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대반격

1990 LG 트윈스 우승 스토리 5

by 에덴의아래

(2013년에 쓴 글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5) 6월 대반격


개말 두달 후 꼴찌로 순위가 떨어지긴 했지만 빛나는 순간이 없던 바는 아니었다. 우선 유격수 김재박이 포수 마스크를 썼던 유명한 경기가 있다. 신인 문선재가 포수를 보았던 2013년 경기와 비슷한 상황이 23년 전 잠실에서 일어났다.


겨우 6연패를 마감한 후 2연승을 거두며 분위기가 고조되던 5월 9일, LG는 잠실에서 OB를 만났다. 1-1로 팽팽하던 경기는 선발 김건우가 6회에 3실점, 1-4로 끌려가게 된다. 7회 1사 3루에서 내야땅볼로 한 점을 만회하긴 했지만 여전히 두 점을 뒤진 채 9회초 공격을 맞았다. 그날은 OB의 홈게임이었다.


노찬엽과 이광은이 힘없이 물러나고 2사 주자 없는 상황. 다음 타석은 방망이가 약하기로 소문난 포수 심재원. 더 남아 있는 포수는 없었으나 백인천 감독은 밑져야 본전이기에 대타 유지홍을 냈는데 안타가 나왔다. 이어 나온 8번 김동재마저 안타.


일어서서 집으로 향하던 관중들은 모두 복도에 멈춰섰다. 9번타자는 1할대에 허덕이던 민경삼이었지만 여기서 다시 대타 양승관 기용. 결과는 볼넷. 순식간에 2사 만루가 되었다. 타석엔 1번타자 김재박.


김재박은 불세출의 유격수지만 이미 나이는 만 35세로 팀의 신참코치인 김용달 코치보다 두 살이 많았다. 시즌 초반엔 팀의 1번타자를 맡았는데 유격수와 1번타자를 병행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특히 노장선수에겐 더 그랬을 것이다. 사실 89년까지 김재박은 1번타자, 유격수, 그리고 후배들을 지도하는 플레잉코치의 역할을 맡았다. 수비 시엔 수비 사인을 내는 역할도 주어졌으니 1인 4역을 수행한 셈이었다.


백인천 감독 부임 후 코치 역할에서는 해제를 시키며 본인 야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지만 여전히 1인 3역을 소화해야 했고 시존 개막 이후 타율은 점점 눈에 띄게 떨어져갔다. 2할 언저리까지 떨어진 그의 방망이는 5월 LG 부진의 한 원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타석에 나온 김재박은 극적인 2루타를 터뜨렸다. 3루 주자와 2루주자는 득점, 1루주자 양승관은 전력질주를 했지만 홈에서 아웃되고 말았다. 역전은 무산되었으나 동점. 경기는 9회말로 넘어갔다.


어정쩡하게 통로에 서 있던 관중들은 박수를 치며 다시 관중석으로 내려갔다.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당시는 극소수 지정석을 빼면 내외야 아무데나 앉으면 되던 때라 먼저 앉는 사람이 임자였다. 덕분에 한바탕 관중 재배치가 일어났다.


LG 덕아웃에서도 잠시 회의가 열렸다. 포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선발이었던 김동수는 8회말 수비에서 파울 타구에 맞아 교체되었고 또다른 포수 서효인은 8회초에 대타로 이미 소진한 상황이었다. 벤치의 결론은 김재박이 포수 마스크를 쓰고, 유격수엔 나웅, 양승관 대타로 사라진 3루수엔 지명타자 이광은을 넣는 것이었다. 투수엔 정삼흠이 부랴부랴 올라왔다.



25196F3F51CA7B692F.jpg 포수 장비를 착용한 김재박



포수 때문에 변화구를 마음대로 던질 수 없던 정삼흠은 첫타자 박노준을 다행히 유격수 땅볼로 처리했지만 신경식에게 안타를 맞았다. OB 관중석에서는 1루 주자 뛰라고 난리가 났다. 하지만 타자는 3루 파울 플라이(교체되어 새로 들어온 유격수와 3루수에게 차례로 공이 갔으니, 야구 격언이라는 게 정말 신기하기도 하다).


