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식물
엄마 집에는 발코니를 점령하고 사는 생명체가 여럿이 있다. 요즘은 집에서 키우는 식물들에 '반려식물'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반려의 한자를 알아보니 '동반자'라고 할 때 쓰는 짝'반(伴)'자에, '승려'라고 할 때 쓰는 짝, 벗'여(侶)'자로, 짝이 되는 동무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냥 예뻐서 봐주는 식물이 아니라 '반려'라는 말이 앞에 붙어 서로를 알아주는 짝꿍이 되는 식물이다. 엄마의 정원(아파트 발코니를 말한다)을 보면 반려식물이라는 것이 특히 와닿는다. 그 아이들이 반짝반짝 생명을 꽃피우고 있다는 것은 엄마가 아침저녁으로 수분을 공급해 주고 창문을 열어 숨통을 트여주는 그 일상을 지극히 잘하고 계신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엄마의 넉넉함은 이 정원에서부터 나온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후 우리는 절약하는 것으로 생활의 여유를 만들었다. 그 여유 중에 하나가 엄마의 정원이 아닐까 한다. 꽃과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자기 집에서 예쁘게 자란 식물의 몇 줄기를 화분에서 파내어 주고받으며 마음을 나눈다. 내가 아끼는 것을 주는 마음, 당신이 아끼던 것을 받는 마음, 그건 선물 이상의 의미를 가진 듯하다.
"어제 수돗물 품질검사하러 두 사람이 왔거든. 여기 베란다(엄마는 여전히 베란다라고 한다)를 보더니 너무 좋아하길래 이거 뽑아 줬더니 너무 좋아하면서 갔어" 내가 아는 엄마의 유일한 허세다. 어제도 그 누군가 엄마의 넉넉함을 받아갔나 보다. 하지만 마구 욕심 내는 사람에게는 잘 주지 않는다. 엄마만의 기준이 있다.
예쁘게 꽃이 피면 딸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카톡방에 사진을 찍어 올리신다. 90세 엄마와 카톡을 한다고? 게다가 사진까지 찍어서 올리신다고? 사실 친구들이 엄청 부러워한다.
어느 날 엄마가 "세상이 참 좋아졌지. AI 시대다 뭐다.. 노인들이 이런 걸 다 어떻게 따라가. 배우면서 사는 거 이제 나도 힘들어" 하신다. 기꺼이 배우고 딸들과 소통의 수준을 맞춰 주시는 엄마의 노력이 고맙고 죄송스럽기도 하다. 내가 노인이 되는 그 시대는 얼마나 더 복잡한 것에 적응하며 살아야 할까. 엄마처럼 허세 부릴만한 넉넉함이 내게 있을까. 걱정은 안 한다. 노인이 된 그때의 내가 다 잘해나갈 것이다. 엄마 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