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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주 단속

12 밀주단속

by 김호진

'순사와 단속반이 떴다네! 아이고 어쩌지'


할머니께서 종종걸음으로 삽작에 들어서면서 사랑방까지 들릴 정도로 크게 말씀하셨다. 나는 별안간 며칠 전 작업한 일이 생각나서 부리나케 일어나 뛰쳐나갔다.


정확이 3일 전 할머니께서는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하셨다. 쌀을 이용하여 곡주를 담았던 것이다.

나는 할머니께 일을 나누어서 하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할아버지께서도 일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할머니께서는 나에게는 마른 짚과 땔감을 준비하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일을 맡기셨다. 할아버지께는 술단지를 찾아 깨끗하게 씻는 일과 일이 다 끝난 후에 술단지를 숨기는 일을 맡기셨다.


먼저 할머니께서는 술 담기 하루 전날 찹쌀을 씻어서 물에 담가 두었다. 그리고 누룩을 꺼내 살펴보셨다. 할아버지께서는 할머니께서 찹쌀 씻을 동안에 술단지를 벌써 꺼내어 씻고 계셨다. 나는 마른 짚단을 골라 부엌 앞에 쌓았다. 바짝 말려 놓은 잔가지들도 가져와 짚단 옆에 쌓았다.


술 담는 날이 되자 할머니께서는 물에 불려 놓은 찹쌀을 삼베천으로 옮겨 담아 물기가 빠지게 했다. 그리고 시루로 옮겨 밥을 찔 준비를 했다. 나는 불을 마른 짚을 이용 하여 불을 지폈다. 불 조절은 할머니께서 도와주셨다. 어는 정도 시간이 지나자 할머니는 쌀알의 색깔을 살피고 몇 알을 입에 넣고 씹어 보더니 불을 약하게 하라고 했다. 김이 무럭무럭 나오는 고두밥은 하얗고 고슬고슬했다. 그래서 고두밥이라고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고두밥은 왕골돗자리에 펼쳐서 식혔다. 그리고 누룩을 손으로 비벼 가루가 되도록 했다. 이제 누룩을 고두밥과 고르게 섞어 주었다. 나는 할머니와 고두밥을 누룩과 섞어면서 구르게 펼쳐 놓았다. 이제 할아버지께서 해야 할 일이 남았다. 단지에 누룩과 잘 비벼진 고두밥을 넣고 물을 붓는 일이었다. 할머니께서 물을 부으면 고두밥을 가라앉혔다. 물 양은 할머니께서 조절했다.


할아버지께서는 단지를 어디에 둘지 미리 생각해 둔 곳이 있는지 망설임 없이 단지를 들고 외양간으로 갔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할머니와 사다리 위로 단지를 올리는데 힘을 모았다. 소 외양간 높은 곳에 있는 다락 구석에 단지를 놓고 두터운 천으로 감싸고 주변을 짚으로 푹 덮었다.

할머니께서는 우리가 정성을 들였기 때문에 맛있게 잘 익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앞으로 농사일로 바빠지면 시간이 없기 때문에 미리 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사랑방 손님 중에 '막걸리 한 사발이 배를 채우고 힘을 나게 하는데 최고'라고 말씀하시던 아저씨가 떠 올랐다. 할아버지께서는 술을 취할 때까지 드시는 것을 본 적은 없었지만 일을 할 때는 한 사발씩 쭉 들이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곡주를 나라에서 만들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른들은 알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할아버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렇게 맛 좋고 농사일할 때 필요한 것을 왜 나라에서 못 만들게 해요"


할아버지께서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지금은 나라에서 지정해 준 곳에서만 만들도록 한단다. 허가를 받은 사람만이 만들 수 있게 된 거지. 허가받은 술 공장에서는 술을 팔고 벌어 들인 돈 중에서 어느 정도를 나라에 낸단다."

할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돈을 나라에 내는 것을 세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라에서 허가를 내주는 것은 세수를 늘리기 위함이고 또 일부 유지들의 배를 채우는데 앞장서고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관리들과 연줄이 닿은 사람들에게만 특혜를 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농사꾼들이 배고 곯아서 일할 때 먹으려고 담그는 곡주를 못하게 하다니 나라님도 무심하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일에 욕지거리는 내뱁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불만만 토로할 뿐이었다. 그래도 농사철이 되면 대부분의 집에서는 몰래 곡주를 담는다고 했다. 술을 사는데 쓸 만큼 돈이 넉넉하게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오늘 우리 동네에도 밀주 단속반이 떤 것이다. 걸리면 벌금을 내고 잠시 지서에 다녀와야 했다. 어떤 해에는 몇몇 마을 사람들은 큰 고초를 겪기도 했다고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술단지를 숨길 장소로 처음에는 잿더미 속에 넣으려고 했다고 하셨다. 짚을 태우고 남은 재를 모으는 장소가 사랑채 중간에 있었다. 부엌에서 나오는 재는 모두 모았다. 다음 농사에 거름과 함께 섞어서 사용했다. 설마 잿더미를 뒤지거나 검은 재가 펄펄 날리는 재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더 좋은 장소를 찾았다는 것이다. 딱 안성맞춤인 장소가 있었다. 소가 있는 외양간 위에는 사다리를 놓아야 올라갈 수 있는 문이 없는 다락이 있었다. 사용하지 않는 오래된 물건이 있었다. 지금은 오래된 멍석과 사용하지 않는 연장이나 나무로 만든 농기구 몇 개가 보였다. 어둑 컴컴한 것이 아무도 올라가고 싶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결정적인 것은 사다리가 있어야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안쪽 깊숙한 곳에 밀어 넣고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앞을 가리고 짚으로 덮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위장이 되었다. 사다리는 뒤뜰로 옮겼다.