2사가 되자 평소 거의 도루를 하지 않던 신경식은 2루를 향해 뛰었다. 포수 김재박이 2루 송구를 했지만 결과는 여유있는 세이프. 고의사구로 1루를 채운 후 나온 김형석이 끝내기 안타를 터뜨리는 바람에 경기는 5-4 OB의 승리로 끝났다.


게임은 졌지만 돌아가는 관중들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꼴찌 팀들끼리 막상막하라며 자조적으로 웃는 사람도, 김동수만 교체되지 않았더라도 하며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다들 진귀한 구경을 했다며 즐거워했다. 23년이 지난 2013년까지도 그날의 일이 전설처럼 이야기되리라고, 심지어 도루하는 신경식을 김재박이 2루에서 잡았다는 허구까지 윤색되어 회자되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김건우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겠다. 한때 김건우는 MBC 청룡의 한 줄기 빛이자 희망이자 미래였다. 80년대 청룡은 그 어느 구단 못지 않은 호화 멤버를 자랑했고 ‘감독이 아무 일만 안 하면 최소 3위는 간다’고 했던 팀이었지만 유일한 약점이 투수진이었다. 그때 혜성과 같이 나타난 선수가 바로 김건우였다.


86년 초, 신인이었던 김건우는 전지훈련지에서 방망이를 모두 부러뜨리고는 할 일이 없어 (놀고 있으면 욕을 먹으니) 투수들 틈에 끼어 롱토스를 하다 일본인 코치 눈에 띄어 느닷없이 투수로 전향했다. 시즌 개막 불과 한달 전이었다. 물론 아마 때 한국 최초 국제 대회 노히트노런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한 투수이긴 했지만 팔꿈치 부상 경력 때문에 입단 시 포지션은 내야수였다. 고2때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한 뛰어난 타자이기도 했고.


그렇게 얼떨결에 등판한 첫 경기, 청보 핀토스와의 86년 4월 3일 경기에서 그는 1안타 완봉승을 거둔다. 7회 김정수 선수에게 맞은 안타만 아니었으면 노히트노런을 할 뻔했다. 같은 해 4월 30일에도 이번엔 빙그레를 상대해서 1안타 완봉승을 또 거두었다. 역시 유일한 안타는 7회에 맞은 것이었다. 그렇게 일 년 동안 김건우는 18승 6패, 1.81의 평균자책점으로 신인왕을 따냈다. 묵직한 몸쪽 직구로 방망이를 부러뜨리거나 내야 땅볼을 유도해내는 게 트레이드 마크인, 청룡 최고의 강속구 투수였다. 당시 야구계에선 선동열에 도전할 유일한 재목이라고들 했다.


2462F64651BD981B1E.jpg 김건우


널리 알려진 얘기지만 그는 87년 9월, 횡단보도를 건너다 뺑소니 트럭에 치여 두 팔을 비롯한 온몸의 뼈가 부러지고 넉 달간 병원에 입원하는 중상을 입고 만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김건우 교통사고 소식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던 다음날 아침의 신문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고등학교 때 우리집은 동네 신문 배급소의 프로모션 덕분에 매일 일간스포츠를 받아보았다). 결혼을 앞둔 여자친구와 함께 사고를 당했는데 여자친구는 그만 사망하고 김건우 선수만 살아남았다는 헛소문마저 청룡 팬들 사이에 퍼지며 비극의 색채를 더하기도 했다. (물론 잘못된 정보였고 여자친구는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으며 후일 두 사람은 결혼했다. 참고로 그녀는 정삼흠의 사촌 여동생이다.)


에이스를 잃은 MBC 청룡은 그 해 성적이 곤두박질치며 후기리그 플레이오프 경쟁에서 탈락했다.


김건우는 2년간의 재활을 거쳐 89년 기적의 복귀를 했지만 구위가 예전같지 않았다. ‘90 시즌엔 3월 중순 방위복무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했지만, 예의 그 멋있는 강속구는 사라지고 변화구로 맞춰잡는 투수로 변신해 있었다. 선수 본인도 그랬겠지만 팬들도 몸이 회복되는 과정이라 믿으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던 시절이었다.


