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의 9월

1990 LG 트윈스 우승 스토리 11

by 에덴의아래

(2013년에 쓴 글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11) 진격의 9월


일년 중 9월은 그다지 큰 이벤트가 없는 달이다. 대개 추석은 10월달에 찾아오고, 딱히 공휴일도 없다. 단풍은 10월에 절정이므로 관광 시즌도 아니다. 음식? 전어가 9월이 제철이라고 하지만 그거야 전어 양식이 활발해진 이후의 일이고 (그나마도 이제 유행이 죽었다) 당시엔 집나간 며느리 운운하는 속담이 있었는지조차 몰랐다.


그맘때면 라디오에서 자주 나오는 Earth, Wind and Fire의 <September>라는 노래 빼고는, 그리고 내 생일이 있다는 것과 날씨가 시원하다는 것 빼고는 딱히 특징없이 그냥 평안하게 흘러가는 달.... 프로야구의 9월도 대개는 맥이 빠지는 시기다. 순위는 대략 결정되고, 특히 9월 중하순이 되면 우천으로 연기되었던 잔여경기가 띄엄띄엄 있어서 경기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지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1990년의 프로야구는 9월이 가장 뜨거웠다. 4강 플레이오프 제도가 시행된 두 번째 해, 한국시리즈 직행을 따기 위한 각팀의 스퍼트로 말도 안 되는 순위변동이 난무했다.



시즌 56승 44패, 딱 20게임이 남아 있는 LG는 선두 빙그레를 5 게임차 뒤쫓는 3위이고, 4위 해태엔 3게임차 앞서 있었다. LG가 1위를 한다는 건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열혈 LG 팬조차도 상상하기 힘들었다. 남은 기간 빙그레가 5할 승률을 한다고 가정할 때, LG가 15승 5패를 하면 동률, 16승 4패를 하면 역전이 가능하긴 했지만 과연 최강팀 빙그레가 겨우 반타작 밖에 못할 것인가....


다르게 표현하면, 빙그레는 24게임 남은 상황에 매직 넘버가 17이었다. 알다시피 매직넘버란 자기 팀이 이겨도 줄어들지만 경쟁 팀이 질 때마다 하나씩 줄어든다. 빙그레의 페넌트레이스 우승은 명약관화했다.


변수가 하나 있었다. 남은 일정이 꽤 유리했다. 20게임 중 탈락이 거의 확정된 태평양과 무려 9게임, 탈락이 완전히 확정된 OB와 4게임, 역시 탈락이 확정된 롯데와 1게임이 예정되어 있었다. 빙그레와의 맞대결 잠실 3연전도 있으니 기적이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었다.


9월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9월이 끝났을 때, 정말로 기적이 일어나 있었다.




9월의 첫 경기는 인천 태평양 전이었다.


대구 부산 광주까지는 몰라도 서울에서 인천 정도는 지하철을 타고 갈 만하다. 지금 문학구장이야 한국 최고의 야구장을 자랑하지만, 그 전에 쓰던 인천 공설운동장 야구장은, 음...... 적당한 표현을 찾기가 힘들다.


인천 공설운동장 야구장(도원야구장)은 내야석으로 입장하면 중간 통로가 나오고, 그 통로를 기준으로 아래 위쪽으로 벤치식 좌석이 있었는데 아래쪽이 8줄, 위쪽이 6줄이었다. 딱 열 네 줄이면 내야석 꼭대기에서 그라운드까지 내려갈 수 있었다. 굳이 장점을 찾자면 오르내릴 때 다리가 아프지 않아서 좋았고 선수를 가까이 볼 수 있었다.


내야석 하단에선 보온 물통을 놓고 컵라면을 팔았는데, 화장실 냄새와 라면국물 냄새가 섞여 역하긴 했지만 잠실 구장과 달리 관중석에서 컵라면을 먹을 수 있다는 점은 좋았다. 1960년대에 증축(!)된 곳이라 하는데, 여기만 가면 시간여행자가 된 듯한 묘한 쾌감도 없지 않았다. 다만 잠실구장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시야가 너무 낮아 날아가는 타구가 한눈에 짐작되지 않는다는 게 불편했다.


