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매치 LG vs 해태

1990 LG 트윈스 우승 스토리 10

by 에덴의아래

(2013년에 쓴 글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10) 빅매치 LG vs 해태


누군가를 만나고 사귀다보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햇살이 빛나던 그 오후 용기를 내어 고백했더라면 무언가 지금과 조금은 달라져 있을텐데 하는 달콤한 아쉬움도, 그 저녁 내 앞에 눈물을 보이던 그녀에게 조금만 다르게 이야기했더라면 하는 묵직한 후회도 있다. 가로등 비추던 바닷가에서 내게 보내오던 환한 미소처럼, 열중해서 책 속에 파묻혀있던 그 옆모습처럼, 오랜 시간이 흘러도 영원히 기억 속에서 환히 빛나는 장면들도 있다.


야구도 한 시즌을 몰입해서 보다 보면 그렇게 오래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다. 물론 백 게임도 훨씬 넘는 시즌이 한두 장면, 한두 게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8월말 해태와의 시즌 마지막 시리즈가 열린 사흘이 내겐 '90 시즌을 대표하는 장면으로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 있다.


8월 말로 접어들며 갑자기 시원해진 날씨 때문일 수도 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폭염이 갑자기 무뎌져 밤이 되면 숨을 쉬기가 한결 편했다. 해수욕장에 구름 인파가 몰리던 것이 불과 이삼주 전인데 이젠 바닷물에 들어가기가 춥다고들 했다. 상쾌한 밤공기라는 것이 이런 거였지, 내 몸에 각인된 그 느낌이 되살아났고 새삼스레 기분이 좋았다.


그 여름, 여자친구와 첫 여행을 다녀왔던 그 싱숭생숨함의 여운도 아직 남아 있었다.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여자친구는 그 후 잠시 외국에 나갔고, 외국 소인이 찍힌, 멀리서 보내온 편지에 한동안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다시 돌아올 것이고 학교도 다시 개학할 것이었다.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많은 곳을 다니고 싶었고, 많은 책을 읽고 싶었고, 그래서 나도 많은 글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강렬한 기억은 건드리면 폭발할 것 같던 잠실의 그 긴장감이다. 선수들끼리도 그런 긴장감이 있었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LG와 해태 양팀 팬들은 서로를 미워했다. 아니 적어도 LG 팬들은 해태를 미워했다.


LG의 순위가 몇 위인지, 해태의 순위가 몇 위인지는 상관없었다. 해태에게 진 날이면 기분이 특히 더 나빴고, 해태에게 이긴 날이면 옆에 있는 낯모르는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야구장을 빠져나왔다.


잠실의 해태 팬들은 매너도 별로여서 퇴장하는 1루측 통로에서 머리 위로 쓰레기통이 날아오기도 했다. 그러면 집단 난투극이라도 벌어질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어디선가 사소한 충돌이라도 벌어지면 함께 욕을 퍼부으며 동지애를 다졌다. 지금보다 평균 관중이 현저히 적은 때였지만 해태와의 경기만 열리면 양팀 팬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리고 경기 내용도 치열했다.


80년대 MBC 청룡 시절부터 해태와의 경기는 빅매치라 불렸는데 딱히 양 팀간 무슨 이유나 역사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단순히 팬이 가장 많은 두 팀이 서울에서 맞붙다보니 분위기도 뜨거웠을 것이다. 두 팀간의 그런 라이벌쉽은 90년대 들어서며 한 단계 상승된다. 해태야 86년부터 89년까지 4년 연속 우승을 한 (그리고 90년 한 해 건너뛰고 91년에도 우승한) 당시 자타공인 최고의 팀이었고 LG 또한 전력이 상승하며 전성기를 구가, 서로가 껄끄러운 상대가 된 탓이었다.


'90 시즌만 해도 마지막 3연전을 남겨두고 LG가 9승 8패로 앞서 있었고(팀간 20경기), 그중 1점차 승부가 무려 여섯 번, 2점차가 세 번이었다. 선동열에게 패배를 안겨준 경기도 이미 두 번이나 되고 말이다.


해태와의 시즌 마지막 3연전은 8월 24일 금요일부터 주말 시리즈로 잠실에서 열렸다.


앞 글에도 썼듯이 순위는 빙그레, 삼성, LG, 해태의 순이었는데 삼성의 하락세가 두드러졌다. 불과 한두 주일 전만해도 빙그레와 선두 각축을 벌이던 삼성이었지만 최근 3승 7패로 이제 LG와 불과 한 게임 차밖에 나지 않았다. 반면에 부산에서 3승 1패를 하고 올라온 LG는 분위기가 좋았고, 특히 노찬엽의 타격이 눈부셨다. 4연전에 20타수 12안타를 기록하며 시즌타율 .349, 규정타석만 곧 채우면 일약 타격 2위로 올라서는 성적이었다. 이강돈과의 치열한 수위타자 싸움이 서서히 무르익고 있었다.


