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기억하는 그리움
댕글댕글 노란 나뭇잎들이 달큰한 향기를 퍼뜨리는 계수나무의 계절이 왔다.
나무를 알아보기 전에 향기로 먼저 알아보는 계수나무. 빙그레 미소를 짓고 멈춰서게 하는 향기.
또한 킁킁 코를 가져다대고 흠뻑 맡지 않고서는 못 베기는 은목서의 시절은 아쉽게도 막 끝이 났다.
금목서의 향기는 은목서와 또다르게 매혹적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벌써 내년 가을을 기다리게 되었다.
내가 아직 맡지못한 향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설레이고 들뜨게 만든다.
매혹하는 것들의 시간은 훅 짧다. 그것들의 향을 맡으려 내년 가을을 벌써 기다린다.
기다리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기다리는 일은 기다리는 동안 나를 깨어있게하고 기쁘게 하기 때문에.
내년 가을, 금목서가 피는 짧은 시간에 남쪽을 제때 찾아가려면 나는 정신을 바짝차리고 기다릴 것이다.
그때까지 즐겁게.
계절마다 향기가 있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지.
우리가 마주하는 다음 계절들은 모두 저 마다의 향기가 있다.
봄은 단연 매화의 계절이다.
삭막한 겨울을 견딘 끝에 찾아온 매화의 자태와 그 향은 다시 오는 봄마다 기적같다. 봄은 축제처럼 온갖 흰 꽃 무리들이 향기를 뿜어내고, 우리는 그 향기 속에 파묻힌다. 새로 피어나는 것들의 축제. 아카시아 찔레 라일락 이팝나무 싸리꽃 향기들. 하얗게 피어난 꽃들은 모두 제 향을 뽐내느라 어지럽다. 봄은 정말이지 경이로움의 계절이다.
풍성한 여름. 여름의 향기는 꽃보다 여름 자체에 있다.
무서운 속도로 자라나는 계절 속. 짙고 어둡게 드리운 초록 사이에서 꽃들은 저마다의 색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훅 끼치는 흙냄새 속에 생명을 무성하게 하는 여름이 있다. 저마다 앞다투고 뒤에 달려와 피어난 화려한 꽃들의 향은 그 뒤로 물러난다. 변덕스럽게 내리고 사라지는 비의 쌉싸리하고 비릿함 속에 강인한 여름이 있다.
가을. 가을 아침의 공기를 우리는 얼마나 사랑하는가.
코끝이 알싸하게 청량한 아침의 내음은 향기라 부를 수 없어도 가을의 내음이다. 우리는 이 느낌에 가을이 왔음을 느끼고 이 계절의 그리움을 그 느낌에 묻어둔다. 이 짧은 계절이 지나가면 그리워질 것을 너무나 잘 아는 나는, 이 요즘의 매일 아침을 만끽하고 있다. 아침의 공기에 탄성처럼 내뱉어 말한다. 아 좋다.
겨울. 어른이 되어서도 흰눈에 뒤덮인 온 세상에 대한 로망이 있다.
빨갛게 얼어버리는 콧잔등과 폐속까지 들어오는 쨍한 공기. 겨울의 그리움은 종종 어떤 향기까지 데려온다.
겨울은 향기가 있을까? 오래전 나에겐 니베아 핸드크림의 향이 그랬다.
어떤 계절엔 어떤 이와의 추억이 향기가 되어 묻혀있는 계절이 있다.
그리고 바람의 냄새. 외출에서 돌아온 이의 외투에 묻어온 북풍의 기운이 서린 겨울의 냄새에는 어떤 그리움이 있다. 고된 밖의 하루를 마치고 바람을 묻어온 냄새에서도 나는 겨울의 그리움을 기억한다.
이 계절이 지나면 예정대로 다른 계절이 온다.
그 계절마다의 그리움이 향기처럼 기억되고 그리움을 나이테처럼 쌓아간다.
그 그리움들은 나의 생을 풍요롭게 해주는 계절의 향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