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빛 세상

1990 LG 트윈스 우승 스토리 7

by 에덴의아래

(2013년에 쓴 글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7) 장미빛 세상


올스타전은 싱겁게 끝났다. 동군 박동희, 서군 선동열의 신구 광속구 투수 대결이라며 언론이 애써 분위기를 띄우긴 했으나, 박동희는 시즌 내내 문제였던 팔꿈치 통증을 이유로 한 타자만 상대했고 선동열은 2이닝을 던졌으나 2실점하며 부진했다.


올스타전이야 애초부터 골수 야구팬들에게 중요한 이벤트는 아니었고, 더 재미있는 것은 이탈리아 월드컵이었다. 7월 1일, 동독과 서독이 협정을 맺음으로써 2차대전 이후 45년간 갈라져 있던 양국은 통일의 절차에 돌입했다. 게다가 마침 그 순간 서독 대표팀이 월드컵 4강에 올라 있었다. 서독 선수들은 통일 조국에 우승 트로피를 바치겠다며 전의를 불태웠고, 공교롭게도 4강 상대가 잉글랜드였다. 분단 전 통일 독일과 영국이 싸웠던 2차 대전을 떠올리며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개최지가 하필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이기도 했다.


전쟁이란 엄청난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수많은 이들의 운명을 바꿔놓는 중대하고도 엄중한 문제인데 그깟 공놀이에 전쟁의 역사를 대입하는 것이 일종의 역사 모독이라는 반론도 있었으나, 어쨌거나 독일은 잉글랜드를 꺾으며 승리했고 이어진 결승전마저 아르헨티나를 1-0으로 이겨 월드컵을 차지했다. 독일 통일에 월드컵 우승이 동시에 이뤄진 셈이니 어마어마한 경사 두 개가 한꺼번에 겹쳤다 할 수 있었다. 축구 천재 마라도나는 이 결승전 패배를 끝으로, 준우승 메달을 목에 걸며 통곡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접게 된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 및 공산권의 몰락이 누구에게나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1990년을 크게 보자면 예기치 않은 공산권 몰락에 전세계 좌파 진영이 한편으로는 타격을 입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며 소강 상태에 들어가 있을 때였다. 소련의 사회주의는 '현실 사회주의'였을 뿐 사회주의의 이상을 소련이라는 특정 국가의 성쇠와 동일시할 수는 있느냐는 논쟁도 활발했다. 특히 우리나라는 아직 군사정권의 그늘 속에 있던 때라 무작정 미국의 손을 들어줄 수도 없는 미묘한 시기였다. 재야 운동은 계속되었고, 겉으로는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나 재야 진영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어 김근태가 체포되어 징역 7년 구형을 받는 등 불안정이 계속되었다.


야구장은 그와는 조금 다른 세계였다. 그 안에도 승리와 패배와 함성과 욕설과 시위가 있는, 저녁에 조명탑에 불이 켜지면 펼쳐지기 시작하는 별개의 세상이었다. 일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주인공 가족이 버려진 테마파크 정문을 통과하며 새로운 세계에 빠져들어가듯, 잠실 종합운동장역 6번 출구(당시엔 숫자가 아니라 가나다로 출구 번호가 매겨져 있었지만)를 올라가는 그 길이 나에겐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다리였던 것도 같다.


다른 많은 이들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깟 공놀이에 기뻐하고 분노하고, 청문회를 요구하며 시위를 일으키고, 싸움을 벌이지 않았을까?


LG 트윈스는 후반기 시작 후에도 잠실에서 삼성을 맞아 3연승 스윕, 롯데를 맞아 2승 1패를 하며 순항을 계속했다. 그 중 7월 12일 롯데와 1승 1패에서 맞붙은 세 번째 경기, 실책 네 개를 저지르며 롯데가 11대 2로 자멸하자 서울의 롯데 팬들이 또한번 폭발했다. 이삼백명 정도가 롯데 선수단 버스를 막고 감독 나오라며 시위를 벌였고, 격분한 선수들이 그 중 두명을 롯데 버스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두 사람은 얼굴이 찢어져 피를 흘리는 부상을 당했는데 이들은 버스에 끌려 들어간 후 구타와 짓밟힘을 당했다고 주장했고, 롯데 측에선 떠나는 버스를 막으려 와이퍼 등에 매달리다 스스로 다쳤을 뿐 폭행과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두 명을 버스로 끌고 들어간 장명부 코치와 최계영 선수가 이 일로 입건되었다. 이와는 별개로 롯데 팬끼리 싸움이 발생, 한 명이 깨진 맥주병에 옆구리를 찔리는 일도 일어났다. 그만큼이나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도 세련됨을 자부하는 서울 LG 팬들은, 아니 적어도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은, 그런 사태를 볼 때마다 은밀한 쾌감 같은 걸 느꼈던 것 같다. LG한테 박살나더니 꼴 좋다, 아예 버스 못 떠나게 막아서 내일 게임도 망쳐버려라, 하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장 경찰이 자꾸만 야구장에 출동하는 것이 불편하기도 했다. 잠실 지하철역 6번 출구를 빠져나와 다른 세상에 찾아왔는데 속세의 공권력이 이쪽 세상에까지 그 모습을 드러내다니. 헬맷을 쓰고 방패를 든 위압적인 모습의 전경을 야구장에까지 불러들이다니. 그래서 소동을 피우며 전경을 야구장에까지 끌어들이는 원인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원망스럽고 짜증스러웠다. 학교 앞에서 보는 것만도 공포스럽고 짜증스러운데 야구장에서까지 전경을 보아야 하다니.