LG에 2.5게임 뒤진 해태는 잠실에서 3연전을 마친 후 빙그레와의 3연전이 예정되어 있었다. 힘든 일정이긴 해도 결과에 따라서 단숨에 상위권 도약도 가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4일 휴식 직후였다. 90년에는 팀 숫자가 7개로 홀수였기에 한 팀씩 돌아가며 휴식이 주어졌고 월요일을 끼면 4일 휴식이 되었다. 해태는 선수층이 얇아서 그렇지 충분한 휴식만 취한다면 무서운 팀이었고, 특히 매년 시즌 막판 상승세가 무서운 팀이었다. 기세를 꺾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잠실 야구장 주변은 많은 손님을 맞아 분주했다. 마치 정전기를 가득 머금은 구름처럼 무언가 팽팽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예매가 없던 때였던지라 중앙 매표소부터 어마어마하게 긴 줄이 형성되었고, 표를 사고 입장하니 이미 많은 자리가 차 있었다. 나와 친구는 포수 뒤쪽, 조금 1루에 치우친 좌석을 잡았다.


그런데 전광판에 떠 있는 LG의 라인업이 조금 이상했다.



전날 김동재가 2루 도루를 하다 부상을 입어 제외된 것이야 그렇다 치고, 김상훈 윤덕규 박흥식 김영직 등 LG가 자랑하는 좌타자들이 죄다 빠지고 1번부터 9번까지 전원 우타자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LG 백인천 감독은 상대 선발이 좌완 신동수일 것이라 확신했다.


그런데 해태 선발은 선동열이었다. 김응룡 감독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은 셈이자, 생각지 못한 의외의 강수였다.


선동열은 ‘90 시즌 LG를 상대로 2승 2패로 부진한 성적을 기록 중이었다. 전부 구원 등판이었는데 유일하게 선발 등판한 5월 14일 잠실경기에서 그답지 않게 7이닝 동안 3점을 실점하며 패전투수 위기까지 몰리기도 했다(결국 연장에서 해태가 승리했었다). 그 외의 모든 경기에서는 접전 상황에 구원으로 등판했는데, 3연전 첫 경기에 선동열이 선발로 나온다는 건 나머지 두 경기에 선동열 등판을 포기한다는, 그러니까 무조건 이 게임은 이기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해 LG를 상대로는 조금 부진했는지 몰라도 선동열은 역시 선동열이었다. 이 경기 전까지 16승 5패 3세이브를 기록 중이었는데 놀랍게도 일년 내내 허용한 홈런이 단 하나도 없었다. 전 해인 89년 5월에 빙그레 유승안에게 맞은 이후 한 시즌 반 동안 무피홈런 기록 행진중이었고, 90년 9월 25일에 깨진 이 기록은 현재까지도 최장 이닝, 최장 경기 무피홈런 역대 1위에 해당한다. (결국 선동열은 90년에 다승 승률 방어율 탈삼진 1위를 차지했고, 2년 연속 20승을 기록했으며, 프로야구 MVP를 수상했고, 홈런은 시즌 막판에 딱 한 개 맞았다. 인간이 아니다....)


‘오더 싸움’에 진 백인천 감독은 할 수 없이 2회에 대거 선수교체를 단행했다. 윤덕규 박흥식 김상훈 세 명의 좌타자가 들어갔고, 신언호 이병훈 양승관 세 명의 우타 외야수들이 타석에 한 번 서 보지도 못한 채 교체되었다. 그러다보니 타순의 앞뒤 연결도 이상해져 버렸다.


그래도 경기는 치열했다. 2회초 해태 공격 2사 2루가 되자 경기 초반임에도 박철우를 고의사구로 걸린 후 장채근과 승부, 세 번째 아웃을 잡아냈다. 단 한 점도 줄 수 없다는 일종의 기싸움이 벌어졌다.


개인적 취향이지만 나는 호수비가 속출하는 1-0 피말리는 투수전을 가장 좋아한다. 그리고 이유는 몰라도 해태와 LG의 경기는 그런 쫄깃한 경기가 자주 펼쳐졌다. 그날 역시 또 한번의 그런 경기였다. 6회말이 끝났을 때 스코어는 0대 0. 그 때까지 해태가 친 안타는 2회초 김종모가 친 좌익수 앞 단타가 유일했다. 이미 10승을 달성하고 11승째를 노리는 문병권은 느릿느릿한 변화구와 가끔씩 꽂히는 빠른 속구로 해태 타선을 요리해 나갔다.


