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의 쓰디쓴 경험
외할아버지는 청주의 전 재산을 다 팔아 서울에 거처를 마련하도록 조카에게 건네주었다. 어느 날 온 가족이 서울집 주소를 찾아 찾아 종로 통인동 어느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그 집은 아주 커다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들어갈 수도 없고 한동안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어 근처 여관을 전전하며 연락을 기다리면서 일가족이 아주 어려운 생활을 했다. 1946년 엄마가 국민학교 3학년을 마친 어느 겨울날의 일이었다. 첫 서울살이는 춥고 고생스러웠다. 엄마네 가족은 난생처음 지독한 가난을 경험했다. 사기였는지 사고였는지 어른들의 이야기라 엄마는 정확히 몰랐다. 다만 할머니가 몇 날 며칠을 운 것만은 사실이다.
어느 날 외할아버지의 조카, 즉 엄마에겐 사촌 오빠인 그분을 따라 엄마 바로 아래 남동생(견식 외삼촌)과 삼청 국민학교에 처음 갔다. 교장실에서 엄마에게 어디까지 배웠는지 책을 읽어보라고 해서 술술 잘 읽었다. 교장선생님이 칭찬하며 곶감을 주었는데 먹지 않고 있었더니 사촌 오빠가 '시골 촌뜨기들이에요'라고 얘기하며 웃었다. 엄마는 우리를 감히 흉보다니 생각할수록 분하고 화가 나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할머니한테 일렀다. 그날 저녁 할머니가 막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촌 오빠에게 한바탕 싫은 소리를 했더니 멋쩍게 웃다가 들어오지도 못하고 그냥 갔다. 온 가족이 서울에서 생고생을 하는 것이 사촌오빠 때문이라는 원망의 마음이 깊게 있었으리라.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촌오빠는 넉살이 좋아 가족들이 그리 오래 미워하지는 못했다.
엄마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매일 빵을 한 개씩 주었는데 먹지 않고 가방에 넣어 두었다가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냅다 달려와 화롯가에 옹기종기 앉아 있는 동생들에게 나눠 주었다. 어린 엄마였지만 동생들이 늘 안쓰러웠다. 주말이면 남동생을 데리고 엄마의 외삼촌 가족이 살고 있는 서울대 관사에 가서 시간을 때워야 했다. 사촌들이 창밖을 보면서 '쟤네들 또 왔네..' 하는 말에 눈치가 보여 거기 가는 것이 정말 싫었지만 동생 손을 잡고 경복궁 돌담길을 걷고 또 걸어가 어쨌든 거기서 한 끼를 해결해야 했다.
그러던 중 간신히 안양의 어느 방한칸에 세 들어 살게 되었다. 안양집에서는 여름이면 남동생을 데리고 근처 안양 수영장에 가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여덟 식구가 복작거리는 작은 방이라도 학교에서 돌아와 맘 편히 있고 싶었지만 할머니는 허락하지 않았다. 수영장을 오가는 아스팔트 길이 여름 햇볕에 굴렁굴렁했다. 가난한 서울살이에 이어 안양살이 역시 가난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안양에서 엄마는 중학생이 되었다. 엄마는 할머니가 만들어 준 교복을 입고 다녔다. 1950년 안양 중학교 1학년, 과천에 있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가기로 한 날, 외할아버지가 전쟁이 심상치 않으니 바로 그날 피난을 떠나야 한다고 했다. 친구와 약속을 못 지켜 속상했다. 여중생 엄마는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참혹한 6.25 전쟁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