이후 LG는 OB와 만나 3연승, 광주에 가서 해태에 2승 1패. 거칠 것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7월 13일, 대망의 1위에 올라섰다. 불과 40일 전 LG는 14승 22패로 꼴찌였는데 그건 이미 먼 과거의 일인 것처럼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7월 19일, 후반기 시작 후 9승 2패를 기록했을 때 LG는 시즌 38승 28패, 그러니까 40일동안 24승 6패의 꿈같은 성적을 기록하고 꼴찌에서 1위까지 수직 상승을 이룬 것이었다.




아직은 2위와 불과 반 게임 차이긴 했는데 경기 내용이 좋았고 쉽게 내려갈 것 같지 않았다. 후반기 11경기 9승 2패를 하며 김용수가 3승을 챙겼는데 그 중엔 시즌 첫 선발승과 시즌 첫 선발 완투승이 있었다. 부상에서 돌아온 김기범도 그 기간 동안 2승이나 기록했으며, 문병권은 시즌 8승째, 김태원은 7승째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했다.


주축 선수들이었던 정삼흠 노찬엽 김용수 김상훈


LG의 좌타자들 윤덕규 김영직 김상훈


타격에서도 거칠 것이 없었다. 노찬엽 이광은 김상훈 윤덕규 등이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는 가운데 신인 김동수도 생애 첫 만루홈런을 터뜨리는 등 질주를 계속했고, 특히나 기대하지 않았던 두 명의 활약이 눈부셨다.


한 명은 2루수 김동재. 김동재는 아마추어 시절 국가대표 2루수로 수비 하나만큼은 최고라고 인정받는 선수였다. 고향팀인 삼성에 입단했으나 처음엔 배대웅, 이후엔 거포 2루수 김성래에 밀려 무려 8년간 백업을 하던 끝에 89년 MBC로 현금 트레이드되어 왔다. 수비에 비해 타격이 약해 항상 8번으로 기용되곤 했는데, 전반기엔 2할 초중반대를 치더니 7월 들어선 3할 5푼대의 맹타를 휘둘러댔다. 7월 12일 잠실 롯데전(버스 사건 났던 날)에서 생애 첫 만루홈런, 다음날인 7월 13일 더블헤더 1차전에서 역전에 성공하는 스퀴즈번트, 이어진 더블헤더 2차전에서 9회말 끝내기 안타를 치며 3게임 연속 승리타점을 기록했고, 17일 광주 해태전에서는 비록 팀이 한점 차로 아깝게 지긴 했지만 연타석 홈런을 날리기도 했다.


당시는 지금보다 프로야구에 지역적 색깔이 강하던 때로, 서울에 아무 연고도 없고 1년 전에 삼성에서 이적해 온 김동재는 처음에 그다지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하지만 성실한 플레이만큼은 많은 인정을 받았고, 클러치 안타까지 마구 때리기 시작하자 팬들의 호응도 급속도로 높아졌다. 수비할 때 2루로 공이 가면 무조건 안심이었고, 8번타자 등번호 26번 김동재가 타석에 나오면 은근한 기대감마저 불러 일으켰다. 언론에선 그를 '하위타순 4번타자'라고 불렀다. 또한 김재박-김동재의 키스톤은 안정성에서 당시 7개구단 최강으로, 그 해 LG는 전 구단 최소 실책을 기록했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수비가 강하다고 강팀은 아니지만 강팀은 수비가 강하다.


수비코치로 2009년 기아 우승의 숨은 공로자였던 그는 갑작스런 뇌경색으로 수술 후 회복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그마하고 탄탄한 몸으로 내야를 철벽같이 지키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말이다. 지금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경기 후반 김동재가 몸을 날려 안타성 타구를 걷어낸 덕에 이긴 경기가 '90 시즌에만 최소 서너 경기는 되었다.