선동열은 한술 더 떴다. 1회 선두타자 김재박이 실책으로 출루한 것을 제외하면 6회가 끝날 때까지 단 한명도 루상에 내보내지 않았다. 노히트노런 행진이었고, 실책이 아니었다면 퍼펙트게임을 하고 있을 뻔했다. 3루수 한대화의 선상 빠지는 공 다이빙 캐치, 우익수 김종모의 2루타성 타구 캐치, 투수 스치는 강습 타구를 선동열이 맨손으로 막은 것 등등 호수비가 이어졌다. 경기는 0대 0이었지만 아까운 타구가 많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접전이었다. 타구에 엄지손가락을 다친 선동열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계속 투구를 이어갔다.


7회초 해태 공격. 선두타자 한대화의 안타, 그리고 희생번트에 이은 이순철의 좌익선상 2루타로 드디어 한 점이 났다. 이어지는 1사 2루 위기. 문병권은 2회와 똑같이 박철우를 고의사구로 내보낸 후 장채근과 승부했다. 하지만 장채근은 두 번 당하지 않았다. 중전 안타로 두 번째 점수가 나고 말았다. 순식간에 0대 2가 되었다.


3루측 해태 팬들의 기세가 등등했다. 이러다 노히트노런을 당할 것만 같은 불길한 기분에 속이 타는 것은 나 뿐만은 아니었다. 7회말 1사. 이광은 타석에서 백인천 감독은 대타 김영직을 냈다. 김영직은 작정한 듯 초구에 투수와 1루 사이로 굴러가는 푸시번트를 대고 1루로 전력질주했다. 노히트 행진 중인 선동열은 몸을 날려 다이빙을 했다. 하지만 공에 글러브가 닿질 않았고 선동열은 안타까움에 한동안 땅바닥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않았다. 내야안타.


드디어 노히트 행진이 깨졌고, 김영직은 평소 그답지 않게 2사후 3루 도루까지 하며 선동열을 흔들려 했지만 적시타는 나오지 않았다. 이닝이 종료되고 맞은 8회초 해태는 또다시 1사 2루를 만들었다. 후속타자는 한대화. LG는 또 고의4구를 내며 무실점으로 막았다. 벌써 이날 경기 세번째 고의4구였다.


8회말 LG 공격. 안타를 치고 나간 박흥식의 2루 도루 때 해태 포수 장채근의 악송구로 2사 3루의 찬스가 왔으나, 타석의 나웅이 맥없는 삼진을 당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경기 초에 세 명의 선수를 허비하는 바람에 대타도 없었고 2루 수비를 맡을 사람도 없었다. 김동재의 부재가 너무도 아쉬웠다.


9회초 해태는 선두타자 박철우가 안타를 치고 나갔다. 두 점도 버거운데 점수가 더 나면 그대로 쐐기였다. 하지만 김동수 포수의 견제로 1루 주자가 아웃되며 1루측 관중석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9회말에 뭔가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렇게 0 대 2에서 맞은 9회말. 타순은 1번부터였다. 세 명 중 하나만 살아나간다면 노찬엽까지 타순이 돌아오는데..... 하지만 김재박 민경삼 두 명이 힘없이 물러났다. 마지막 타자는 7회 첫안타의 주인공 김영직, 그는 침착하게 볼넷을 얻어 나갔다. 노히트노런을 막은 김영직이 이번엔 선동열의 무사사구 완봉승마저 막은 셈이었다. 드디어 방망이에 한창 불이 붙어 있는 노찬엽. 9회말 투아웃이었지만 점수는 겨우 2점차. 혹시 홈런이라도 나온다면.... 노찬엽은 그날 안타가 없었지만 바로 전날 홈런이 있었다.


노찬엽은 ‘검객’ ‘협객’이라는 별명답게 스윙폼이 멋있었다. 몸에 붙여 나오는 간결하면서 날카로운 스윙에 매서운 눈빛, 푹 눌러쓴 검은 헬맷..... 정말이지 ‘간지’가 나는 타자였고,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우중간 가르는 3루타'였다. 프로 첫해인 '89 시즌도 3루타 리그 1위였고 90년에도 3루타 선두 다툼 중이었다. 88올림픽 국가대표로 참여하고 입단하느라 프로에선 이제 겨우 2년차였지만 이미 한국을 대표하는 타자 중 한 명이었고 실제로 그 해 치열한 수위타자 경쟁을 펼쳤다. 통계로 뒷받침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선동열에게도 강하다고 팬들에게 알려져 있기도 했다.


