 공간에 다른 생각들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데, 다른 생각 중에서도 내 생의 중장기 플랜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한다는 것은 내가 내 삶을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직장 다닐 때 사무실 안에서 복작복작 일을 하다가 잠시 창밖을 보면 나는 언제까지 내 시간을 여기서 보내야 할까 하는 생각에 잠기곤 했다. 20,30대는 실무에 파묻혀 살았는데 40대 중후반이 되면서 실무뿐만 아니라 일을 시키는 입장이 되다 보니 마음처럼 되지 않는 때가 많았다. 회사 어떤 프로젝트 TFT 발령을 받아 일하는 2여 년도 내적 갈등이 심한 시기였다. 내게 있어서 일을 안다는 것은 나를 더 힘들게 한 셈이었다. 위에서 가당치 않은 일을 시킬 때는 '또 헛짓을 하겠구나' 하는 분별심이 발동했고, 아래로는 일이 뻔히 보이는데도 시켜야 움직이는 뺀질이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다른 말해, 윗사람들이 합당한 의사결정을 하도록 설득할만한 배짱이 부족했고 아랫사람들이 스스로 일하게 만드는 방법을 잘 몰랐을지도 모른다. 이게 겸손의 미덕인지 후회스러운 변명인지 가끔은 헷갈린다.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 엄마집에 간다. 엄마와 대화 나눌 시간이 많아졌다. 아니, 정확히는 엄마 얘기를 듣는다. 부쩍 말씀을 많이 하시는 걸 보면 엄마가 말할 상대가 고프셨나 싶어 다른 얘기를 끄집어낼 질문도 많이 한다. 올해 89세 엄마는 "나는 90킬로, 너는 50킬로로 달리는 거야. 하루가 얼마나 빠른지, 일주일이, 한 달이, 1년이 금세 지나가지. 너도 내 나이 돼 보면 안다." 인생의 속도에는 가속이 붙나 보다.
50킬로의 속도로 사는 지금, 물론 매일이 희희낙락 즐겁지만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건 화날 일이 별로 없고 지금이 감사하다는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책상 위에 읽고 싶은 책이 있다. 연주하고 싶은 곡의 악보가 있다. 관심 있는 강의를 신청해 두었다. 가끔 맛있는 반찬도 만든다. 그리고 내 생각을 쓰고 나눌 공간이 있다. 이렇게 경험을 음미할 여유가 있는 인생의 50킬로 속도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