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속의 기적
1950년 8월, 안양에서 지내던 중 화폐개혁이 있었다. 큰 이모와 엄마는 안양에서는 못쓰게 된 돈을 가지고 아직 이전 화폐로 거래가 되는 시골에 가서 뭐든 사 와야 했다. 안양에서 조치원까지 가려고 기차역으로 갔는데 미군이 큰 이모에게 뭐라 뭐라 했다. 큰 이모가 영어로 대화하더니 "땡큐 땡큐'하고 함께 탱크를 얻어 탔다. 탱크 안이 아니라 겉면에 움푹 파인 공간이 있어 큰 이모와 엄마가 딱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탱크 공간에 웅크리고 앉아 할머니가 싸준 찰밥으로 점심 저녁을 해결했다. 미군이 탱크가 서는 중간중간 둘이 잘 있나 들여다보곤 했다. 그때는 무서운 것도 몰랐다. 탱크에서 내려 고향마을까지는 걸어가야 했다. 그렇게 큰 이모와 엄마는 서로 꼭 붙잡고 백석정 은행나무 길을 걸어 한밤중에 외할아버지 먼 육촌 아저씨(앞실 아저씨라고 불렀다) 댁에 갔다. 누추한 곳에 귀한 손님들이 왔다고 놀라며 반겨주었다. 다음날 아저씨네가 시골 장터에 가서 그 돈으로 고추를 사다 주어 받아 들고 다시 걷고 또 걷고 기차 타고 안양집으로 돌아왔다. 그 고춧가루를 다 먹지도 못하고 또다시 피난을 가야 할 줄 그때는 몰랐다. 그 후 큰 이모는 신변안전을 위해 서울에 있는 엄마 외삼촌 댁에 가 있기로 했다. 엄마는 철길을 따라 걸어가는 큰 이모 뒷모습을 보면서 불쌍해서 계속 눈물이 났다.
1950년 9월, 외할아버지가 황급히 집에 들어와 큰일이 났다고 했다. 다시 전쟁이 났으니 또 피난을 떠나야 한다고 했다. 9월 15일 그 유명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던 것이다. 짐을 꾸려 안양에서 고향마을 활미까지 100리 길을 이틀 반 만에 걸어 내려갔다. 이때 많은 인민군들이 미군 포로로 잡혔고 포로로 잡힌 이들이 길에 보이는 아무나 인민군이라고 찍어대는 바람에 오랫동안 숨어있다가 미군을 환영한다고 나온 주민들이 영문 모르고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미군 탱크들이 시커멓게 줄지어 미원고개를 넘어 올라왔는데 엄마 바로 아래 남동생(견식 외삼촌)은 '기브미 쪼꼬레또 기브미 쪼꼬레또 !' 하면서 주머니가 불룩하게 초콜릿을 많이 받아왔지만 한 개도 나눠주지 않았다. 그렇게 미군 탱크 행렬은 죽음을 불러오기도 했고 희망을 전해 오기도 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바뀌는 것 같더니,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다시 전세가 불리해져 더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1951년 1월, 엄마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역사가 벌어지게 된다. 엄마는 어린 남동생을 업고 바로 아래 남동생 손을 잡고 피난길을 가고 있었다. 625 둥이 막내 외삼촌은 너무 어려서 할머니가 업었다. 그러던 중 피난 인파 속에서 그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정말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사람들의 물결이 모두 아래로 아래로 향하고 있었지만 엄마는 그럴 수 없었다. 외할아버지와 함께 안양집과 고향마을 큰아버지 댁을 오갈 때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산길로 다녔던 기억을 더듬어, 오던 길을 거슬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린 엄마가 어린 남동생 둘을 데리고 피난길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보는 사람들마다 어디 가냐고 불러 세우며 아래로 가라고 타일렀지만 엄마는 그럴 수 없었다. 길 한쪽 눈 쌓인 곳에 큰아버지댁으로 간다고 손으로 써 놓으며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 메시지를 보기를 애타게 바랐다. 어느 묘지를 지나 산길을 걷고 또 걸어 새벽 즈음 가까스로 큰아버지댁에 다다를 수 있었다. 아직 피난 가지 않은 큰아버지댁 어른들이 어떻게 왔냐며 깜짝 놀라며 맞아주었다. 그리고 그날 정오가 넘어 낮이 되어서야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큰아버지댁으로 왔다. 그렇게 드디어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진 것이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외할아버지는 때마다 '대선이 덕분에 우리가 이만큼 산다'하고 얘기하곤 하셨다. 만약 엄마가 사람들에게 휩쓸려 남쪽으로 아래로 계속 갔었더라면.. 그랬다면 지금의 나는 이 세상에 없었겠지... 그때 어린 엄마 덕분에 내가 이 세상에 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