선동열의 3구째, 노찬엽이 방망이가 무사의 검처럼 공기를 갈랐고, 하얀 공은 우중간을 향해 쭉쭉 뻗어나갔다. 중견수와 우익수가 갭을 좁히며 뛰어가고 공이 날아가는 1~2초 정도의 그 순간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양쪽에서 간격을 좁혀오는 중견수와 우익수, 그 가운데를 향해 날아가는 하얀 공....


공은 우중간을 갈랐다. 그리고 노찬엽은 3루까지 뛰었다. 세이프. 1타점 3루타였다.


이제 점수는 1대 2. 9회말 2아웃 주자 3루. 다음 타자는 타격 10위 타점 6위 홈런 10위의 김동수. 극적인 홈런이나 동점 안타라면 금상첨화겠지만 지난번 같은 폭투도 상관없었다. 자 9회말 2사 후 기적같은 선동열 침몰이 벌어질 것인가. 갑자기 LG 불펜도 동점에 대비하여 바빠졌다. 양쪽 팬들의 응원 속에 경기장은 완전히 달아올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동수는 3루 땅볼로 물러났고 경기는 그렇게 끝났다. 문병권은 선동열과의 완투 대결에서 한점차 패배를 당했다. 비록 아깝게 지기는 했어도 그야말로 박진감 넘치는 명승부였다.




아무리 LG가 타격의 팀이라 해도 3안타 완투의 선동열에게 밀린, 어쩔 수 없는 패배였다. 하지만 집에 가는 길, 가슴을 설레게 했던 노찬엽의 우중간 3루타가 계속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 타구는 정말 멋졌다. 노찬엽이 타석에 나오면 항상 중견수가 오른쪽으로 쉬프트하곤 했었는데 그래도 아랑곳 않고 우중간을 뚫으며 날아가던 공.....


리그 대표 중장거리 타자가 될 줄 알았던 노찬엽은 후일 93년 해태 김정수, 95년 OB 박철순에게 두 번이나 왼쪽 귀에 사구를 맞고 시력에 이상을 일으켜 채 실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은퇴하고 말았다. 해태와 OB는 여러 모로 도대체 이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94년 우승 때도 노찬엽은 LG의 중심타자였지만, 나는 아직도 노찬엽 하면 그날의 그 타구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잠실 야구장의 포수 뒤편은 조명의 조도가 가장 낮은 공간이다. 조금 어두운 좌석에 앉아, 그와 대비되는 휘황한 그라운드 안, 조명에 하얗게 빛나는 공이 눈을 감으면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 잔디 위를 날아가고 있다.


노찬엽. 은퇴한지 오래지만 그는 내 마음속에 영원히 등번호 30번이다



다음날 8월 25일 토요일, 3연전 두번째 게임이자 시즌 19차전.


전날 기습 선발투수에 당했던 백인천 감독은 이번엔 위장오더를 제출했다. 5번타자 우익수 김용수, 7번타자 좌익수 문병권이 전광판에 떴다. 이번에도 김응룡 감독은 의표를 찌르는 투수기용으로 좌완 신동수 대신 언더핸드 이강철을 기용했다. 이를 확인한 LG는 위장 투수들을 좌타자들인 윤덕규 김영직으로 교체했다. 지그재그 타선이었다. LG 투수는 필승 에이스 김태원.


오늘마저 지면 해태에 불과 반게임 차로 쫓기게 되니 반드시 잡아야 하는 경기였다. 직전 잠실 시리즈였던 7월 26일 김태원-조계현이 맞붙어 살 떨리는 투수전 끝에 1대 0 완봉승을 거둔 기억이 아직 생생했다. 느낌이 괜찮았다.


여담이지만 7월 26일 경기가 더 기억나는 이유는 팽팽한 0 대 0이 이어지던 경기 중반, LG 공격 때 빗맞은 파울볼 하나가 3루 코치박스 쪽으로 데굴데굴 굴러간 일이 있었다. 3루 코치(아마도 조창수 수석코치였을 것이다)는 맨손으로 그 공을 잡으려다 그만 가랑이 사이로 알을 까고 말았다. 3루쪽 해태 팬들이 일제히 입을 모아 “에에~~”하며 야유를 보냈다.


