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 귤과 함께, 1일 차. 2021. 11. 22
늘 그렇듯 시작은 우연한 계기부터 시작된다.
어디든 바다를 보고픈 마음에 내 오랜 친구 A와 함께 기차를 타고 강릉을 가는 길, 시험이 끝나고 시간이 어영부영 가는데 이럴 때 뭘 해야 허탈하지 않겠냐는 나의 이야기에 A는 시간이 그렇게 있다면 갈 수 있을 때 가라며 제주 한 달 살기를 추천했다. 스치듯 한 이야기이지만 그 어떤 이야기나 제안보다 내 귀에 와닿는 일이었다.
그 후 약 1주간 잠이 안 오는 시간 숙소를 이래저래 보다가 숙소로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 나를 보고 문득 이게 무슨 힐링여행인가 싶어 그냥 예산보단 조금 더 쓴 가격에 뷰가 몹시 좋은 바다에 가까운 숙소를 잡았다. 제주를 가로로 반으로 나누었을 때 2주는 위 2주는 아래쪽 숙소를 머물까도 생각을 했으나, 1달 연박 할인가에 너무 혹하는 바람에, 또 2주씩 지내면 숙소비가 근 두배 이상이라 그냥 제일 마음에 드는 서귀포 쪽 숙소를 잡았다. 범섬이 코 앞에 보인다는 아름다운 뷰를 지닌 리조트! 생각만 해도 낭만적이잖아! 숙소를 바로 잡고 비행기를 바로 예약하고 조금은 급작스럽게 그렇게 내 여행은 정해졌다.
그 후로도 나의 일정은 마냥 녹록지는 않아서 매일매일 그동안 공시생활로 못 만나던 사람들을 만나고 [천백희네 집] 프로젝트로 우리 집 집들이를 하고, 또 비루한 공시생인 나를 챙겨주던 다른 친구들과 속초의 고급 호텔을 다녀오고 아이폰과 애플 워치를 사며…. 화려한 생활을 했다. 덕분에 짐을 전혀 미리미리 싸지 못하고, 그동안 쌓인 짐을 정리할 시간도 없었던 것…….
정말 행복했지만 정신이 없었고, 그동안 늘 혼자 공시 생활을 하다가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몹시 지쳤다…
가을 단풍과 힐링을 테마로 한 집들이 었는데, 사람 맞이할 준비를 하고 이러저러 이야기를 듣다 보니 기운이 많이 빠진 것 같다.
어쨌든 짐을 미리 못 싼 나는…. 유럽 여행 때의 실수를 반복하며 이번엔 겨울옷이라 빅 캐리어 2개+ 백팩 2개+ 에코백 1개 분량의 짐을 만들어버렸다.
몹시 크고 무겁다. 여름과 겨울의 차이라고는 하지만… 그때보다 기간은 짧은데 뭔가 짐은 1.8배 정도 되는 듯하다.
제주에 나름 힐링여행 (글쓰기와 힐링, 유튜브, 카페 투어 등을 곁들인…)을 가는 건데, 이미 짐부터가 힐링이 아니다. 문 밖으로 모든 짐을 들고 가다 보니 버스나 지하철은 탈 엄두도 안 나서 집 앞에서 그냥 택시를 타고 공항까지 왔다. 너무나 무거워…
며칠 전 여행 짐을 싸다 보니 그동안 방에 쌓인 짐들을 쓰레기봉투 3개 분량 정도 버려 의기양양했던 나는,
허탈해서 웃음이 나왔다. 나름 많은 것들을 버려 많이 가벼워졌다고. 이젠 미니멀리스트가 아닐까 하고 캐리어 하나면 충분할 거라고 여겼는데
여전히 나는 맥시멀리스트이고 예상의 *4 분량의 짐을 만들며 무언가의 결핍에 여러 물건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여행 당일 아침 부랴부랴 도테라 본사에서 다 쓴 스피어민트 오일을 굳이 굳이 강남까지 가서 받아온 나는 도대체 뭘까.
지금으로선 나쁘진 않지만 너무 무거운 게 아닐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어찌 되었든 오늘 가져갈까 말까 고민하던 코트 안의 핑크 털옷까지 껴입은 나는 택시에서 정말이지 무겁고 멀미가 났다. 불친절하고 위가 안 좋으신 기사 아저씨는 덤으로…
어리바리하기 짝이 없는 나는 뭔가 덜렁 또 이렇게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짐을 싸며 참으로 허탈하고 나에 대해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나를 받아들이고 나아가는 것만이 결국 답이고 최선이었으니까.
부디 이번 여행을 통해 나의 짐들을 차차 정리하고 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물론 모든 짐을 버리진 못하고 일부는 여행 전 택배로 서울로 보내야겠지만. 조금은 더, 가능하다면 아주 많이 더 가벼워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하며.
비행시간보다 몹시 일찍 와서 멍하니 글을 쓴다.
5시 반 비행기인데 2시 전에 와서 수화물도 못 붙였다. 지금 2시 50분이니깐 그래도 이렇게 혼자 또 잘 놀다 보면 30분이 되겠지. 3시 반에 짐을 부치면 그땐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며 기다려야겠다.
수화물 비용은 얼마나 더 나올지… 정말 무섭다. 유럽여행 땐 그래도 추가 비용은 안 낼 정도였었는데 이번엔 10만 원 정도 나오는 게 아닐지… 올 땐 꼭 택배로 많이 붙이자 입은 옷들.
그리고 12월 20일 즈음엔 가벼운 몸으로 좋은 장소 몇 군데에서 며칠 묵다가 찬찬히 올 계획이다.
23일이나 24일이면 적당하려나? 크리스마스라 너무 비싸질 수도 있으니 그전에 도망 오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어제 마지막 <2021.NOV 천백희네 집 프로젝트> 마지막 손님인 A가 취업& 제주생활 축하선물로 필름 카메라를 선물해주었다!
제주 생활 중 약 2주나 3주 차쯤 놀러 오기로 하였는데. 그 겸사도 있다고는 했지만, 그냥 취업 선물을 그렇게 해준 게 너무너무 감동이고 생각지 못한 선물이었다.
이쁜 장면을 많이 많이 찍어와야지. 홀로 시작하는 오랜 제주 여행이 조금 걱정도 되고 그에 비례하여 짐도 어마 무시했는데,
A의 그 선물을 생각하면 참으로 마음이 부드럽고 편안해진다. 제주에 가면 A에 대한 편지도 써야지
두서없는 글이지만 내 마음이 제대로 녹아든 글이려나. 다시 보며 정리해야겠지만, 두서가 없는 만큼 나의 어떤 설렘이 전해지는 첫 시작 글이길 바란다.
한 달 어쩌면 그보다 조금 더 부디 즐겁고 알차고 하고픈 거 다 이루고 오는 시간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