김건우가 등판하는 날은 항상 마음이 설렜다. OB에 불사조 박철순이 있었다면 LG엔 김건우가 있었다. 어릴 때 친구는 나이가 들어서도 늘 어린 시절의 얼굴이 겹쳐 보이듯, 김건우의 그저 그런 공들이 팬들에겐 시속 5km 정도씩은 빨라 보였다. ’영원한 신인왕‘이라는 그의 애칭 속엔 청룡 팬들의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성적이 신통치 않아도 김건우는 늘 큰 박수를 받았다. 이후에 결국 투수를 포기하고 타자로 전향할 것임을, 타자로 전향 후에도 귀신이라도 씌인 것 같은 부상을 계속 겪으며 이른 나이에 은퇴할 것임을, 은퇴 후 4년이 지난 97년 2군 코치로 있다가 갑자기 구속이 회복되어 선수로 복귀할 것임을, 그리고 팬들의 눈시울을 적시며 패전처리로 등판해서 몇 경기를 던지며 영원한 승리자로 기억에 남을 것임을, 90년 그 때 알았더라면 우리는 관중석에서 더 큰 응원을 보냈을 것이다.


97년 가을 시즌 막판, 패전처리 투수의 이름을 연호하던, 무작정 “김건우 김건우”를 외쳐대던 관중들의 그 소리가 나는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다 진 경기에 올라오던 김건우와 그 김건우를 연호하던 팬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붉어져 온다.




5월 말부터 조금씩 반전의 계기가 마련되기 시작했다. 5월 20일, 김태원이 생애 첫 완봉승을 기록한 것부터 언급해야겠다.


김태원은 86년 김건우와 입단 동기이다. 당시 OB와 MBC 청룡은 매년 서울지역 신인지명 우선순위를 추첨으로 정했는데, 500원 동전이 나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는지는 몰라도 500원 짜리를 던져 지명 순서를 정했다. 어쨌든 86년은 OB가 승리하여 박노준을 지명했고, 청룡은 김건우와 김태원을 지명했다. (OB가 1번, MBC가 2,3번, OB가 4번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김태원은 강렬한 직구의 소유자로, 제구가 안정적이지 못한데다 그 직구를 받쳐줄 변화구가 부족하여 입단 후 성적이 시원찮았다. 입단 5년차를 맞는 '90 시즌 개막전까지 그의 통산 성적은 4승 11패 3세이브. 늘 게임 초반엔 잘 던지다가도 승리투수 요건이 갖춰지는 5회만 되면 우수수 무너지는 탓에 ‘5이닝 투수’라는 별명으로 유명하기도 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포텐’을 터뜨리지 못하는 대표적인 선수였다.



또 하나 가수 이문세와 닮은 외모로도 유명했는데, 무표정할 땐 좀 닮았는지 몰라도 웃는 표정은 꽤 많이 달랐던 것 같다 (후일 이문세와 쇼 프로그램에 동시에 출연한 적도 있다). 체형도 나름 특이했는데, 당시 해설자들이 김태원이 등판할 때마다 ‘엉덩이가 펑퍼짐하다’고 하도 강조를 해서 나는 그의 엉덩이가 아직도 기억난다. “겨울에 체력 훈련을 열심히 했다는 증거입니다, 투수는 하체가 중요합니다”라는 취지였는데, 어쨌거나 이십년 넘게 지나서도 내가 기억하는 남자 엉덩이는 아마 김태원이 유일할 것이다.