조창수 코치는 짐짓 큰 동작으로 뒤돌아 관중석을 째려보더니 다음 순간 모자를 벗고 넙죽 절을 했다. 그러자 와 하고 웃음이 터지며 해태 팬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파울볼 하나에 관중이 집중할만큼 팽팽한 경기이면서도 나름 유머도 있었다.


요즘 같으면 그런 일이 벌어지기 어려울 수도 있다. 왜냐하면 개인 응원가가 계속 나오고 있어 그런 경기장 전체의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타자별 등장음악과 응원가는 한국 야구의 흥행에 크게 이바지한 공신이고 개별 선수에 대한 응원 수단으로도 만점이지만, 가끔 너무 과하다는 생각도 든다.


90년대엔 KBO에서 인플레이 중 앰프 사용을 엄격히 금지했다. 투수가 던지려고 하는데 앰프에서 음악이나 목소리가 나오고 있으면 심판이 경기를 중단시켰고, 장내 방송과 전광판 자막으로 “경기 진행 중에는 앰프 사용을 자제해 주기 바랍니다”라는 안내가 나왔다.


야구는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운동이다. 그런데 쿵짝쿵짝 음악이 나오는 와중에 투수가 던지고 타자가 치고 하는 모습을 보면 어쩐지 유랑극단같아 선수들이 안쓰럽게 보인다. 음악까진 그렇다 치자. 마이크를 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응원단장은 도대체 뭔가? 응원단장이 몸짓과 호루라기로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해서 마이크로 목소리를 써야 한다면 그건 실력이 부족한 응원단장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마이크에 대고 노래를 따라부르고 있는 응원단장도 있다. 야구장이 개인 노래방도 아닌데 말이다.


앰프 사용을 시종일관 하지 않아도 응원은 얼마든지 재미있게 할 수 있다. 가령 개인별 응원가는 타석당 한번씩만, 응원단장 마이크 금지, 상대투수 견제시 야유엔 앰프 음원 금지, 그런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느 정도 야구계의 자발적인 규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축구장은 응원단장이 마이크 들고 떠드는 건 중동에나 가야 볼 수 있는데 야구는 어찌된 셈인지 이런 면에서 퇴보하고 있다.


누군가 일어서서 : LG 구호 준비!
주변 관중들 주먹을 들고: 야!
일어선 사람: LG 구호 시~작!
관중들 :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엘지 야!
(다같이 박수)


이런 팬들의 자발적인 문화는 끊임없이 앰프가 시종일관 울리고 관중이 어떠한 응원을 해야 하는지 쉼없이 지시받는 지금과 같은 환경이라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해태엔 유명한 ‘해태 아줌마’가 있었다. 행상을 하는 그야말로 완전히 아줌마스럽게 생긴 평범한 아줌마였는데, 해태 경기를 자발적으로 따라다니면서 한 게임에 몇번씩은 응원단상에 올라갔다. 멀리서 보면 한복 치마 입은 사람이 꽃술 같은 걸 들고 왼쪽 오른쪽을 누비고 다니는데 좌우를 오가는 그 스피드가 굉장히 빨랐다. 관중의 호응도 매우 뜨거워서 해태아줌마는 해태 팬 뿐 아니라 야구장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나름 전국구 스타였다.


반면 LG엔 ‘야구 할아버지’가 있었다. 등이 굽은, 키가 작고 비썩 마른 노인이었는데 해태 아줌마와 달리 관중의 호응은 전혀 없었다. 치어리더들이 단상에서 춤을 추고 있으면 한쪽 코너에서 개다리춤과 비슷한 엉성한 동작으로 박수를 강요했다. 응원을 게을리하는 사람이 보이면 허리에 손을 올리고 그쪽으로 삿대질을 하며 인상을 썼는데 별로 영향력은 없었다. 그렇지만 관중들은 같은 LG 팬으로서, 그리고 어르신에 대한 예의로, 호응해 주는 척 정도는 해 주었다.


90년대 중반에 이르면 그 분은 ‘야구 황태자’라는 글자를 등에 써 넣은 LG 점퍼를 입고 돌아다니며 응원을 그야말로 ‘강요’했다. 아마 ‘야구 할아버지’라는 본인의 별명이 싫었나보다. 어느 때부터인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지금쯤은 돌아가지 않으셨을까 싶다.


LG의 '야구 할아버지'. 후일엔 '야구 황태자'라고 스스로 등에 써붙이고 다니셨다. 명치까지 올려입은 양복 바지가 인상적이었다.


