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어 한토막과 찰밥

엄마 어린 시절의 사치

by 파드마

일제 강점기 시대 여자 이름에는 일본의 '~꼬'자 돌림처럼 순자, 말자와 같은 '~자'자 돌림이 많았을 터인데도 어쩐 일인지 엄마 집안의 자매 이름은 조금 특이하다. 듣던 대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시대를 앞서는 분이셨나 보다. 엄마는 1936년 5월 득우 아버지와 송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까무잡잡했고 키가 커서 집안에서 호적에 올린 이름 대신 대선이로 불리기도 했다. 엄마가 태어난 때는 시대적으로는 암울한 시기였지만 엄마는 마을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는 의원집 딸로 태어났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귀하게 대해 주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때는 누구나 가난했기 때문에 외할아버지는 병을 고쳐주고도 돈을 받지 못하거나 곡물, 생선 등의 현물로 치료비를 대신 받는 경우가 많았다. 엄마는 어린 시절에 고등어 한토막이 있어야 밥을 먹었다고 기억한다. 화로에 노릇노릇 구운 고등어가 얼마나 꿀맛이었을까. 국민학교 입학할 때는 입학시험으로 일본어 단어 시험을 봤는데 엄마가 잘해서 운동장에서 진행하는 입학식에서 상장을 받았다. 할머니가 운동장 앞쪽에 설치된 천막 자리 학부모석에 당당하게 앉아 계셔서 어깨가 으쓱했다.


엄마도 아주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외할머니는 결혼 전 잠농학교 사감 선생님을 한 적이 있다. 막 시집간 이모집에 할머니가 다녀가는 것을 보고 옆집에 살던 이웃이 알아보고 깜짝 놀라며 말해 주었다. 할머니가 청년이었던 시절, 그러니까 일제 강점기 치하에서는 누에에서 실을 뽑는 일을 대대적으로 하기 위해 우리나라 곳곳에 학교를 만들었다고 한다. 할머니의 생전 모습이 사감 선생님과 어울린다.


외할머니가 아무리 시대를 앞서갔어도 남아선호사상은 어쩔 수 없었는지 한 번은 할머니가 외삼촌(엄마 바로 밑에 남동생)에게는 커다란 밤을 주고 엄마한테는 손위인데도 작은 밤을 주어서 손에서 스르르 떨어뜨려 일종의 작은 반항하기도 했다. 또 한번은 엄마가 국민학교 2학년을 마치고 우등상을 받아 할머니한테 칭찬 받을 생각에 집으로 뛰어 가다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났다. 아픈 것도 잊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상장을 꺼냈더니 할머니는 전혀 좋은 기색 없이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 견식이(외삼촌) 사내가 상 받아야지, 여자가 받아 뭐하냐.' 그리고는 괜시리 넘어져 다쳤다고 야단만 맞았다. 엄마는 방 한쪽 구석에 쭈구리고 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그날은 할머니의 밥먹으라는 소리에도 먹지 않고 버텼다. 밥 먹지 않는 것이 최고의 무기가 되는 시절이 있다. 얼마전 엄마가 이 얘기를 이모들에게 하니 놀랍게도 한 이모가 이 일을 기억했다, 언니가 다리에 피흘리고 온 날로.

할머니가 남아를 선호하기는 하셨지만 자식들에 대한 사랑만큼은 지극하셨다. 엄마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밤과 대추를 넣은 찰밥을 만들어 허기를 채워 주셨고 창고를 개조해 그네를 달아 놀이 공간도 만들어 주셨다. 그러고 보니 엄마도 우리 가족 모임이 있을 때면 밤, 대추, 콩, 팥, 건포도 등 온갖 재료가 들어 있는 영양찰밥을 뚝딱 만들어 놓으신다. 사랑은 이렇게 먹거리로 대물림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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