꽤 시간이 지나서 옆집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관리들이 마당에 모습을 보였다. 개코 순사라고 했다. 냄새를 잘 맡아서 그가 가면 여지없이 밀주는 발각이 된다는 것이다. 곡주가 익을 때 나는 냄새는 담가본 사람이면 다 알 수 있는 냄새였다. 그래서 호박 넝쿨 속에 숨기기도 하고, 짚볏단 속에 숨기기도 하고, 배짱 두둑한 아랫마을 할머니는 단속반이 마당으로 들어오면 우물가에서 웃옷을 훌러덩 벗고 물을 퍼붓는 등 웃지 못할 일 많이 벌어졌다고 했다. 사람들은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했다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과 숨바꼭질을 해 오던 단속반이 떴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온 마을로 퍼졌다. 동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담 너머너머로 전달된 신호가 할머니께도 전달되어 빠르게 숨길 수 있었다. 우리 집은 마을 가운데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여러 집을 거치는 동안 완벽하게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침착하고 당황하거나 놀란 표정을 짓지 말라고 하셨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곡주 단지가 있는 곳을 쳐다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도 가만히 따라다니면서 지켜보았다. 몸이 덜덜 떨렸지만 애써 침착하려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마침내 외양간 문을 열었다.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보겠다고 하면 어쩌나. 자꾸 내 시선이 외양간 위쪽으로 향했지만 다행히 그들은 내 눈의 시선에 관심이 없었다. 단속반이 옆집으로 물러나자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숨을 몰아쉬면서 마루에 걸터앉았다.


원래 밀주라고 말은 없었다. 가난한 농민들이 어쩌다 잔칫날이나 쓸 용도로 담갔던 것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수탈하던 시절부터 가정에서 곡주를 담가서 먹던 것을 금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 쌀을 공출하게 하고 군량미로 사용하고 자국에 팔기 위한 아주 악행을 자행이었다고 한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서 그들은 먹을 것도 없는데 왜 술을 만들어 먹느냐 하는 것이다. 해방 이후에는 각 면단위별로 술을 제조하는 허가를 내주었다. 술제조 허가를 받은 집은 많은 수익을 올리고 바로 그 지역의 유지가 되었다. 가정에서 만들어 먹던 곡주는 결국 밀주라 하여 단속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단속반에 걸리면 벌금을 하거나 심하면 징역도 갔다. 그래도 잔치를 하거나 초상이 난 집에서는 손님을 대접해야 하기에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가난한 마을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만들어 먹던 곡주는 불법적인 밀주로 둔갑을 했다. 결국 땅에 묻거나 아주 깊은 곳에 숨겨서 먹을 수밖에 없었다. 나라가 백성들을 비참하고 비굴하게 만든다고 할아버지는 푸념 썩인 말을 종종 했다. 그러나 나라님 하는 일에 부정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밀주 단속이 지금보다 훨씬 더 심했다고 했다. 어느 해에는 밀주 단속이 심하여 걸핏하면 세무서에서 단속반이 나와서 무조건 집으로 들어와서 안방이고 부엌이고 다 헤집고 다녔다고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잠시 말을 쉬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고는 말씀을 이어갔다.

"마을 사람들은 단속반이 언제 들이닥칠까 조마조마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주는 계속 담갔고, 단속반이 동네에 나타나면 모두 두려워했단다. 가난하여 막걸리 살 돈이 없으니 집에서 막걸리를 담을 수밖에 없었지. 사실 술 공장에서 나온 막걸리보다는 집에서 만든 쌀 막걸리가 입에 당겼으니 단속이 심해도 담가 먹었던 거야"


할아버지에게 법이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또 잘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으면서 무조건 권력만 휘두르는 괴물을 뜻했다. 법이란 '돈'있고 '빽'있는 사람에게는 관대하면서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에게는 가혹하다는 것이 할아버지의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우리 동네 사람들은 법이라는 것이 없어도 잘 살아왔다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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