또 한명의 ‘갑툭튀’는 김영직이었다. 김영직은 김동재와 1960년생 동갑으로, 그야말로 철저한 무명선수였다. 영남대 시절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한 후 실업팀을 거쳐 MBC에 87년에 입단했지만 딱히 보여준 것은 없었다. 그러다 ‘90 시즌을 앞두고 동계훈련에서 백인천 감독 눈에 띄어 중용되기 시작하는데, 중용된 이유가 체력 테스트 1위를 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져 온다. 백인천식 타법의 가장 큰 혜택을 본 선수라는 평가도 있었다.


딱히 발도 빠르지 않고 별명이 '영감'인 김영직은, 김용수가 한국 최초의 마무리 전문투수였듯 한국 최초의 대타 전문요원이었다. 90년에도 54안타로 40타점을 올린 것을 보면 얼마나 영양가 만점이었는지 잘 알 수 있다. 고비마다 나와서 적시타를 터뜨리는가 하면 강한 어깨로 외야 수비도 괜찮았다.


92년에 구단에서 제작한 카드. 그런데 우째 이런 사진을...


"나이에 비해 노련한 얼굴과 어떠한 위기상항이 닥쳐도 서두르거나 흥분하지 않고...."라고 되어 있다. 김영직은 후일 LG 2군 감독을 했다. 출처는 https://blog.naver.com/green014/90137665710


정삼흠 이야기도 잠깐 해야겠다. 정삼흠은 김용수 김태원 이상훈과 함께 90년대 LG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투수진의 주축 멤버다. 85년도 입단한 후 80년대 후반 MBC 청룡의 에이스이기도 했다. 사실 정삼흠은 최동원 선동열 김시진 등 쟁쟁한 투수들과 함께 한국 프로야구 사상 6번째로 100승을 돌파한 대단한 투수였지만, 대학 때만 해도 철저한 무명투수였고 그래서인지 프로에 입단해서도 팬이나 언론의 대단한 추앙을 받지는 못했다.


정삼흠의 경력을 보면 고대 중퇴로 되어 있다. 선동열의 동기동창인데 쟁쟁한 선수들에 밀리고 부상 등으로 설 자리가 없자 포항제철 실업팀에 입단했고, 84년 실업팀 신인왕을 차지한 후 85년 MBC 청룡의 지명을 받아 동기들과 같은 나이에 입단했다. 적당한 비유는 아닐지 모르지만 고등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퇴한 후 검정고시와 수능 성적으로 명문대에 합격한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85년 신인으로 무려 192이닝을 던졌는데, 당시 팀당 경기수가 110경기인데 선발과 계투를 오가며 그 중 41경기에 나왔으니 그저 허구헌날 나왔다고 보면 된다. 80년대 내내 비슷한 존재였는데 팀이 약했으니 늘 승보다 패가 많았다. 87년 6승 13패, 88년 5승 16패로 2년 연속 리그 최다패 투수였다. 잘 던지는 투수라야 최다패 타이틀도 가능한 법이다. 헐리우드 야구 영화에 등장하는, 맨날 지는 팀의 이닝이터 투수 같은 이미지였다고 할까.


정삼흠이 나오면 해설자들은 늘 "가장 머리가 좋은 투수, 특별할 것 없는 공으로 가장 잘 던진다"라고 평하곤 했다. 동그란 안경 덕에 붙은 '부엉이'라는 별명 외에 컴퓨터 제구, 컴퓨터 투수라는 닉네임이 꼭 따라붙곤 했다. 밤경기에 특히 강했다.


백인천 감독은 5월말 경부터 그에게 마무리를 맡겼다. 마무리 투수는 구속으로 타자를 윽박지르는 정통파 투수여야 한다는 개념과는 정반대의 이 배치는 '90 시즌에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90년 총 190경기 중 55경기에 등판했으니 거의 두 경기에 한 번 꼴로 나왔고, 경기 후반 등번호 1번 정삼흠이 등판하면 우리는 안심하고 집에 갈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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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인데 구글에서 '정삼흠'을 검색하면 청소년 유해정보가 제외되었으므로 성인인증을 하라는 문구가 왜 나오는지는 수수께끼다. 내가 아는 범위에선 무슨 구설수에 오른 적조차 없는데.)




잠실의 본격적인 여름밤, 이제는 이기는 것이 당연해진 LG 경기의 7-8회쯤 되면 흥에 못 이긴 팬들 중에 아이스크림을 사서 관중석에 ‘뿌리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나타났다.