'해태 아줌마' 사진을 찍어놓으신 분이 있다. 이것은 최근 사진이지만, 20년 전에는 훨씬 날렵하셨다. 출처 http://blog.daum.net/kys5983/11238712


이외에도 단상에 올라가서 춤을 추거나 응원단장 흉내를 내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누군가 응원단상에 올라오면 이번엔 무슨 동작을 보여주려나 다들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보았고, 잘하는 사람에겐 박수갈채가, 못하는 사람에겐 야유가 쏟아졌다. “내려와 내려와”를 연호하면 그 사람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머쓱한 표정으로 내려오든지, 반대로 정말 얼굴에 철판을 깔고 태연자약하게 서투른 동작을 계속하든지 했다. 우리만이 아니었다. 멀리 반대쪽 3루 응원석에서 “내려와 내려와” 소리가 들려오면 누군가 엉성한 응원을 주도하고 있나보다 했다.


뭐랄까, 야구장의 분위기가 조금 더 공동체스러웠다고 할까? 술취한 해태 팬이 외야에서 쓰레기통에 불을 붙이면 자발적인 “진압조”가 결성되어 진압하러 출동하기도 했다. 그때가 지금보다 관중 문화가 더 우월했다는 건 아니다. 우리의 관중 문화는 분명히 발전하고 있고, 그때보단 지금 야구장이 훨씬 더 세련됐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경기에 대한 몰입도는 지금이 떨어진다. 두번씩 세번씩 반복하는 응원가를 줄이고 자발적인 목소리가 더 부각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관중이 앰프와 마이크와 응원단장의 피동적 동원의 주체가 되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니 말이다.


잡설이 길었다. 어쨌거나 8월 25일 토요일, 2차전을 맞아 잠실의 3만 만원관중이 뿜어내는 열기가 뜨거웠다. 9승의 이강철, 12승의 김태원 간의 맞대결이었다.


하지만 승부는 싱겁게 갈렸다. 1회말 안타 4개, 볼넷 하나, 폭투를 묶어 LG가 4점을 내 버렸기 때문이다. 이강철은 불과 아웃 한개만을 잡고 강판되었고 그 한개조차 1타점 외야 희생플라이였다.


LG에게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갑자기 넉 점을 득점하자 김태원이 흔들렸다. 2회초 무사에 연속 볼넷과 번트 안타로 무사 만루를 허용하고 말았다. 하지만 다음타자 박철우가 유격수 병살타를 치며 한 점만을 허용했고, 3회말 LG 공격에서 적시타 연속 세 개가 터지며 경기는 7대 1로 벌어졌다. 해태는 송유석 강태원 최향남 등 2진급 투수들로 나머지 이닝을 때웠고, 김태원이 4안타 완투승을 거두었다.


야구팬이란 지푸라기 같은 존재들. 한 게임을 지면 세상이 한없이 어두워보이다가 다음날 이기면 하루 전의 기억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하루살이 같은 존재들. 전날 우울하고 답답한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해태를 박살낸 우리는 축제 분위기가 되어 주먹을 휘두르고 노래를 부르며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다음날. 시즌 마지막 해태 전.


일요일 18:30 경기였음에도 오전부터 구름관중이 몰렸다. 나도 학생 주제에 거금을 주고 암표를 사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돈도 돈이지만 암표상이 꼴보기 싫어서 웬만하면 암표는 사지 않으려 했지만 매표소 앞은 아비규환이었고 경기는 해태전이었다.


미처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도저히 포기를 못하고 경기장 안에 들어가기를 호시탐탐 노렸는데 결국 외야쪽 셔터문이 뚫리고 그쪽으로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갔다. 야구장 정원이 30,100명이었는데 그날 35,000명 정도가 들어온 것으로 추정하는 기자도 있었다. 그 바람에 경기 시작이 5분 여 지연되었다. 이것은 불길한 시작이었다.


복도고 계단이고 공간이 있는 곳이면 사람이 넘쳐흘렀다. 화장실 가기도 고역이고, 세상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경기장은 난생 처음이었다.


선발투수는 해태 신동수와 LG 김용수. 첫날 당한 백인천 감독은 이날도 두 명의 투수를 선발 명단에 올리는 위장 오더를 썼다.


김용수는 출루를 허용할 때마다 병살로 처리하며 효과적인 투구를 이어나갔지만, 1회말 공격 시 홈에서 태그 아웃 당하는 등 경기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6회부터 승부는 벌어졌다. LG가 6회말 3점, 7회말 10명의 타자가 나와 7점, 다시 8회말 3점을 내며 승부를 결정지었다.


구원투수의 부재로 해태는 이틀 연속 빅이닝을 허용하며 무너진 것이다. 선동열 이외에 믿을 투수가 없는 팀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난 경기였고, 첫경기 선동열이 나오면서 스스로 어느정도 무릅쓴 위험이기도 했다.