첫 완공 당시의 모습. 야구장인지 그 옆인지가 과거 화장터였다들 했다.


이후 조명탑과 중앙석 지붕이 설치되었지만 수용 규모는 변동이 없었다.


인천 야구장은 좀 허술했을지 몰라도, 태평양은 만만한 팀이 아니었다. 김경기 김동기 이광근의 클린업은 어느 팀 못지 않았고, 제한된 전력을 짜내는 데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김성근 감독이 이끌었다. 왕년의 해태 도루왕 김일권이 당시 태평양 소속으로 도루 1위를 달리고 있기도 했다. 시즌 상대 전적도 5승 6패로 LG가 뒤져 있었다.

시리즈 첫날 경기는 김용수 양상문의 선발 맞대결이었다. 두 투수 모두 9회까지 완투했을 때 스코어는 1 대 1. LG는 거의 매회 출루했지만 득점이 어려웠고 9회초에도 안타를 세 개나 쳤지만 도루 실패가 겹치며 득점에 실패했다. 태평양도 9회말 2시 1,3루의 절호의 찬스가 있었지만 기습번트가 실패하며 경기는 연장으로 돌입했다.


10회초. 투아웃 주자없는 상황에서 노찬엽이 안타로 출루했다. 김동수의 볼넷로 만들어진 2사 1,2루에서 노찬엽이 기습적인 3루 도루를 성공시켰다. 김재박의 볼넷으로 이어지는 2사 만루. 타석엔 9회 대수비로 들어왔던 이병훈. 투수는 무려 160개가 넘는 공을 던지며 아직도 완투중인 양상문.


이병훈은 힘이 떨어진 양상문을 상대로 중전 적시타를 작렬시켰다. 2타점이었다. 10회말엔 정삼흠이 올라와 세 타자를 막고 세이브를 챙겼다.


거의 석달 만에 처음 만난 태평양이었고, 앞으로 여덟 게임이나 남아있음을 생각하면 이 일전은 중요했다.


다음날 태평양과의 더블헤더도 거의 스윕 직전까지 갔는데 2차전 연장 12회말에 끝내기를 맞고 패배했다. 일단 2승 1패로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LG의 잔여 경기는 17경기. 빙그레의 1위는 굳어져가고 있었고, 누가 2위를 해서 준플레이오프를 건너뛰느냐를 둔 삼성과 LG의 싸움이 치열했다.




이 해 갑자기 등장한 풍속도 하나. 경기 막판이면 꼭 휴지가 등장했다. 화장실용 두루마리 휴지를 관중석 상단에서 리본처럼 풀면서 던지는 것이다. 처음엔 신이 난 누군가가 야구장 화장실에서 가져와서 시작하지 않았을까 시작하는데, 시즌 후반으로 가면서 꽤 많은 두루마리 화장지가 – 그러니까 한 경기에 삼사십 개 정도 - 동원되었다.


관중석 상단 쪽에서 일어난 일이라 화장지를 배포(?)하는 모습을 보거나 직접 던져본 적은 없다. 하지만 드문드문이 아니라 약속한 것처럼 동시다발적으로 1루측 관중석 전역에서, 그것도 매 경기 수십개의 화장지가 촤악 날아간 걸 생각해보면 누군가 '배후세력'이 있는 듯했다. 아마 구단 측이나 응원 외주 회사가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 학교 화장실 같은 데에 걸려있던, 갱지를 연상시키는 누런 화장지가 아니라 하얗고 깨끗한 나름 품질 좋은 화장지였다.


서양권에서는 두루마리 화장지란 화장실에서만 볼 수 있는 존재로, 거실이나 식탁에 두루마리 화장지 놓는 것은 금물이라 한다. 하지만 우리야 그런 거부감은 없으니 ‘지저분하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중에 보니 서양 사람들도 신나는 일이 있으면 다같이 화장실 휴지를 던지면서 노는 경우가 있기도 했다. 어쨌거나 화장지가 여기저기서 조명을 받고 날아가면 예쁘긴 한데 아깝기도 했다.


