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주름진 마음을 펴주는 것.

결혼 25주년에 쓰는 편지

by Suno


한 존재가 태어나고, 의미 있게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으려면

어쩌면 이만큼 살아온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나 생각을 해.

젊을 때엔 내가 사는 이유를 묻기에 젊음이 너무 버거웠고, 아이를 낳고 기를 때엔 그 질문이 아이를 기르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지.

그 후로도 앞만 보고 살기에 급급하던 시절에 그 질문은 사치였어.


우선 결혼 25주년! 오늘까지 함께 사는 우리 장하다. 치얼스!



한 사람이 태어나 살아가는 의미는 무얼까.

갱년기가 되어서야 나는 그것에 끊임없는 질문을 했던 거 같아.

다시 갱(更). 살 년(年).

반쯤 살고 나머지 반을 더 사는 거라면

몸도 생각도 정비해야 하는 갱년기가 필요했던거지.

나는 어느 때 행복한가. 내 삶은 언제 의미 있나.

오랜시간 골똘한 질문에도 답을 찾는 게 쉽지 않았지.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이미 눈치챘겠지만, 맞아.

지금 이건 일종의 사랑 고백이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사랑받는 존재구나 느끼게 해 준 사람이 너였어.

찌그러져 있는 풍선에 바람을 넣듯 나를 의미 있게 바라봐 준 사람이 너였지.

30년 전 나를 처음 알았을 때부터 너는 나한테 아까운 게 없었어.

시간도 물질도 마음도.

가진 걸 모두 내어줘도 아깝지 않은 게 사랑이 아니고 뭐겠어?


한 번은 꽉 채워져봐야 한 존재가 스스로의 모습을 알게 되는 것 같아.

마치 풍선에 바람이 가득 차야만 풍선의 온전한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오래 전 내가 쭈글쭈글 펴지지 않는 주름이 많은 사람이었다면

너의 신뢰할 수 있는 표정, 오래 두고 본 마음, 받아도 미안하지 않았던 사랑...

그것들 덕분에 주름이 쫙 펴지는 느낌이었지.

이상하게 자꾸 눈물이 났어.

마음이 벅찬데 눈물이 나는 경험.

그런 경험을 너와 살면서 여러 번 했지.

내 마음이 펴지느라 자꾸 눈물이 나는 건가? 이상한 기분이 자주 들었어.


주름이 펴진 내 모습을 보니, 나는 생각보다 잘 웃고 작은 것에 행복해하는 사람이더라.

그거였지.

사랑은 상대의 주름진 마음을 잘 펴주는 거더라고.

좋은 마음으로 다정하게, 천천히 후후 불어, 주름진 마음을 온전히 펴주는 것.

아, 한 존재의 의미를 묻는 질문으로 시작했었지.

지금부터 나는 언제 행복한지를 오래 생각해 온 내 대답이야.


주말 아침.

아늑하게 앉아 향 좋은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볼 때엔,

이건 내가 그렸던 삶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들곤 해.

행복의 고백이지.

계절마다 나를 데리고 갈 풍경 좋은 곳을 고민하고,

시간이 오래 지났어도 여전히 아낌없이 가진 걸 내어주는 사람이 나한테 있거든.

그런 사람과 평생 함께 한다는 건 내가 받은 축복이야.

고백이야. 너에게 감사하다는.


내 행복은 주로 너와 함께 있을 때 있어.

그러니 내 행복은 밖에 있지 않지.

나는 이런 내 삶이 맘에 들어.

다른 누구와 비교하면서 좇지 않아도 되는 내 모습이 좋아.

이게 내가 선택한 행복이 아닐까.

그래서 이 모습이 '나'로 기억되길 바래.

그게 내 존재의 의미일 테니까.

고마워.

수많은 사람 중에 나를 사랑해 줘서.

p.s. 날이 날이니만큼

티격태격 하루에 열두 번씩 싸우고 미워했던

그런 날들은 고운 눈더미 속에 묻어둡니다. ^^


2025년 1월.

너의 건실한 와이프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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