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는 순항 고도에

1990 LG 트윈스 우승 스토리 9

by 에덴의아래

(2013년에 쓴 글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9) 비행기는 순항 고도에


그 해 여름은 뜨거웠다. 비도 그다지 많이 오지 않았다. LG는 8월 내내 비로 연기된 경기가 단 한 게임도 없이 모든 일정을 소화했다.


나의 대학교 첫 여름방학. 생활의 촛점은 자연스레 야구에 맞춰졌다. 데이트도 해야하고 음악도 들으러 다녀야 하고 친구도 만나야 하고 과외 아르바이트도 해야 했지만 그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남는 시간, 야구 경기가 없는 짜투리 시간에 몰아서 하는 것들이었다.


그나마 잠실 경기가 없는 날은 라디오 중계를 들으며 다른 곳도 다녔지만 홈게임이 있으면 무조건 잠실로 갔다. 일반석 3천원, 지정석 4천원. 담배 한 갑에 600원. 야구장 앞 김밥은 경기 전에 천원, 경기 끝날 시간쯤 되면 오백원. 기타 약간의 간식 및 차비. 그다지 부담되는 금액은 아니었다. 그땐 과외 아르바이트가 비정상적으로 비쌌기에 웬만한 대학생이라면 경제적으로 크게 쪼들리지는 않았다. 게다가 나는 다행히 학비를 내 손으로 벌어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지정석은 극소수이고 대부분이 일반석이었다. 좌석번호도 없으니 먼저 가는 사람이 임자였다. 맨날 일찍 오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응원석(지금보다 두세블럭 왼쪽에 있었다) 앞에 모여들었고, 나중엔 친해져서 서로서로 자리를 맡아주기도 했다. 어쩌다 경기 시작 후에야 입장하는 날 그쪽에 가서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이름도 직업도 모르는, 얼굴만 알고 지내는 누군가가 불러 주기도 했다. “어이~~ 여기 자리~~!”


자리에 앉으면 반가운 인사를 해 왔다. "오늘 늦게 왔네." 자리의 댓가로는 아줌마 몸빼 바지 안의 소주 한 병 정도면 충분했다.


나야 학생이니 예외였지만, 일반 사무직 종사자가 평일 낮 너댓시에 야구장에 와서 죽치고 있는 건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출퇴근이 자유로운 직종이 많은 시대도 아니었다. 그 '죽돌이'들은 대부분 자영업 종사자들, 그러니까 장사가 굉장히 잘 돼서 시간이 남거나 반대로 장사를 포기한 사람들, 백수들, 아니면 건설 노동자나 기술자들처럼 뭔가 몸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경기 시간은 지금보다 확연히 짧아서 대개는 9시 전후에 끝났다. 한잔 하고 가자는 것에 의기투합이 되면 종합운동장 역 앞 땅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소주를 마셨다. 그 아저씨들보다 나이대가 턱없이 어린 나도 가끔 "학생도 한잔 해"하면 끼어들어 곱창볶음을 얻어먹었다. 워낙 주량이 약해서 술은 잘 못 마셨으니 음식이나 술 보다는 모 선수가 바람 피우다 걸렸다, 누구랑 누구랑 사이가 안 좋다, 등등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 불가능한 이런 저런 야구 이야기들을 얻어듣는 게 좋았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정보의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지 않고 경기 후 곧바로 만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 스포츠 뉴스를 볼 수 있었다. 물론 스포츠 뉴스는 가뜩이나 짧은데 축구 등 다른 종목도 다뤄야 했기에 성에는 차지 않았다.


한 시간쯤 기다리면 KBS 2TV에서 <오늘의 프로야구>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보통 두 경기 정도의 하이라이트를 보여주었던 것 같다. 정식 중계방송을 위한 화면이 아니었기에 카메라 대수도 부족하고 조금 엉성한 영상이었지만 그게 어딘가. <오늘의 프로야구>가 끝나고 조금 기다리면 피씨 통신에 스포츠 신문 기사들이 올라왔다.