폭죽도 매경기 등장했던 것 같다. 큰 소리로 뻥 터지는 폭죽이 아니라 봉화처럼 손에 들고 있으면 쉬쉬식 하며 불꽃이 분수처럼 나오는 폭죽 말이다. 그건 응원단장 및 그 스태프들이 준비했고, 한 번 터뜨리면 작은 구름이 야구장 안을 떠돌다 하늘로 흩어져갔다.


선수 사인볼도 완전 남발이었다. 경기가 끝난 후 수십개의 사인볼이 관중석으로 마구 던져지는 건 매일 있는 일이었고,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날엔 (그런 이벤트는 자주 있었는데) ‘사인볼 300개’가 관중석에 한바탕 투하되고 나서 경기가 시작되곤 했다. 선수단 전체가 나와서 공 300개 정도를 던져주는 모습을 보면 생각한 것보다 300개가 꽤 많은 갯수임을 알게 된다. 모르긴 해도 LG 선수들은 공에 사인하느라 꽤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가장 신났던 건 이기는 경기 막판에 다 함께 입을 모아 ‘잘 가세요 잘 가세요’ 합창을 할 때였다. 원곡의 노래 가사는 ‘잘 있어요 잘 있어요 그 한마디였었네 잘 가세요 잘 가세요 인사만 했었네’이지만 야구장에서만큼은 ‘잘 있어요’가 아닌 ‘잘 가세요’로 바뀌어 불리었다. 상대방을 약올리는 응원이라 응원단장이 주도한 적은 없는데 그래도 누군가 시작하면 경기장 전체에 다 퍼져나갔다.


같이 많이 불린 노래는 <서울의 찬가>였다. 종이 울리고 꽃이 피고 새들이 노래하고 사람들이 웃는다는 노래가사와 실제의 서울은 많이 다르긴 했지만, 그래도 서울을 상징하는 노래가 그다지 많지 않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령 해태팬들은 <남행열차> 혹은 <목포의 눈물>을 불렀는데, <목포의 눈물> 같은 슬픈 노래가 응원가가 되었다는 것이 80년 광주, 그리고 정치적 소외감의 한 표현이었다는 분석도 있었다.


요즘이야 구단별 응원가도 있고 선수별 응원가도 있지만 90년에야 무조건 트로트였다. 나는 많은 뽕짝 노래를 야구장에서 배웠던 것 같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로 넘어오는 그 시기는 굉장히 많은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이 등장했던 때다. 조동익 이병우의 ‘어떤 날’ 1,2집이 80년대 말에 나와서 우리나라에 퓨전 재즈가 처음 등장했고, 김현식, 봄 여름 가을 겨울, 권인하, 하덕규, 신형원 등등 대중매체의 메인스트림과는 별개로 흘러가는 큰 흐름이 존재했다. 물론 80년대 말 시나위나 백두산에서 이어지는 록음악도, 노찾사 같은 운동가요 기반의 가수도 있었다. 그런 등등의 장르를 쫓아다니던 나는 야구장이 아니면 트로트를 배울 데가 별로 없었다.


늘 야구장에서 신나게 부르던 <홍도야 울지마라> 노래만 해도 그렇다.


사랑을 팔고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울지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누군가를 응원하는 노래로는 전혀 합당하지 않은 이 노래가 왜 그렇게 신이 났는지는 잘 모른다. 홍도오오야아아 우지마아라아.... 그러면서 결국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순정을 간직한 여자로서 아내의 길을 지키라니, 그라운드 위의 선수들에게 하는 얘기도 아니고 자기 여동생한테 하는 얘기도 아니고..... 어쨌거나 LG 팬들의 최고 인기곡 중의 하나가 이 노래였다.