‘5이닝 투수’ 김태원의 ‘90 시즌 초만 보더라도 4월 10일 태평양과의 잠실개막전, 5회까지 노히트노런으로 막으며 4-0으로 이기고 있다가 6회 5연속안타를 맞으며 4-4 동점을 허용하고 마운드에서 내려갔으며, 4월 17일 OB와의 경기에서는 4-1로 앞서던 5회초, 제구력이 흔들리며 연속 볼넷으로 만루를 만들어주는 바람에 이닝을 마치지 못하고 97구를 던진 끝에 김건우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정말 5, 6회만 되면 귀신같이 흔들리며 점수를 주는데 팬 입장에선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그런데 5월 20일 삼성과의 대구 경기에서는 그간의 양상과는 반대로 초반 2,3,4회 위기를 잘 넘기더니 중반 이후 호투, 완봉승을 이끌어낸 것이다. 135구 7안타 3사사구 2삼진의 호투였다. 2패 후 첫 승을 그렇게 완봉으로 장식한 김태원은 이후 거칠 것이 없었다. 김건우 만큼의 다이나믹한 투구는 아니었지만 승수를 쌓아가는 속도는 김건우만큼이나 센세이셔널했다.


백인천 감독도 팀을 다잡기 위한 칼을 빼들었다. 5월 19일 대구 삼성전에서 투수 최일언을 “대충 던졌다”는 이유로 2군으로 강등시킨데 이어서, 22일 롯데전에서 1-1 동점 상황인 4회말 김상훈이 적시타 때 서서 들어오다 홈에서 아웃 당하자 대노, “정신상태가 썩어빠졌다”는 코멘트와 함께 2군으로 내려보냈다. 후일 백인천 감독의 용병술과 정신무장이 칭송을 받게 되지만 당시엔 ‘미스터 청룡', 혹은 ’미스터 LG'라고 불리던 팀의 간판타자를 경기 태도를 이유로 2군으로 내려보낸 데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다.


그 때문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다음날 잠실 삼성전에서 극적인 승부가 연출되었다. 삼성 성준에 눌려 7회까지 3안타 무득점의 빈공을 펼치며 0-3으로 끌려가던 8회 2사 1,3루, 노찬엽의 트레이드마크 중월 3루타가 터지며 2점을 추격했다. 그리고 2-3에서 맞은 9회말, 볼넷 3개로 얻은 2사 만루에 삼성 투수는 바뀐 유명선. 이번에도 타석에 김재박이 들어와 끝내기 2타점 우전안타를 쳐냈다. 9회말 2아웃에 터진 2타점 역전 적시타였다.


5월말 현재 성적은 최하위였지만 내용적으로는 시즌 초와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이광은 신언호 노찬엽 등 부상 선수들이 돌아와 베스트 전력이 갖춰졌고, 슬럼프에 빠졌던 김재박도 감을 회복하여 차츰 타율을 끌어올렸다. 주전이 애매하던 3루엔 나웅이 고정되었고, 우익수는 상대 투수에 따라 신언호와 최훈재의 플래툰이 갖춰졌다. 2군에 내려간 김상훈 대신 1루는 이광은이 임시로 맡았고, 합류가 늦었던 박흥식도 본격적으로 주전 중견수로 나오기 시작했다.


6월 2일, 잠실 태평양 전, 문병권이 1피안타 1대 0 완봉승을 거두었다. 이날의 빛나는 투구를 기점으로 문병권은 서서히 신데렐라로 떠오른다. 이날 경기는 한국 프로야구 한 경기 최소투구 기록이었는데 완봉을 한 문병권이 불과 87구, 태평양이 91구만 던지고 (박상범 90구, 양상문 1구) 1시간 42분만에 경기가 끝났다.


토요일 오후 2시에 시작한 경기가 오후 3시 42분에 끝났으니, 늦게 도착한 사람은 꽤 허탈했을 것이다. 경기의 유일한 한 점조차 1회말 LG 공격 때 났으니 말이다. 문병권은 본인이 허용한 유일한 안타를 2회 1사에서 맞은 이후 9회 1사 몸에 맞는 볼을 줄 때까지 20타자 연속 아웃을 시켰다. 마지막 '위기'였던 9회초 1사 1루에선 김일권의 잘 맞은 타구가 1루 직선타로 연결되어 더블아웃 처리되며 경기가 끝났다.


다음날인 일요일 태평양에게 0-5 완봉의 복수를 당하며 시즌 14승 22패.