11시가 넘은 시간, 그때부터 여자친구와 통화도 하고 채팅도 하고 책도 조금 보고, 그러다 다음날 느즈막한 아침에 일어나면 점심먹고 다른 일을 조금 처리하다 서너시에 야구장으로 간다. 그 때부턴 다시 도돌이표처럼 하루가 반복된다.


물론 맨날 혼자 다녔던 건 아니다. 친구랑 같이 갈 때도 물론 있었고, 혼자 갔다가도 관중석에서 방방 뛰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는 일도 꽤 잦았다(첫 글에 쓴 것처럼 잠실야구장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렇지만 혼자 갈 때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일단 혼자 오는 사람들이 워낙 많았던지라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고, 웬만한 친구와 있는 것보다는 LG 골수인 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훨씬 재미있기도 했다.


전혀 외롭거나 심심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친구야 언제든지 만날 수 있고 연애도 다른 날 - 그러니까 월요일에 - 할 수 있지만, 지금 찾아온 이 이 분위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LG는 바람을 타고 있었다. 대단한 슈퍼스타가 있는 것도, 리그를 평정하는 홈런 타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축구로 치면 토탈 사커, 개인의 합을 초월하는 팀의 상승세라는 게 매년 찾아오는 이벤트가 아니었다. 이 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승리의 느낌, 승리의 경험이 나에겐 너무나 절실했다.


외로움보다는 정보에 대한 목마름이 훨씬 강했다. ‘허구연의 야구 중계석’인가, 이름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아무튼 전화를 걸면 십초에 몇 십원씩 받고 게임 평도 하고 경기 상황도 알려주는 서비스들이 몇 개 생겼지만 그건 92년의 일이었다. 90년엔 정보가 많이 부족했다. 일간스포츠, 스포츠서울, 그리고 그 해 새로 창간된 스포츠조선, 세 개를 정말 열심히 읽었다. 그나마 갈증을 달래주던 잡지 <주간야구>는 90년 중반쯤에 폐간되어 버렸다. 그래서 더 라디오 중계를 열심히 듣고, 그래서 더 잠실에 자주 갔던 것 같다.




그렇다. LG는 바람을 타고 있었다. 6,7월에 급격히 고도를 높인 이후 7월말 대전 4연패라는 난기류를 만나 잠시 흔들렸지만, 김용수 김태원의 영웅적인 호투에 힘입어 곧바로 항로를 회복했다. 비행기를 타고 가다 보면 이륙 후 얼마 지나 기장의 안내 멘트가 나온다. “이제 우리 비행기는 순항 고도에 이르러.....” 그 여름, 8월, 급격한 상승은 없었지만 팀은 안정적으로 순항고도를 비행했다.


당시는 5선발 체제가 아니었다. 5선발은 후일 이광환 감독이 오고 나서 미국식 시스템을 도입한 결과였고, 처음엔 논란이 많았다. 일주일에 한번씩 쉬는 한국 야구에서 다섯 명이 로테이션을 돌 필요가 있는가 하는.


많은 팀이 4선발 체제였고, LG의 경우 김용수 김태원 문병권 김기범 이국성의 다섯 명이 주로 선발로 나섰지만 닷새에 한번씩 돌아가며 나오는 정식 5선발 시스템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선발이 부진한 날은 저 중 한 명이 게임 초중반에 구원으로 투입되어 4일 로테이션으로 도는 경우가 많았다. 좌완 둘, 언더 한 명, 우완 두 명의 이상적인 조합이었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8월 첫주 OB와의 원정 3연전, 팀이 4일을 쉬고 나온 첫 경기, 선발로 나온 김기범이 1회말 1,2,3번 타자를 모조리 볼넷으로 내보냈다. 그러자 백인천 감독은 1회 무사 만루에서 주저없이 김기범을 내리고 김용수를 투입했다. 1승 1패로 맞섰던 그 시리즈 3차전에는 차동철이 나섰는데, 2회 두 점을 주며 0대 2로 끌려가기 시작하자 3회부터 김태원을 투입했다.