경기 막판에 역전당해서 실의에 빠져 있는데 3루쪽에서 잘가세요 잘가세요~ 하는 노래 소리가 들려오면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야구장에만 가면 사람이 좀 유치해지는지도 모른다. 아니 유치해지는 게 분명하다. ‘LG 바보’ 같은 유치한 합창을 들어도 이상하게 야구장에서는 열이 받았으니까.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서울 라이벌들끼리 ‘얼레리 꼴레리’ 운율에 맞추어 서로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한쪽에서 LG 바보~ LG 바보~ 하면 우리는 입을 모아 OB 꼴찌~ OB 꼴찌~를 합창했다. 생각해보라. 수천명에서 일이만명 되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삼사십대 아저씨들이 주류를 이루는 관중들이, 동심으로 돌아가 (하지만 목소리는 굵고 우렁차게) LG 바보~ OB 꼴찌~ 하며 서로 목청껏 합창하는 장면을. 아마 십년 쯤 지나면 미래의 야구팬들은 이런 광경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까.


우리가 OB 꼴찌~ OB 꼴찌~를 외치기 시작하면 얼른 응원단장이 올라와서 허공에 손을 휘휘 저으며 말리곤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OB야 진짜로 최하위였으니 ‘OB꼴찌’를 외쳤고 이것은 1) OB를 상대로만 2) 특히 OB가 꼴찌를 할 때만 유효한 반면, 이에 대응하는 ‘LG 바보’는 처음에야 딱히 받아칠 말이 없어서 만들어졌겠지만 오히려 어느 상황에나 일반적인 적용이 가능했다. 일이년 지나자 다른 팀 팬들도 이걸 배워서 ‘LG 바보’를 합창했는데 우리는 딱히 맞받아칠 말이 없어서 묵묵히 듣고만 했어야 했다.




이어진 주는 OB, 그리고 빙그레와의 잠실 6연전이었다. 이 때야말로 ‘OB 꼴찌~’를 많이 합창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LG가 3연승을 했으니 말이다.


OB와는 상대전적에서 9승 7패로 앞서고 있었지만 늘 경기가 박빙이었다. OB는 다른 팀과 만나면 죽을 쑤면서도 (그해 더블헤더 두 경기를 모두 다 진 게 무려 16번인가 되었다. 그러니까 그 열여섯 날에 32패를 기록한 셈이다) 유독 LG만 만나면 물고 늘어졌다.


첫 경기, 상대는 일약 에이스로 떠오른 프로 2년차 구동우. 그 즈음 OB는 구동우 나오는 날은 이겼고 구동우가 나오지 않는 날은 지는 것 같은 패턴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LG는 선발 이용철의 눈부신 7이닝 투구에 힘입어 2대 0으로 승리했다.


두번째 경기는 11회 연장까지 간 끝에 4대 3으로 간신히 승리했다. 한 점 앞선 11회말 수비 1사 1루, 누가 봐도 좌중간으로 빠지는 신경식의 타구를 박흥식이 잡아낸 것이 결정적이었다. 세번째 경기 역시 2대 2로 팽팽하게 이어지던 8회초 박흥식의 적시타로 4대 2로 승리했다.


3연전 전승. 드디어 순위는 삼성을 제치고 2위로 올라갔다.


예나 지금이나 LG는 좌타자들이 강한 팀이어서 좌완 투수에 상대적으로 약했다. 하지만 9월에 이르자 이런 걱정도 사라졌다. 김선진과 이병훈 두 명의 우타자 신인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선진은 그다지 높지 않은 지명 순서로 입단, 백업 1루수로 있다 시즌 막판부터 과감하게 중용되기 시작했다. 상대 좌완 투수가 나오면 1루수 김상훈 대신 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3번타자 1루수에 무명의 김선진이 치고 나가면, 4번 노찬엽에 이어 5번 이병훈이 타점을 올리는 장면이 3연전 기간 중 몇 번 반복되었다.


