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매거진
행복을 부르는 말
사랑, 주름진 마음을 펴주는 것.
결혼 25주년에 쓰는 편지
by
Suno
Jan 10. 2025
한 존재가 태어나고, 의미 있게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으려면
어쩌면 이만큼 살아온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나 생각을 해.
젊을 때엔 내가 사는 이유를 묻기에 젊음이 너무 버거웠고, 아이를 낳고 기를 때엔 그 질문이 아이를
기르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지.
그 후로도 앞만 보고 살기에 급급하던 시절에 그 질문은 사치였어.
우선 결혼 25주년! 오늘까지 함께 사는 우리 장하다. 치얼스!
한 사람이 태어나 살아가는 의미는 무얼까.
갱년기가 되어서야 나는 그것에 끊임없는 질문을 했던 거 같아.
다시 갱(更). 살 년(年).
반쯤 살고 나머지 반을 더 사는 거라면
몸도 생각도 정비해야 하는
갱년기가
필요했던거지.
나는 어느 때 행복한가. 내 삶은 언제 의미 있나.
오랜시간 골똘한 질문에도 답을 찾는 게 쉽지 않았지.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이미 눈치챘겠지만,
맞아
.
지금 이건 일종의 사랑 고백이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사랑받는 존재구나 느끼게 해 준 사람이 너였어.
찌그러져 있는 풍선에 바람을 넣듯 나를 의미 있게 바라봐 준 사람이 너였지.
30년 전 나를 처음 알았을 때부터 너는 나한테 아까운 게 없었어.
시간도 물질도 마음도.
가진 걸 모두 내어줘도 아깝지 않은 게 사랑이 아니고 뭐겠어?
한 번은 꽉 채워져봐야 한 존재가 스스로의 모습을 알게 되는 것 같아.
마치 풍선에 바람이 가득 차야만 풍선의 온전한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오래 전
내가 쭈글쭈글 펴지지 않는 주름이 많은 사람이었다면
너의 신뢰할 수 있는 표정, 오래 두고 본 마음, 받아도 미안하지 않았던 사랑...
그것들 덕분에 주름이 쫙 펴지는 느낌이었지.
이상하게 자꾸 눈물이 났어.
마음이
벅찬데 눈물이 나는 경험.
그런 경험을 너와 살면서 여러 번 했지.
내 마음이 펴지느라 자꾸 눈물이 나는 건가? 이상한 기분이 자주 들었어.
주름이 펴진 내 모습을 보니, 나는 생각보다 잘 웃고 작은 것에 행복해하는 사람이더라.
그거였지.
사랑은 상대의 주름진 마음을 잘 펴주는 거더라고.
좋은 마음으로 다정하게,
천천히 후후 불어, 주름진 마음을 온전히 펴주는 것.
아, 한 존재의 의미를 묻는 질문으로 시작했었지.
지금부터 나는 언제 행복한지를 오래 생각해 온 내 대답이야.
주말 아침.
아늑하게 앉아 향 좋은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볼 때엔,
이건 내가 그렸던 삶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들곤 해.
행복의 고백이지.
계절마다 나를 데리고 갈 풍경 좋은 곳을 고민하고,
시간이 오래 지났어도 여전히 아낌없이 가진 걸 내어주는 사람이 나한테 있거든.
그런 사람과 평생 함께 한다는 건 내가 받은 축복이야.
고백이야. 너에게 감사하다는.
내 행복은 주로 너와 함께 있을 때 있어.
그러니 내 행복은 밖에 있지 않지.
나는 이런 내 삶이 맘에 들어.
다른 누구와 비교하면서 좇지 않아도 되는 내 모습이 좋아.
이게 내가 선택한 행복이 아닐까.
그래서 이 모습이 '나'로 기억되길 바래.
그게 내 존재의 의미일 테니까.
고마워.
수많은 사람 중에 나를 사랑해 줘서.
p.s. 날이 날이니만큼
티격태격 하루에 열두 번씩 싸우고 미워했던
그런 날들은 고운 눈더미 속에 묻어둡니다. ^^
2025년 1월.
너의 건실한 와이프로부터.
keyword
결혼기념일
사랑
편지
22
댓글
1
댓글
1
댓글 더보기
브런치에 로그인하고 댓글을 입력해보세요!
멤버쉽
Suno
나의 기록이 종국에 내가 되는 것을 아는 사람
구독자
80
팔로우
월간 멤버십 가입
월간 멤버십 가입
매거진의 이전글
작은 존재의 충만한 위로
남쪽에서부터 오는 봄기운
매거진의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