사실 두 점을 뒤지는 상황에서 팀의 에이스를 3회부터 등판시키는 건 큰 모험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OB의 계형철을 상대로 타선이 꾸준히 득점하여 역전에 성공했고 9회초에 대량득점까지 나오며 10대 2로 크게 이겼다. 감독은 타선을 믿었다. 그리고 그 점에 있어서는 팬들도 마찬가지였다.


계형철은 시커먼 수염을 기르고 던졌다


OB와 2승 1패를 한 다음에는 잠실 롯데전이었다. 첫 경기 문병권이 선발로 나왔으나 부진하자 경기 중반 김기범으로 교체했다. 경기는 계속 끌려갔고, 2대 6으로 뒤지던 9회말 무사에서 노찬엽 김동수의 연속안타, 대타 이병훈의 적시타가 이어졌다. 한 점 따라가고 이어지는 무사 1,2루 기회. 또 한번의 명승부가 나오는 분위기였지만, 이병훈이 무리하게 외야 플라이에 1루에서 2루로 온더베이스하다 아웃되고 말았다. 결국 4대 6까지 따라붙은 두 점차, 투아웃 2,3루. 안타 하나면 동점이 되는 상황에서 이광은이 삼진을 당하며 경기가 끝났음을 생각하면 아쉬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2차전 김용수, 3차전 김태원이 나와 비교적 손쉽게 이기며 또다시 2승 1패 위닝 시리즈를 만들었다. 롯데는 이미 시즌을 포기하는 분위기로, 2루 주자 김상훈이 중견수 플라이 때 홈까지 들어와 득점했을 만큼 선수들이 긴장감이 없었다.


이어지는 8월 둘째 주는 광주 해태 4연전이었다.


첫날 더블헤더 1차전. 문병권 이강철의 투수전이 또다시 이어졌다. 1대 1의 팽팽한 대치가 계속되자 7회 선동열마저 등판했다. 이날 왜 그랬는지,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광주 경기라 직접 보지도 못했고 평일 낮경기라 중계방송도 없었다. 어쨌든 신기하게도 8회초 선동열을 상대로 집중 4안타를 터뜨렸고 거기서 2득점하며 경기를 이겼다. 9회말 투아웃에 1실점하기는 했으나 정삼흠이 구원 등판, 한 타자를 삼진으로 잡고 세이브를 올렸다. 지난 번 폭투 게임에 이어 두 번 연속으로 선동열을 패전 투수로 만든 것이다. 그날까지 선동열은 14승 4패 3세이브. 4패 중 두 번이 LG의 작품이었다.


더블헤더 2차전. 선발 김기범이 1회초에 또다시 부진했다. 안타 세 개, 볼넷 하나, 투수 실책으로 아웃카운트를 하나도 잡지 못하고 5번타자까지 내보내자 이번엔 이용철이 올라왔다. 그리고 9회말 경기 종료까지 혼자서 던졌다. 12대 5의 승리, 완투승이나 다름없는 호투였다. 이용철의 시즌 첫 승리였다.


부상에서 돌아와 얼마전 1군에 합류한 이용철은 정말로 큰 지원군이었다. LG의 신인왕 계보는 김건우(86) - 이용철(88) - 김동수 (90) - 유지현(94) - 이병규(97)로 이어지는데, 이용철은 '90 시즌을 앞두고 발목에 ‘무혈성 괴사’라는 진단을 받고 철심을 박는 수술을 해야 했다. 컨트롤 괜찮은 지능적 사이드암 투수이자 지금은 명 해설자로 이름을 날리게 된 이용철은 의외로 짧은 선수생활을 하고 은퇴하는데 아마도 이 병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쨌거나 꼴찌하는 팀에서 매년 7-8승 정도를 안정적으로 해 주던, 다른 팀이었으면 10승은 했을 이용철의 가세는 체력이 떨어진 팀에 크나큰 지원군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해태 4연전은 2승 2패. 나흘 간 휴식 후 맞붙은 삼성과 2승 1패. 그리고 마침내 8월 17일, 문제의 대전 빙그레전이 다가왔다.