김선진이 진짜 스타로 등극한 건 이어진 빙그레와의 3연전 중 2차전이었다. 1대 1로 맞선 3회말 공격 2사 2,3루. 빙그레 투수 한용덕은 이광은을 고의사구로 내보내고 김선진을 선택했다. 이날 선발 1루수 6번으로 기용된 김선진은 2사 만루에서 깨끗한 중전안타로 두 점을 불러들였다. 3대 1로 앞선 5회말 2사 2루. 한용덕은 또다시 이광은을 걸리고 김선진과 승부했다. 김선진은 여기서 2타점 2루타를 터뜨려, 이날만 4타점을 올리고 스포츠신문 1면을 장식했다.



김선진은 광주일고 시절만 해도 김재박 유중일을 능가한다는 대형 유격수 감이라고 각광받던 선수였다. 키도 크고 발도 빠르고 야구 센스도 있고 성실 근면하며 얼굴마저 잘 생긴 – 그러니까 굳이 표현하자면 옛날 영화배우 스타일로 잘 생긴 – 예비스타였다.


그러나 연세대 진학 후 공을 10m도 던지지 못하는 치명적인 어깨 부상을 당하면서 연고팀 해태의 지명도 받지 못하게 되었고, 일년을 쉬다가 어찌하여 LG에 입단하게 되었다. 포지션은 1루수였다. 그리고 마침내 시즌 후반 김상훈의 컨디션이 좋지 않은 틈을 타서 기회를 잡게 된 것이었다.


김선진은 가장 교과서적인 타격을 한다고 인정받는 선수였다. 배트 스피드가 빠르고 특히 백인천 감독의 신임이 두터웠다. 타자를 보는 눈에 있어서만큼은 일가견이 있던 백 감독은 여러 번 ‘김선진이 일을 낼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했고, 도루와 빠른 주루 플레이를 어마어마하게 선호하는 백 감독에게 김선진은 좋은 대주자 감이자, 유격수 출신으로 경기 후반 좋은 대수비 요원이었다.


그가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된 계기는 94년 태평양과의 한국시리즈 연장 11회 끝내기 홈런이지만 90년 LG 팬들에게는 김동수 이병훈과 더불어 ‘신인 3인방’으로 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주역이었다. 김선진은 한 주일동안 17타수 7안타 .411 4타점 4득점의 성적을 올렸다.

그렇게 빙그레와의 3연전도 2승 1패. OB전 스윕까지 일주일동안 5승 1패의 기록이었다.


한편, 4강이 실질적으로 확정되고 4강 안에서의 순위 싸움이 본격화되자 백인천 감독은 굉장히 많은 작전을 걸었다. 번트를 좋아하지 않던 백 감독은 주자만 나갔다 하면 백발백중 히트앤드런 혹은 단독도루를 시켰다. OB와의 3연전 스코어가 늘 팽팽했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연장전 끝에 이긴 경기에서는 무려 네 번의 도루자, 견제사를 당했는데 전부 히트앤드런 실패 때문이었다. 주루사가 아니었다면 연장에 들어가기 전에 이겼을 것이고, 그와 비슷한 경기가 많았다.


반면에 작전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져 유리해지는 경우도 많았으니 작전이 문제였다고 하기는 어렵다. 어쨌거나 히트앤드런 작전 횟수를 누가 세어본다면 분명히 90년 LG 트윈스가 세계 신기록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투수 교체도 시즌 막판으로 가면서 과감해졌다. OB와의 두번째 경기에서는 김태원이 선발이었지만 2회까지 3실점을 하자 곧바로 교체했고, 세번째 경기에서는 문병권이 선발이었지만 4회 2점을 주자 바꿔 버렸다. 김태원은 빙그레와의 3연전 중 또 선발로 나섰지만 이번에도 2실점 후 2.1이닝 만에 강판됐다. 경기 초반 두세점 실점이면 다른 선발급 투수로 교체하는 일이 거의 매일 일어났고, 특히 선동열에 이어 다승 2위를 달리고 있던 김태원도 두 번이나 그렇게 강판되었다.