야구장에서 노란 바구니에 과자나 오징어를 담아 들고 다니는 아주머니들은 경기 후반엔 꼭 아이스크림을 담아 왔다. 월드콘이었는지 부라보콘이었는지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그 아주머니들이 나타나면 꼭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줌마! 여기! 아이스크림 다섯 개!”


다섯 개를 받고는 뒤돌아 일어서서 관중들을 향해 아이스크림을 흔들면 사람들은 여기 여기 하면서 손을 흔들고, 그러면 그쪽을 향해 하늘 높이 던지는 것이다. 난데없는 공짜 아이스크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기분도,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던져주는 기분도, 상쾌하고 짜릿하기까지 했다. 내가 마치 사인볼 던져주는 야구선수이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향해 환호하는 사람들....


개중에서도 ‘큰 손’들은 갯수 제한을 두지 않았다.


“아줌마! 몇 갠지 잘 세고 있어요.”


그러면 아주머니들은 흐뭇한 미소와 함께 옆에서 바구니에서 끝없이 아이스크림을 꺼내서 건네주고, 팔을 높이 들어 흔들어대는 관중석을 향해 아이스크림이 계속 날아가고....


그 판매원 아주머니들은 항상 헐렁한 몸빼 바지를 입고 다녔다. 다니기 편리해서이기도 했지만 바지 안에 소주병을 넣고 다니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당시 야구장은 일절 주류 금지. 거듭되는 관중 소요 속에 야구장 내에서 주류 판매를 일절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입장객들 가방까지 뒤졌다. 술병이 아닌 보온병, 혹은 다른 음료수통에 술로 의심되는 음료가 들어 있으면 청원경찰이 뚜껑을 열고 냄새까지 맡았다.


하지만 굳이 술을 밀반입하려 애쓸 필요가 없었다. 야구장 측의 묵인이 있었겠지만 그 아주머니들이 소주를 팔았기 때문이다. 진로에서 팩소주를 처음 출시한 것이 바로 90년이었는데, 이 때만해도 야구장 아주머니들이 바지에 넣고 다니는 건 팩소주가 아니라 네모난 관광용 소주였다. 몸빼 바지 안에는 마치 적진을 향해 침투하는 코만도의 탄창처럼,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자살폭탄 공격자처럼, 네모난 관광소주 병이 허리춤에 쫙 둘러져 있어서 도대체 몇 개인지도 모를만큼 끝없이 나왔다. 저 무거운 걸 허리춤에 발목에 가득 숨기고 가파른 야구장 계단을 오르내리다니, 초인적 체력이 아닐 수 없다.


90년 진로 팩소주 출시 당시의 신문 광고


야구장에서 담배 피고 소주 마시며 게임을 관전하는 그 맛을 아는가! 지금은 택도 없는 소리지만 야구장 관람석에서 흡연이 금지된 것이 의외로 그다지 오래된 일이 아니다. 특히 위기를 맞아 조마조마 가슴을 졸일 때면 어김없이 야구장 전체에서 뭉게뭉게 담배연기가 피어오르곤 했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면 담배연기의 구름이 조명탑을 휘감고 올라가는 모습이 나름대로 아름다웠다. 저 멀리 전광판 위의 깃발의 펄럭임과 조명탑 아래 담배연기 흐르는 방향을 보면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어떻게 부는지 가늠해 보기도 쉬웠다. 특히 비가 흩뿌리거나 습한 날이면 담배 연기가 더 잘 보였고 내 눈엔 왜 그랬는지 몰라도 그게 참 로맨틱해 보였다.


물론 비흡연자들이 싫어한다는 점은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일부러 고개를 들고 하늘로 연기를 내뿜으려 노력을 하긴 했지만, 가끔은 나름 배려하는 마음으로 바깥 복도에 나가서 피우고 들어오기도 했지만, 흡연자의 입장에서 허용된 행위를 굳이 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여러 모로 즐거운 7월 초였다. 프로야구가 한국에서 시작된지 거의 십 년, 그러나 서울 팀이 우승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던 때였다. 82년 원년에 OB가 우승했지만 그 때 연고지는 대전이었고, 서울에 두 팀이나 있지만 항상 하위권을 맴돌았는데 시즌이 절반이나 지난 시점에서 우리 팀이 1위를 달리고 있다니!


게다가 라이벌 OB는 감독이 바뀌고서도 연패를 거듭, 하반기에 또다시 11연패를 기록하며 그야말로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들어갔다. 한 해 두 번의 11연패라는 깨지기 힘든 기록을 세워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LG 팬으로서는 참 고소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그렇게 세상은 장미빛이었다. 빙그레 이글스와의 대전 4연전이 닥쳐오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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