대전구장 19연패야 이미 벌어진 일이니 할 수 없지만 20연패가 되면, 앞자리 숫자가 바뀌어 버리면 그거야말로 큰 망신이었다. 순위 경쟁을 하고 있던 빙그레에게 1패는 그 충격이 두 배였고, 게다가 포스트시즌에서 만날 가능성이 높은데 이렇게 계속 무기력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든 언론도 이 경기를 주목했다. 필승의 임무를 띠고 나선 투수는 다름아닌 이용철.


1회말 시작하자마자 1번타자 이강돈, 2번타자 이중화에게 연속 2루타를 맞고 1실점을 했다. 불길한 시작이었다. 20연패가 눈앞에 어른어른했다. 그러나 이후 이용철의 호투가 이어지며 12타수 연속 범타. 그리고 마침내 6회 2사, 윤덕규의 동점 솔로 홈런이 나왔다.


6회말 곧바로 한 점을 다시 실점하긴 했지만, 7회초 시작하자마자 3연속 안타와 김동재의 희생플라이로 드디어 3 대 2 역전에 성공했다. 구원 1위 송진우를 상대로 한 통쾌한 타격이었다. 그리고 9회초 김동수의 쐐기 솔로홈런까지.


이렇게 대전구장 19연패는 끝났다. 얼마나 기뻤던지 백인천 감독은 원정 경기장임에도 불구하고 마운드에 올라가 두 팔을 올리고 환호했다. 거기 호응해 준 관중이 몇이나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부상으로 뒤늦게 합류한 이용철은 시즌 종료까지 두 달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알토란 같은 3승을 보태게 된다. 광주 해태전에서의 승리, 그리고 대전 19연패를 끊는 승리.


그러나 대전은 역시 대전. 나머지 두 번의 경기에서 LG는 별다른 맥을 못 추고 2연패를 했다. 1승 2패로 시리즈 마감.


이어진 부산 롯데 4연전에서 LG는 3승 1패로 반등했다. 두 번째 경기에서는 7대 0으로 승부가 기운 9회초 대거 9점을 추가하는 무자비한 공격으로 16-0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 과정에서 롯데 투수 이상구에게 김상훈이 데드볼을 얻어맞고 마운드로 돌진, 이상구가 등을 돌리고 내야를 뱅뱅 돌며 도망가고 김상훈이 계속 쫓아가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대전 4연패 이후 잠실 해태전 2승 1패, OB전 2승 1패, 롯데전 2승 1패, 광주 해태전 2승 2패, 삼성전 2승 1패로 위닝을 계속 이어갔다. 대전에서 1승 2패로 부진했지만 곧바로 부산에서 3승 1패를 거두며 만회했다.


7월말 4연패, 8월 중순 1승 2패, 그렇게 두 번의 대전 시리즈를 제외하면 석달 동안 LG에게 루징 시리즈가 단 한번도 없었던 셈이다. 8월 들어 큰 연승은 없었지만 꾸준한 위닝 시리즈 덕분에 대전에서의 데미지도 회복할 수 있었다.




어느덧 불과 스물 몇 경기 남은 시즌. 포스트시즌 진출은 확정적이었다. 4강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문제는 순위 싸움. 누가 1위를 차지하고 한국시리즈에 직행할 것이냐.


남은 경기수와 승차를 고려하면 LG가 1위를 할 가능성이 그다지 높진 않았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었다. 한번의 막판 스퍼트가 있다면 혹시라도.....


83년 이후 7년만에 처음 맞이하는 포스트시즌이었다. 서울의 LG 팬들이 체감하는 성적은 사실 순위표 이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전구장에서 기록한 1승 9패는 잠실에서 직접 목격하지 못했고, 그것만 반타작을 했다 치면 빙그레와 거의 승차 없는 1위 다툼이었으니 말이다.


