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민 되다
1950년 6월, 전쟁으로 가족 모두 급히 피난을 떠나야 했다. 외할머니는 임신 막달이 다 되었다. 안양에서부터 보은쯤 가고 있었을 때 외할머니는 산통이 심해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청주 고향마을로 발길을 돌려 이미 모두 피난을 떠나 비어 있는 엄마 큰아버지 댁으로 갔다. 거기서 할머니는 또 한 명의 아들을 낳았다. 우리 막내 외삼촌은 그렇게 625 둥이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집 행랑채에 인민군들이 들어와 사무실을 차리게 되어 모두 숨죽이고 지냈다. 할아버지가 고향 마을에서 한의원을 하시면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아 인민군들이 그리 고약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급하게 피난길에 오르기도 했지만 곧 안양으로 돌아갈 수 있겠거니 하고 집안 살림을 거의 남겨두고 왔다. 엄마 큰아버지네는 중요한 살림들을 거의 가지고 피난길에 올랐는지 남아 있는 살림으로는 지내기가 어려웠다. 외할아버지와 엄마는 급한 대로 밥그릇이라도 챙겨 오기 위해 안양집까지 100리 길(약 120Km)을 3일 만에 걸어갔다. 고등학생인 큰 이모는 다 큰 처녀라 밖에 다니기 위험했고 엄마 바로 아래 남동생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이제 갓 중학생이 된 엄마가 할아버지와 함께 짝을 이루어 다녔다. 100리 길을 걸어 안양집에 들어서니 집 한가운데에 폭격을 맞아 대청마루 바로 위 지붕이 뻥 뚫려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전쟁 동향을 파악한다고 라디오 있는 집을 찾아다녔고 엄마는 방 한구석에 숨어 할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웅크리고 기다렸다. 무엇을 먹고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고 무서운 기억만 남아있다.
그때는 무거운 놋그릇을 밥그릇으로 썼다. 할머니가 뚜껑은 무거우니 그릇만 가족 수대로 가져오라고 했다. 엄마는 그래도 반찬 담을 그릇도 필요하겠지 싶어 뚜껑까지 챙겨서 또다시 3일을 걸었다. 가져온 살림을 내려놓았더니 외할머니가 무겁게 뚜껑까지 가져왔다고 야단을 쳤다. 엄마도 다 생각이 있어 가져왔는데... 다짜고짜 혼을 내니 서운한 마음이 들어 또 방구석에 무릎을 세우고 머리를 파묻고 울었다. 그리고는 허리가 아파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어린 몸뚱이가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그 먼 길을 걸었으니 탈이 안 날 수가 있었을까. 어느 날 할머니가 사골 국물을 가져와 몸에 좋으니 훌훌 마시라고 했다. 구수한 맛이 났다. 그것 때문이었는지 며칠 후 자리를 털고 일어났는데 나중에 그 국물이 두더지 삶은 국물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그렇게 세 번 정도 산길로 안양을 오가며 필요한 것들을 가져왔다. 폭격 소리와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 중학교 1학년 엄마는 전쟁의 공포 속에서도 상황의 엄중함 때문에 그저 외할아버지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한 번은 안양에서 청주로 내려오는 길에 인민군들을 만났다. 그들이 다 큰 처자를 데리고 다니면 위험하다고 하자 외할아버지가 '키만 컸지 아직 젖내 나는 어린아이요'라고 했다. 엄마는 속으로 '내가 무슨 어린애야' 하고 심술이 났다. 어린 엄마는 그렇게 일찍 어른이 되었다. 그 나이 때의 어린 시절을 제대로 누린다는 것은 전쟁 중에 너무 큰 호사였을 것이다. 애처롭기만 하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할아버지에게 몰래 찾아와 인민군들이 독이 올랐으니 빨리 이곳을 떠나라고 귀띔해 주었다. 할아버지와 엄마가 먼저 음성, 광혜원을 지나 산길로 안양으로 가고 가족들도 뒤따라 올라왔다. 한동안 대청마루 지붕이 훤히 뚫린 집에서 숨어 살게 되었다. 사람들은 피난을 떠나면서 물건들을 다 챙겨갈 수가 없으니 가져갈 수 없는 귀중한 물건들은 땅에 묻고 갔는데, 이를 알고 꼬챙이로 땅을 뒤집어 사람들이 묻고 간 물건들을 훔쳐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재봉틀을 깊숙이 묻고 그 위에 한약재를 얹은 후 흙으로 덮어 위장했는데 와서 보니 약재들만 여기저기 파헤쳐 흩어져 있었고 그렇게 재봉틀을 지킬 수 있었다. 전쟁 속에도 다행한 일이 있었다. 전쟁이 이쯤에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