내부적으로는 변화의 조짐이 조금 있다 해도 성적은 여전히 최하위. 김태원 문병권은 결국 그 시즌에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며 팀에 기여하지만 그걸 예상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겠는가. 시즌 초 백인천 감독에게 걸었던 팬들의 기대가 실망으로 변해가며 노골적인 안티 백인천 세력도 나타났다. 일부 선수들의 가차없는 2군행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 잠실에서는 경기 중 대놓고 김동엽 감독을 연호하기도 했고, 백인천 감독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욕을 퍼붓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현장에 있질 않아 정확하게는 모르겠으나 분노한 팬들에게 둘러싸여 청문회를 당했다는 이야기도 들은 것 같다.


그 어수선한 가운데, 기적의 6월이 시작되었다.


6월 5일 광주 해태 전 더블헤더가 시발점이었다. 그 때까지 LG는 해태에게 시즌 4전 전패, 전년도부터 따지면 8연패를 기록중이었다. 더블헤더 1차전에서 백인천 감독은 한명수, 김종철 등 무명투수로 1회를 때운 후 2회부터 정삼흠을 등판시켰고 LG는 18안타를 몰아치며 12-9 승리를 이끌었다. 이어진 2차전, 해태 선발투수 강태원을 상대로 5회 11타자가 나와 6득점을 올리며 또다시 9-4로 승리했다. 지난 번 강등 이후 처음으로 1군에 복귀한 김상훈은 두 경기에서 10타수 4안타 2타점 3득점으로 활약했다.


다음날인 6월 6일 현충일, 문병권이 나와 해태 타선을 산발 10안타 2실점으로 막고 8-2 완투승을 거두며 해태와의 원정 3연전 스윕을 완성한다.

이날 경기를 마친 문병권은 4승 1패를 기록하게 되었는데 4승이 모두 완투승이었다. 이광은이 전날에 이어 연속경기 홈런을 기록했고, 6회엔 한 이닝에 더블스틸 두 개를 기록하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루주자 나웅이 2루가는 사이 3루주자 김동수가 홈스틸, 김동재의 볼넷 이후 2루주자 나웅과 1루주자 김동재가 또다시 더블스틸.)


다음날 6월 7일 롯데와의 마산 경기. 이국성, 김용수가 이어던지며 롯데를 2-1로 제압, 4연승을 거둔다. 이날 경기는 관중 때문에 세 차례 중단되는 소동을 겪었다. 4회에 외야 관중이 한명 들어왔고, 5회엔 외야에 관중 십여명이 펜스 위에 걸터앉아서 경기를 방해했으며, 승부가 기운 9회에 또다시 이삼십명이 경기장으로 난입하였고, 관중과 경찰이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


롯데는 이날 10안타를 치면서도 찬스마다 무산시키는 '변비야구'로 1점밖에 내지 못했는데, 딱히 이 경기가 문제였다기보다는 5월 말 이후 투수진 붕괴로 급격한 하락세를 겪는 롯데의 답답한 경기력에 불만을 품은 행동이었을 것이다. 경기 후에 일부 관중이 스탠드에 불을 지르는 소동 끝에 결국 전경이 출동하고 최루탄까지 쏘고 나서야 소동은 끝났다.


최근엔 경기장도 달라지고 팬들도 달라졌지만 그 당시 마산은 소위 골치덩어리였다. 경기만 했다 하면 관중 소요 사태가 일어났고, 경기장 상태도 안 좋아 불규칙 바운드가 잦은데다 심지어 전광판의 선수 명단은 칠판에 분필로 써서 게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경기 중간에 선수가 교체되거나 포지션이 바뀌면 분필로 다시 쓸 수가 없어 관중들로선 누가 누군지 알 수도 없었다. 원정 팀은 물론이고 롯데마저 마산 경기를 부담스러워한다고들 했다.


이틀간 우천 취소 후 열린 6월 10일 잠실 삼성전도 ‘90 시즌의 명승부 중 하나였다. 4연승의 LG, 8연승 행진 중인 삼성이 맞붙은 경기. LG 선발 투수는 문병권이었다.


