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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진 Sep 17. 2023

붓다가 된 싯달타

산사에서 180일

붓다가 된 싯달타



산사의 겨울은 세찬 눈보라의 울부짖음과 함께 깊어갔다. 눈 덮인 산길을 스님과 걸었다. 

황악산 바람재를 넘어오는 바람이 맵다. 가끔 김처사와 동행했던 길을 오늘은 스님과 함께 걷고 있다. 지난여름 잎이 무성하던 떡갈나무와 신갈나무들은 나목이 되었고 울퉁불퉁하고 깊게 파여 있던 길은 낙엽이 덮어 버렸다. 지금은 눈이 낙엽을 덮고 있다. 

비탈지고 거친 길은 이제 길 잃은 수행자의 지난 시간을 묻어주기라도 하듯이 하얗게 펼쳐져 있었다. 하얀 길은 순탄하게 보였지만 눈 아래의 길은 알 수 없게 되었다. 스님은 흰 눈을 꾹 밟고 다시 낙엽을 눌러보고 나서야 다음 발을 옮겼다. 나는 스님의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산중턱에 이르자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눈 덮인 산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에 스님의 볼은 흰 눈이 덮인 밤의 석탑 안에 등이 켜지듯 홍옥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눈 덮인 산속에서 함께 붓다 속으로 들어갔다. 



고타마 싯달타는 왜 집을 떠났을까? 부족함이 없는 궁궐에서 나와 고행의 길을 걸어갔을까? 

붓다(깨달은 자)가 되기 전 고타마는 왕의 아들이었다. 아름다운 궁궐에서 세상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브라만으로 종교지도자이기도 했다. 고타마의 아버지는 아들을 자신과 같은 브라만이요 종교지도자로 키우고 싶었다. 그러나 신의 뜻은 달랐다. 어느 날 고타마는 마을 지도자의 이야기를 우연하게 듣게 된다. 며칠 후 고행자들이 지나가는데 그들은 수행자들이라고 했다. 고타마는 수행자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궁금했다. 아버지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고타마는 세상 밖을 보고 말았다. 고타마가 본 궁궐 밖의 세상은 탄생과 죽음이 있었고 삶은 고난이었다. 늙어가면서 질병이 찾아오고 온갖 시련이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고타마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인간의 고통의 근원과 세속적인 소유와 욕망을 향한 집착이 왜 일어나는지 알고 싶었다. 


집을 나온 고타마는 여러 명의 위대한 스승을 찾아다녔다. 도시의 많은 사람들도 만났다. 스스로 고행의 길을 자초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어떤 시도도 해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탁발을 하면서 밤낮으로 수련하고 단식을 하면서 명상을 하였지만 외부에서 주어지는 깨달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지친 몸으로 혼자가 되어 명상에 잠겼다가 마침내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다.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있었다. 고통의 근원인 욕망과 집착을 버리기 위해서는 자아를 극복해야 하는 일이었다. 자기중심적인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이 고통으로 해방되는 것이었다. 


 헤르만 헤세는 소설 '싯달타'를 통하여 붓다가 되는 길은 욕망과 집착으로 가득한 인간의 삶을 경험한 뒤에 깨달음의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자신이 직접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속적인 삶의 과정을 통하여 자기를 죽이고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하는 자기 혁신을 해야만 붓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범인凡人들이 가지고 있는 에고를 뛰어넘는 길은 고통의 관문을 통과해야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붓다는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처절한 노력을 했지만 늘 에고는 그곳에 있었다. 그래서 번번이 실패했다. 몸과 마음이 무너지고 완전한 좌절과 완전한 절망 속에서 그는 모든 노력을 포기해야만 했다. 마침내 완전한 진공상태, 텅 빈 상태에 이러렀다. 그때 붓다는 에고가 사라짐을 알았다. 꿈과 욕망이 사라지자 '지금 여기'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로소 고타마는 붓다가 되었다. 

붓다가 된 고타마는 수행 방법을 전파했다. 자신의 방법을 따른다면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지만 '나를 추종하지는 말라'라고 설파했다. 

자기 스스로 고통을 이겨내고 수행을 하여 깨달음을 체험하는 길만이 붓다가 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후대 현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붓다를 만나면 붓다를 죽여라" 

추종하지 마라. 가르침만 받아라. 인간 고타마를 숭배하지 마라.