문제는 경기가 아니었다. 이날은 지금까지도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사상 최악의 관중 난동이 일어난 날이었다.


발단은 10대 0으로 벌어진 7회였다. 아침부터 나와서 하루 온종일 줄을 섰거나 거금을 주고 암표를 사고 들어온 팬들에겐 이틀 연속 대패가 열받았을 것이다. 경기 초반 나름 팽팽하던 경기가 중반에 급작스레 벌어져 버렸으니 더 화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곧 다가오는 빙그레와의 일전을 대비해 해태는 경기를 포기하고 패전처리 투수들을 올렸다. 그렇게 7회말이 끝나자 3루쪽에서 빈병과 깡통 등이 쏟아져 들어왔고, 그때 누군가 관중 한 명이 그라운드로 들어왔다. 일부러 뛰어들었다는 설도 있고 술김에 떨어졌다는 설도 있는데 사실 여부는 모른다. 어쨌거나 안 그래도 바짝 긴장한 청원경찰들이 이 사람을 과격하게 제압하자 해태 팬들이 흥분했다. 처음엔 수십명, 나중엔 수백명이 그라운드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누군가의 목격에 의하면 해태 팬들의 난동에 흥분한 LG 팬이 같이 그라운드에 뛰어들어 이들을 ‘진압’하려 했던 모양이다. 갑자기 그라운드 안에 있던 해태 팬들이 1루쪽으로 몰려와 관중석 쪽에 오물을 던지기 시작했다. 일부는 자리를 피했고 일부는 맞받아서 그들에게 병을 던졌다. 해태와 LG 팬들간의 전설의 '투병 공성전'이 전개된 것이다. 그라운드에서 돌격하는 해태 팬들과 관중석에서 맞받아 병을 던지는 LG 팬들.



워낙 그라운드에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기에, 청원경찰과 심판, 선수들은 어느샌가 자취를 감췄고 한동안 야구장은 이들의 놀이터로 변했다. 전광판엔 태극기 그림이 나타났고 계속 질서를 지켜 달라는 장내 방송이 나왔지만 그런다고 말을 들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급기야는 스피커를 통해 애국가가 반복해서 나왔다. 하지만 애국가는 그라운드를 점거한 이들에겐 훗날의 무용담을 강화시켜 줄 비장한 배경음악에 불과했다. 결국 뒤늦게 출동한 경찰 병력이 쏟아져 들어오자 이들은 삽시간에 다시 관중석으로 올라갔다.


언론에선 양팀 팬들간에 패싸움이 났다고 양비론적으로 보도했지만 적어도 내가 목격한 바에 의하면 이것은 해태 팬들에 의한 일방적인 '깽판'이었다. 물론 LG 팬 중에도 과격한 사람들이 꽤 있었으니 일부 충돌이 있었을 수도 있겠으나 사건의 본질은 양팀 팬의 집단 난투가 아니었다. 잘 이기는 경기를 홈 팬이 왜 30분 넘게 방해하겠는가?


그런데, 여기까지만 말하면 마치 성난 폭도들의 질주처럼 들리지만 실상 그렇지만은 않았다. 저기 그라운드에서 야구하는 아저씨들을 보라. 어디 성난 사람들 같은지.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그 해 시즌 초반이었던 5월, 해태와의 경기 중 우천으로 취소가 결정되고 환불 요구 사태가 벌어졌을 때, 신문에 아래와 같은 사진이 실린 적이 있다.



환불해 주지 않는 것에 항의해서 셔터를 뜯고 들어가려는 저 사람들의 표정은 그다지 화난 표정이 아니다. 기물 파손, 공공시설 침입 등의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사람치고는 다들 천진하게 웃고 있다. 사실 경기가 취소되었는데 환불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부당한 처사이긴 했다.


그때 사람들을 무조건적인 떼쟁이라고 싸잡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잠실에서는 해태 팬들이 자주 문제를 일으켰고 그래서 LG 팬들은 해태를 매우 싫어했지만, 광주는 전혀 분위기가 달랐다. 90년 7월 더블헤더에서 LG가 두 게임을 다 이기자 광주 팬들이 LG의 경기력에 큰 박수를 보내주는 멋진 장면도 있었다. 빙그레 장종훈이 광주 구장에서 홈런을 치자 해태 팬들이 기립박수를 보내준 적도 있다.