서로 찬스를 무산시키며 경기는 1-1 동점으로 흘러갔고, 중반 이후엔 삼성 투수 김상엽에 눌려 LG 쪽에 이렇다할 찬스도 오지 않았다. 결국 1-1 상태에서 연장에 돌입. 10회초 삼성은 볼넷 두개로 만든 2사 1,2루에서 포수 박정환의 2루타로 2점을 득점했다. 스코어는 1 대 3.


경기가 끝났다고 생각하던 10회말, LG는 기적같이 회생했다. 선두 1번타자 윤덕규가 안타를 치고 나간 후 김재박의 단타성 타구가 중견수를 지나 빠지며 투런 그라운드 홈런이 된 것이다. 순식간에 3 대 3 동점. 이어 김상훈의 안타가 터지자 삼성은 김성길로 투수를 바꾸었다. 희생번트, 외야플라이, 이어진 볼넷 두 개로 2사 만루가 된 상황. 여기서 또다시 볼넷이 나오며 밀어내기로 경기는 끝이 났다. 4대 3 끝내기 승리. 문병권은 10회까지 완투하며 무려 5연속 완투승을 거두는 기염을 토한다.


문병권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거의 10년 전인 81년 그 유명한 황금사자기 결승전, 박노준의 발목이 부러졌던 바로 그 경기의 경북고 승리 투수가 바로 문병권이었고, 나름 잘생긴 외모 덕분에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팬도 많았지만 프로 입단 후엔 큰 활약을 하지 못하던 선수였다. 90년에도 처음 네 경기는 진 경기에 패전처리로 (요즘엔 추격조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등판하다 5월 19일 시즌 두번째 선발등판한 삼성전부터 완투승을 무려 연속 5번이나 거듭하는 놀라운 투구를 보였던 것이다.


문병권은 각 매체의 주간 MVP를 휩쓸었다. 한 주간 두 번의 완투승을 거두며 팀의 상승세를 주도한 덕분이었다. (참고로 당시 스포츠서울은 프로야구 주간MVP로 선정된 선수에게 부상으로 '정철외국어회화 카세트(영어 일어 중 택일)'를 주었다.)


이어진 6월 11일 월요일 잠실 삼성 전. 전날과 비슷하게 2대 2로 팽팽하게 맞서던 8회말. LG는 집중 6안타를 터뜨리며 순식간에 6득점. 8-2로 스코어를 벌리며 승리했다. 6연승.


6월 12일은 태평양을 상대로 김신부가 선발등판했다. 그 역시 백인천감독에 의해 2군에서 “정신교육”을 받고 1개월여만에 다시 등판하는 날이었다. 그리고 7이닝동안 2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하며 2대 0 승리를 따냈다. 7번타자 포수 김동수가 3타수 3안타 2타점으로 활약했고, 정삼흠이 8회부터 등판하여 첫 세이브를 따냈다. 7연승.


6월 13일. 2회 2사 만루에서 김상훈의 싹쓸이 2루타가 터지며 태평양에게 또다시 5-2 승리를 거두었다. 파죽의 8연승. “신바람 야구”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정삼흠은 역시 막판 구원등판하여 2세이브째를 챙겼다. 3일 연속 구원등판에 1승 2세이브를 기록하게 된 것이다. 백인천 감독의 ‘신의 한 수’라고 불렸던 정삼흠-김용수의 보직 맞바꾸기가 이 때를 기점으로 가동된 셈이다.


22승 22패. 승패 차이 -8까지 떨어지며 최하위를 전전하던 LG는 기적과도 같은 8연승을 거두며 5할에 복귀했다. 투수 쪽에서는 유망주로만 머물러 있던 문병권 김태원의 포텐셜이 드디어 터졌고 뒷문이 강해졌으며, 타격에서는 윤덕규 박흥식 김상훈 최훈재 김영직 등 막강한 좌타라인이 상승세의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어진 한 주는 신인 포수 김동수가 스타로 등극하는 일주일이었다.


김용수 김동수.png 김용수 김동수 배터리. 사진은 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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