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이 된 아버지 곁에는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군에서부터 아버지를 존경하던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친인척이라는 관계로 아버지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군이 전부였던 아버지는 군에서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먼 친척 되는 사람과 건설사(확실하지는 않으나 '삼창건설'로 기억한다)를 만들었고 군에서 아버지를 따르던 이와 공동명의로 건물을 지으셨다. 군에서라면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을 일이었을 텐데 군 밖의 세상은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반질반질하고 기다란 검은색 명패가 놓인 사장실에 갔었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 사무실이었다. 체리색 넓은 책상과 그 앞에 검은 소파와 유리 테이블, 한쪽에는 호랑이 조각상도 있었다. 개업식이었는지 암튼 무슨 행사였던 듯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런 단편적인 기억들이 남아 있다.
아버지가 탈 새 차가 나오기도 전에 아버지는 과로로 병원에 실려갔다. 병원에 계신 동안 세단이 나와 홍전무(먼 친척 되는 사람)가 엄마를 병원까지 태워준 것이 그 차와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병원 밖을 나오지 못하고 3.28에 입원하고 4.6에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10살이나 되었을 때인데 아버지 장례식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때 우리가 살던 아파트에 온 장례차를 봤던 기억만 있다. 가족들이 큰 소리로 울었고 나는 외할머니 품에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건물 관련해서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생겼고 믿었던 사람들은 모두 저 살 궁리만 했다. 그 이야기는 다 하지 못한다.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이란.. 결국 엄마는 건물을 팔기로 결정했다. 가끔씩 우리들끼리 그 건물 그냥 뒀으면 돈 벌었을 거라는 얘기를 농담 삼아 하기도 하지만 엄마가 그 건물 때문에 골치를 썩다가 어떻게 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빨리 처분한 것은 너무 잘한 일이다. 그때 너무 어려서 엄마에게 어떤 힘도 되어주지 못한 것이 죄송할 따름이다.
남편을 잃은 46세 엄마는 자신을 챙길 여유 같은 것은 없었다. 내가 46세가 되었을 때 그때의 엄마를 생각하면서 아주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 나이가 돼보고 나서야 그 아픔이 절절히 다가왔다. 아직 젊고 여전히 챙김 받고 싶은 나이이고 하고 싶었던 것도 많았을 텐데 엄마는 우리 엄마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나는 엄마의 그 선택을 너무나도 고맙고 귀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내 삶을 함부로 살아갈 수가 없다, 엄마가 지켜주신 삶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