이전까지 MBC 청룡의 최다 관중 동원은 바로 후기리그 우승을 했던, 그러니까 마지막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던 83년이었다. 이후 밑바닥을 전전하던 6년간은 관중이 줄어들었다가 마침내 90년 들어 이전 기록을 넘어서게 되었다. 아직 한 달의 페넌트레이스가 남아있는데 83년의 총 관중 집계를 이미 넘어섰다. 숨어 있던 서울 팬들이 잠실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관중 수를 따지면 늘 OB보다 많긴 했다. OB는 한 번 우승을 하긴 했지만 그 땐 대전 팀이었고 연고지 이전의 여파로 충성도 높은 팬 층이 아직 부족했다. 다만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또래에선 OB 팬들이 꽤 있었는데 그 이유는 83년이었던가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OB가 어린이 회원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야구를 좋아하는 어린이들에겐 OB 외에 회원 가입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더불어 박철순이라는 슈퍼스타도 있었다.


사실 82년의 슈퍼스타라면 단연 투수에 박철순, 타자에 백인천이었는데, 박철순은 나름 잘생긴 외모에 잘 빠진 몸매의 소유자인데다 덧붙여 우승까지 이루었던 반면, 백인천은 이미 머리가 벗겨져 가는, 배도 조금 나온 40대 아저씨였다. 그놈의 게브랄 티 광고에도 나오고 말이다. 어린이들의 인기 측면에서는 도저히 경쟁 상대가 아니었다.


그 어린이 회원 모집 덕에 아이들 중에는 OB 팬들의 숫자가 꽤 많았다. 응원하는 팀을 한 번 정하면 후에 바꾸기는 어려운 법이다. 아무리 사는 지역이 바뀌고 구단의 연고지가 바뀌고 그 팀이 꼴찌를 헤맨다 해도, 한번 정해지면 각인되기 때문이다 (OB보다 1년 후 84년부터 롯데가 어린이 회원 제도를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제가 빗나갔는데, 아무튼 무려 6년 연속으로 중하위권을 전전하다 찾아온 90년, 한 번도 우승의 경험이 없는 서울 팬들에게 LG의 선전은 무척 강렬하게 다가왔다. 서울은 승리에 목말라 있었다. 그리고 LG는 더이상 '승리의 가능성'이 아닌, '승리'를 보여주었다. 누군인지는 모른다. 그 격정을 이기지 못한 누군가가 관중석에서 자발적인 구호를 시작했다.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엘지 야!”


1990년 야구장에서 느닷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저 구호를 외치는 아저씨들이 심심찮게 있었다. 때로는 혼자, 때로는 일행들끼리 입을 맞추어, 소리 높여 구호를 외쳤고 그러면 주변 사람들이 박수로 화답하곤 했다. 그 과정에서 ‘엘지’가 두 번 더 들어가는 것으로 구호가 살짝 바뀌었다.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엘지 엘지 엘지 야!”


그다지 독창적인 구호는 아니다. ‘갔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를 그대로 차용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리고 맥락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유치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맨날 맥없이 지기만 하던 팀이 이제는 “나가서 싸워서 이긴다”는 외침이 팬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런 이유로 구호는 점점 더 친숙해졌고, LG 트윈스를 대표하는 구호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 해 잠실의 여름밤, 흥분을 이기지 못한 누군가 일어나서 선창을 하면 그 주변 수십 명이 따라서 외치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다음해인 '91 시즌 개막전, 야구장에 갔더니 구단 측에서 저 구호로 아예 노래를 제작해서 경기 전 장내에 방송을 하고 있었다. 혼성 합창단의 목소리로.


나~가자 엘지~
싸~우자 엘지~
이~기자 엘지~
멋!쟁이 엘지~


지금의 노래 가사는 90년 그 여름날의 하루,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나 외치면서 시작되고 구전으로 전해지며 완성된 구호다. 비록 말랑말랑한 멜로디로 순화된 노래는 ‘격문’ 같고 전투적이었던 1990년의 그 구호 분위기와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이제 정규 시즌 20여 게임 남은 막판 스퍼트. 그 길목에 8월 24일부터 시작되는 해태와의 잠실 3연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1990년 시즌’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그 시리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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