마지막 총력전 체제였던 셈이다. 그 다음주 12일부터 이어진 태평양과의 잠실 3연전도 같은 패턴의 반복이었다. 공격에서 신진급의 활약, 그리고 수비에서의 굉장히 이른 투수교체.


9월 12일 잠실 태평양 전. 선발 문병권이 2실점하자 2.1이닝만에 김기범으로 바꿨고, 김기범이 5회 두 점을 허용해 4 대 4 동점이 되자 정삼흠을 올렸다. 이날은 2대 1로 뒤지던 3회말 이병훈의 싹쓸이 3타점 역전 2루타, 다시 동점이던 5회 결승타점이 된 김선진의 외야 희생 플라이, 노찬엽의 4타수 3안타 3득점 등으로 7대 4로 승리했다.


9월 13일 대 태평양 더블헤더 1차전. 선발 최일언이 3회 1실점하자 곧바로 김태원이 올라왔다. 그리고 나머지 이닝을 김태원이 무실점으로 막는 동안 김선진의 1타점 적시타로 동점, 이병훈의 내야땅볼로 역전을 하며 3대 1로 승리했다.


더블헤더 2차전은 김용수가 선발이었지만 공이 좋지 않자 4회부터 김기범으로 바뀌었고, 전날 5이닝을 던진 정삼흠이 5회부터 또 올라왔다. 이날 태평양은 실책으로 자멸했다. 1대 2로 LG가 패배 위기에 몰린 9회말 1사 2루, 견제 실책이 나오며 주자가 3루까지 나갔고 타석의 노찬엽이 외야 희생플라이를 치며 경기는 연장전으로 들어갔다. 서로 몇 번의 찬스를 무산시키는 아슬아슬한 경기였지만, 연장 14회 말 태평양 돌핀스 유격수이자 82년 프로 원년 MBC 청룡의 주전 유격수였던 정영기의 끝내기 실책으로 LG가 3대 2 승리를 거두었다. 5회 올라온 정삼흠은 14회까지 무려 9이닝을 던졌다. 이틀 사이 14이닝을 던진 셈이었다.


어쨌거나 또다시 3연전 싹쓸이. 이제 4일간 휴식을 가지며 빙그레-해태의 더블헤더 포함 광주 4연전을 느긋이 지켜보기만 하면 되었다.


9월 시작하면서 LG는 선두 빙그레에 5게임 뒤진 3위였고 20게임을 남겨둔 상황이었다. 20게임에 5게임 차를 뒤집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이었다. 하지만 두 주일 동안 총력전 체제로 투수를 쏟아붓고, 타격에선 노찬엽 김선진 이병훈 등 신진급이 맹활약하며 무려 10승 2패를 기록,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선두다툼에 뛰어들었다. 이제 빙그레와 단 한 게임 차.



남은 경기는 8 경기. 대구 삼성 3경기, 인천 태평양 3경기, 부산 롯데 1경기, 그리고 시즌 마지막 OB와의 잠실 홈경기였다. 전부 원정이라는 점이 걸리긴 했지만 삼성을 제외하면 다 4강 탈락 팀이라는 점은 좋았다.


빙그레는 페이스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LG에게 1승 2패를 당한 후 삼성과도 1승 2패로 부진했다. 남은 경기는 해태와 4, 삼성과 3, 태평양과 5경기였는데, 해태와 삼성이 분발해준다면 우리의 시즌 1위도.......


그리고 노찬엽도 8게임을 남겨놓고 드디어 규정타석에 진입했다. 타격 2위. 이강돈과 격차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 노찬엽은 타수가 적었기 때문에 몇 게임만 잘 하면 이강돈보다 빨리 타율을 올릴 수 있었다. 팀도 2위, 노찬엽도 2위였지만 둘 다 고지가 저 앞에 보였다.


혼돈의 마지막 2주일이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50년만에 왔다는 기록적인 가을장마로 한강 유람선이 침몰하고 서울에서 물난리가 났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진격의 9월을 경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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