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 LG 트윈스 우승 스토리 15
(2013년에 쓴 글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글 쓴 시점을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1990년 11월 18일 일요일. 겨울로 접어드는 문턱답게 날씨가 차가웠다. 어느 해보다도 뜨겁게 달아올랐던 여름, 그 여름을 추억하고 싶어 잠실을 채운 골수 팬들 앞에 차가운 늦가을 비가 흩뿌렸다. 꿈 같던 1년을 마감하는 하루로는 어울리지 않는 날씨였다.
엘지 트윈스 우승을 축하하는 자체 청백전이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날이었다. 우승을 대구에서 했기에 팬들은 우승의 기분을 만끽할 기회가 없었다. 구단에서는 일요일 오후 1시에 청백전을 열고 누구나 무료 입장할 수 있는 팬 서비스 행사를 마련했고, 연예인 강석이 사회를 보았던 걸로 기억한다. 간단한 홈런 레이스도 열렸는데, 시즌 마지막 경기, 마지막 타석까지 긴박했던 탓에 은퇴 타석에 설 기회가 없었던 백인천 감독도 마지막에 타자로 등장해서 두 개를 넘겼다.
승패에 상관없는 경기였던 데다 많은 어린이 팬이 입장, 주변이 시끌시끌하고 집중도 같은 건 별로 없었다. 떠들썩하고 즐거운 분위기였지만 격정과 환희는 없었다. 역시 마지막 우승을 서울에서 했으면 좋았을 뻔했다.
일요일 나들이를 나온 가족들이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내 옆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LG 우승 소식에 기뻐했을까? 한국시리즈 텔레비전 중계를 보았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LG가 우승했다는 소식 정도는 들었을 것이다. 내 생각을 하기는 했을까?
야구 경기에 이기고, 응원하는 팀이 페넌트레이스에 우승하고 한국시리즈를 제패한다 해도 사실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LG가 우승한다고 안 되던 취직이 되는 것도 아니고 떠나간 사람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그깟 공놀이. 야구 때문에 나의 삶이 달라지지 않는다. 한때의 환호가 지나가고 나면 남는 것은 겨울이 다가오는 하늘의 싸늘한 냄새 뿐이다.
그리고 그 겨울이 지나면 모든 것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우승팀 LG 트윈스는 유지홍 양승관 박성훈 예병준 최일언 김신부 등을 방출했고, 91년 신인 1차지명에서 송구홍을 지명했으며, 고졸 신인으로 이종열 이우수 등을 영입했다. 당시 대부분의 선수가 대졸이었기에 고졸은 드래프트가 아니라 팀별로 자율적으로 계약했었다.
그리고 기대와 함께 맞은 91년, LG는 시즌 53승 1무 72패로 전년도 챔피언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며 리그에 처음으로 참가한 쌍방울과 공동 6위에 랭크되는 수모를 겪는다. 최하위 OB 베어스에 겨우 0.5게임 차 앞선 성적이었다. 시즌 중반에 이미 백인천 감독은 사퇴 의사를 표명했고, 구단은 시즌을 아예 포기하고 일찌감치 주력선수들을 플로리다 교육리그에 보냈다.
성적 추락과 더불어 나도 보통의 대학생 생활로 돌아갔다. 대학생 시위에도 꽤 나갔고, 90년 가을 잠깐 맛보았던 산의 매력에 빠져들어 산악회 활동을 했으며, 전 해만큼은 아니지만 야구장에도 자주 갔고, 불과 일 년 전 우승 시즌과 대비되는 LG 트윈스의 지리멸렬한 경기력을 조금은 초연하고 관조적인 자세로 지켜보았다.
따지고 보면 89년에도 우리는 6위를 했었다. 하지만 91년의 6위는 89년의 6위와는 달랐다.
우승 시즌과 대비되어 더 지켜보기 힘든 측면도 있었지만, 그래도 만년 하위팀의 6위와 우승을 해본 팀의 6위는 천지차이였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승리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80년대 청룡 팬으로 애써 묻어두던 열패감 없이도 바라볼 수 있었고, 그래서 더 쉽게 견딜 수 있었다.
승리를 해 본 자는 더 낙관적인 꿈을 꿀 수 있다. 승리를 해 본 자는 지금 패배하더라도 패배의식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강렬한 사랑의 기억이 현실을 견디는 힘이 될 수 있듯 말이다.
한국 시리즈를 앞두고 떠나간 여자친구는, 그 나이의 청춘 남녀들이 흔히 그러듯 그 겨울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한국 시리즈를 TV로 보았고 우승 뉴스에 내 생각을 조금 했다고 했다. 그 말로 나는 큰 위안을 받았다. 적어도 그 사이 OB 좋아하는 어떤 놈을 만난 게 아님도 다행스러웠다. 다만 이왕 잠시 헤어질 거였으면 한국시리즈 끝나고 헤어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감히 입밖으로 내어 말하진 않았다.
야구란 그저 한 때 지나가는 환희일지 모른다. 이별이란 한 때 지나가는 슬픔일지 모른다. 하지만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투수가 던지는 공 하나하나가 다 기록으로 남는 것처럼, 모든 기억은 어딘가에 각인되고 우리의 어딘가에 남아 지금의 우리를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승리의 경험을 나누어 본 우리는, 지금도 꿈꾸고 이야기하고 기다린다. 겨우 4강에 아니라 LG 트윈스의 우승을, 그리고 더 멋진 사랑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