고타마 붓다는 자기를 죽였다. 자기가 죽어야만 자신의 완전한 변형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깨우친 것이다. 자신의 변형은 자신이 죽어야 가능하다. 지금까지 축적된 편견을 불러일으킨 지식과 그로 인해 갖게 된 선입견, 부모와 학교에서 존경받는 분들에게서 듣고 배운 것들을 버리지 않고 변형은 불가능하다. 주변의 환경과 사람들과 책을 통하여 만들어진 자신의 정체성을 죽이지 않고서는 변형은 불가능하다. 과거에 머문다면 변형은 불가능하다. 남을 변화시키려 하지 마라. 남을 변화시키려고 한다면 먼저 자신이 변해야 한다. 자신을 죽이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다석 유영모의 제자 함석헌은 5.16 혁명 후 서슬 퍼런 군부의 통치하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했다. 그의 말 중에서 혁명이 성공하지 못하는 까닭에 대해 일갈하던 이야기가 있다. 혁명이 실패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이유에서다. 


"자기 혁명은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변형시키려 하니 어찌 혁명이 성공할 수 있겠는가?" 


그의 말은 옳다. 잠깐의 혁명은 성공한 것 같지만 혁명의 당사자들은 곧바로 지배자나 권력자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처음의 생각은 모두 잊어버리고 없다. 색깔만 바뀌었다. 깃발만 바뀐 꼴이다. 함석헌은 투사도 아니고 혁명가도 권세를 바라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나라와 민족과 사람들의 정신을 일깨우고자 하였을 뿐이었다. 맑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스승 유영모와 함께 예수를 믿으며 늘 성경을 공부하였지만 노자와 공자, 붓다를 너무나 잘 알고 가슴 깊이 이해한 사람이었다.




고통 없이 성장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고통은 변화이기도 하다. 고통은 행복을 위장한 축복이기도 하다. 


일상에서 사람들은 선과 악으로 나누거나 옳고 그름과 같은 이분법적으로 편을 갈라 버린다. 

원래 일어나는 사건에는 선악이 없다. 이러한 구분과 같은 이분법적 사고는 인간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이 가진 이러한 태도가 선과 악을 구분한다. 여기서 편견이나 선입견이 생긴다. 


하나님도 자신을 의심할 때가 있었다. 그 시험 대상이 욥이었다. 하나님은 욥이 가진 것을 모두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 몸까지 빼앗아 온몸을 종기로 사정없이 시험에 들게 하였다. 

아무 이유 없이, 아무 조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길 수 있는지 시험하였다.

 

무슨 이유나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가? 


기원전 5세기 유대인 사회에서 건강한 종교비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의 첫마디도 '마음을 바꾸라 change your heart.'였다.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가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라고 말했다.  

강물은 쉼 없이 흐른다. 같은 강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삼라만상 모든 것은 변한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는 헤라클레이토스를 수수께끼 같은 말만 하는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다. 그는 변화지 않는 생각과 이성과 관념을 신으로 모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려오는 길에 스님은 어느 위대한 현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현자는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늘 명상에 잠겨있었다. 주변에는 제자들도 명상에 깊이 들어가 있었다. 그때 현자를 시기하던 성자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성자는 한 종파를 이끌고 있었고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성자가 현자를 찾아왔다. 성자의 말에 현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성자는 명상에 잠긴 현자에게 침을 뱉고 욕을 하면서 돌아갔다. 그날 밤 그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렇게 평온하고 아름다운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마음은 이미 온갖 번뇌로 소란스러웠다. 며칠 후 성자는 현자를 찾았다. 그는 엎드려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했다. 

현자는 말했다.

"나는 그날의 일을 잊었다. 나는 이미 그날의 내가 아니다. 그대도 그날의 그대가 아니다. 모든 것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무엇을 용서하란 말인가? 일어나서 너의 길을 가라"



우주에서 변화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별도 탄생과 죽음의 과정에 있다. 가장 가까운 별은 빛의 속도로 4년 이상을 달려야 도달할 수 있는 곳에 존재한다. 별이 사라져도 우리는 4년 후에야 알 수 있다는 얘기다. 지금의 태양은 8분 전의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이고 태양은 서서히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젠가는 꺼진다.


지금의 내 모습은 지금 이 순간만 존재한다. 나의 몸과 마음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인간은 늘 과거의 나를 가지고 편견을 갖고 평가하려고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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