나는 90년을 이렇게 해석한다. 그때는 공권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불신이 있었다. 오랜 군사독재 하에서 공권력은 ‘질서유지’ ‘엄단’ 같은 단어를 즐겨 쓰는 존재였고, 일반인들은 ‘시스템’을 존중하지 않았다. 공공의 질서는 시민이 만든 것이 아니라 위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었고 그래서 함께 지켜야 한다는 의식도 별로 없었다. 확대해석일 수도 있지만 조금 거창하게 얘기해서 정치사회적 정당성 부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경찰이 누구를 잡아간다거나 부당하게 대한다고 여겨지는 일이 있으면 사람들은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그러니까 청원경찰이 그라운드에 들어온 관중을 '제압'하자 '동료 시민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셔터를 뜯어내면서도 저렇게 ‘즐겁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나보다 우월하고 강력한 조직 – 예를 들어 KBO 혹은 구단 – 이라면, 자기가 다소 무리한 방법을 쓴다 해도 그것은 약자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들 생각했던 것 같다.


거기에 덧붙여 쓰리고에 광박 피박을 쓸 상황에 이르러 화투판을 확 뒤엎어 버리는 심정 – 까짓거 될대로 되라 – 그러니까 일종의 열패감 같은 것이 뒤섞여 있었던 것 같다. 전 글에도 썼듯이 그 때는 확실히 지금보다 사람들이 폭력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일반론이 아니다. 관중 ‘난동’이 끝난 뒤, 직원과 경찰만으로는 일손이 부족하자 그러운드에 내려가 같이 쓰레기를 치운 것도 역시 또다른 관중들이었다. 셔터를 뜯고 강제로 진입한 관중, 경기장에 병을 던진 관중, 베이스를 뽑고 난장판을 벌인 관중, '그만해'를 연호하며 나름 말리려 시도한 관중,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나고 그 오물을 치우는 데 힘을 보태던 관중이 섞여서, 같은 팀을 응원하며 목소리 모아 외치는 그때 만큼은 한마음이라고 생각하는, 정말이지 야구장은 참 이상한 세계였다.


돈이 많은 사람도 적은 사람도, 지위가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다 같이 3천원짜리 좌석에 앉아 조명탑 아래에서 벌어지는 그 세상에 일희일비하는, 얼굴에 칼자국으로 추정되는 흉터와 몸에 무시무시한 문신이 있는 아저씨가 애써 맡아 놓은 자리를 나같은 애송이 '학삐리'에게 넘겨주고 같이 소주를 마시는, 그 평등하고도 아름다운 세상에 조금씩의 균열이 있었고 그 틈으로 현실 세상이 새어 들어올 때 그날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 나의 조그만 생각이었다.


관중 난입 사건의 여파는 컸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질서유지’와 ‘엄단’을 천명했으니 말이다.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모 시민단체에서는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프로야구를 폐지하라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KBO에서는 경기장 질서 유지의 책임이 있는 홈팀 LG에게 ‘다음에 그런 일이 있으면 몰수게임을 주겠다’며 엄중 경고를 했고, 구단은 강력히 반발했다. 홈팀도 아닌 원정팀 응원단이 그런 일을 벌이는데 홈팀이 불이익을 당한다면 그거야말로 오히려 원정팀 측 관중 난동을 조장하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관중 뿐만은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에 해태 김봉연 코치가 판정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경기 중에 심판 뺨을 때리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질려 30경기 출전 정지의 강력한 징계를 받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심판의 스트라이크 판정에 불만을 품은 OB 포수 정재호는 김진규 투수가 속구를 던질 때 고의로 싹 비켜나 심판을 정통으로 맞혀 버렸다. 박찬황 구심은 포수 뒤에 서 있다 왼쪽 가슴팍에 그대로 공을 맞았는데, 이 사건은 ‘심판 폭행 사건’이라고 불렸다. 이를테면 아무런 적극적 폭력행위 없이도 폭행에 성공한 셈이었는데, 정재호는 당장 퇴장을 당했고 KBO로부터 10게임 출전 정지, OB 팀으로부터 자체 무기한 출장 정지의 징계를 먹었다. OB는 심판에게 정식으로 사과했고, 미국에서 온 정재호는 90년 한 해만 뛰고 한국 야구에서 사라져갔다.


그렇게, 치열했고 황당했던, 그리고 남의 집을 난장판으로 만든 해태 팬들에게 분노했던, 노찬엽의 3루타와 관중 그라운드 점거로 기억에 남은 해태 3연전과 함께 8월이 저물어갔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해태를 미워했고 해태가 싫었다.





관중 난동 다음날인 90년 8월 27일 KBS 메인 뉴스에서는 무려 2분을 들여 이 리포트를 했다



keyword
이전 09화비행기는 순항 고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