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 LG 트윈스 우승 스토리 4
(2013년에 쓴 글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그 해 봄엔 유난히 비가 잦았다. 새로운 90년대가 열렸고 나에게도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지만 계속 내리는 비와 함께 세상이 그다지 밝지는 않았다.
90년 1월에 3당 합당이 발표되었다.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이 연합해서 새로운 정당을 만들겠다는 발표가 있었고 이어 3월에 민자당이 창당되었다. 김대중의 평민당을 소수 야당으로 남겨놓은 채 거대 집권세력이 만들어진 것이다. 누군가에게 이것은 대통령이 되기 위한 승부수였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권력을 공고하게 만들기 위한 결단이었겠지만, 3당 합당은 단순한 정치 게임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사회적 의식이 있노라고 자평하는 사람이 이전엔 대놓고 군사정권을 지지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마음 놓고 보수 성향이나 지역 차별을 드러낼 수 있는 멍석이 깔린 것이었다. 그 반면 대학가에선 아직 80년 광주가 해결되지 않았고 그에 따른 반미의식이 확고했다. 대규모 시위는 아직 없었지만 91년 봄 강경대 유서 대필 조작사건에 따른 큰 시위가 있었듯 긴장 속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다.
대학과 지식층이 80년대 민중 운동의 연장선에서 새로운 시대를 해석하려 애쓰고 있을 때, 그와는 전혀 다른 문화가 나타났다. 아직 이용자 2,000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전화선을 이용한 피씨 통신이 시작된 것이 89년~90년 경의 일이었고, 아직은 미미했지만 얼터너티브 락의 움직임도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소개되어 거대 담론에서의 탈피 움직임이 시작되는가 하면, ‘야타족’ ‘오렌지족’으로 일컬어지는 소위 ‘퇴폐 젊은이 문화’ 문제도 공론화되었다.
야타족이란 좋은 차를 몰고 다니며 여자들을 꼬시고 다니는 젊은 층으로 지금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그게 뭐 그리 큰 문제인가 싶기는 한데, 아마도 이전에 없던 사회 양극화 문제의 시발점이었기에 주목을 받았을 듯싶다.
그 해 봄엔 김완선의 ‘람바다’가 인기를 끌었다. 전세계가 람바다 열풍이었다. 방송에는 순화된 버젼이 나왔지만 원래 람바다 춤의 백미는 여자의 두 다리 사이에 남자 허벅지를 끼우고 남녀가 움직이는 파격적인 동작이다. 당시 신문에 소개된 람바다 춤의 특징은 이렇다.
‘람바다’춤은 남성 파트너의 한쪽 허벅지에 두 다리를 벌린 여성파트너가 기마자세로 걸터앉은 채 좌우 또는 앞뒤로 투스텝을 밟는다. 춤의 매력은 여성의 두 다리 사이에 남성의 한쪽 허벅지가 걸치며 여성의 움직임이 적극적이어서 마치 어미말의 젖을 문 채 쫓아가는 망아지를 연상케 한다는 것. (90.4.6. 경향신문)
"망아지가 어미말의 젖을 문 채 쫓아가는" 광경을 한 번도 보지 못한 나로서는 기사를 보아도 잘 연상은 되지 않지만, 어쨌거나 내 생각에 80년대 민중문화와 새로운 국제화, 두 가지 흐름을 재미있게 보여주는 것이 당시 LG-OB 응원전이 아니었나 싶다.
LG는 타자 등장 음악도 미국식으로 바꾸고 경기 개시 음악도 세련된 전자음악을 선보인 반면, OB는 하얀 한복을 입은 응원단장이 나왔다. 야구장 반대쪽 멀리서 OB 응원을 보면 허연 한복 입은 사람이 양쪽으로 팔을 벌리고 그야말로 한국인 특유의 덩실덩실 몸동작으로 OB 응원을 주도했다.
90년엔 유난히 관중 소요사태도 많이 일어났다. 언론에선 질서의식 결여를 질타하고 심지어 대통령까지 나서서 엄단을 천명했지만, 나는 과도기를 맞은 보통 사람들의 열패감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잠실 구장에서 해태 팬들이 반복적으로 ‘깽판’을 칠 때 정말 열 받았고 욕도 많이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누구나 부자가 되고 행복할 수 있다는 성장시대의 신화가 현실과 충돌함에 따른 일종의 절박함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모든 현재는 과도기이다. 2013년이 과도기인 것처럼 1990년도 과도기였다. 그 과도기의 성격이 다를 뿐이다. 1990년의 히트곡이 하나 있다. 동물원의 ‘시청앞 지하철 역에서’이다.
그렇듯 더디던 시간이 우리를 스쳐 지난 지금
너는 두 아이의 엄마라며 엷은 미소를 지었지
나의 생활을 물었을 때 나는 허탈한 어깨짓으로
어딘가 있을 무언가를 아직 찾고 있다 했지.
그렇다. 그 때 우리는 모두 어딘가 있을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나는 친구들과 팀을 짜서 야구를 해본 정도가 있을 뿐 야구 선수 출신도 아니고, 야구에 대해 주워들은 지식은 이것저것 있으되 진정한 전문가도 아니었다. 야구장에 그토록 자주 가면서 가끔은 스스로 궁금하기도 했다. 대체 왜 나는 야구에 몰두하고 있는 것일까. 먹고 사는 문제와도 상관없고 현실과도 상관없는, 그냥 공놀이에 불과한 것에.
그 우문에 대한 스스로의 답은 늘 한결 같았다. 어딘가 있을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이라고. 음악판을 조금 기웃거리고, 야구장을 많이 드나들었지만, 그 대상이 우연히 야구였을 뿐 다른 무엇이라도 어차피 똑같지 않았을까.
어쨌든 90년 엘지의 선전과 함께 나는 어렴풋이나마, 어딘가 있을 무언가에 조금 가까이 다가간다고 느꼈다. 6개월 후 시즌 우승과 함께 그 느낌은 조금 더 명확해졌다.
이야기가 너무 멀리 새 버렸다. 그 해 봄엔 유난히 비가 잦았다. 야구장에 비가 조금씩 오는 것도 나름의 운치는 있다. 젖은 땅과 썰렁한 관중석. 이런 날에도 야구장에 와 있는 사람들끼리의 조금은 자조적인 동질감. 세상의 주류로부터 살짝 벗어난 듯한 소외감 속의 쾌감.
그러나 그것도 비가 어느 정도 올 때 이야기지, 억수같이 퍼부어서 경기 취소가 잦으면 그런 낭만도 있을 수가 없다. 특히 90 시즌에 바뀐 규칙에 위하면 주말에 우천 취소된 게임이 있으면 월요일에 경기를 하고, 주중 경기인 경우 다음날 더블헤더를 치렀다. 순연되는 게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조처였다. 그러니 각 팀마다 더블헤더가 굉장히 많았다. 6월 중순까지는 2연전, 6월 중순 이후엔 3연전을 했는데 특히 2연전 기간 동안 더블헤더가 많았다.
더블헤더가 많으면 결국 팀의 선수층이 얼마나 두터운가의 싸움이 된다. 그리고 부상선수가 많은 팀은 큰 손해를 본다. 그런 점에서 가장 어려웠던 세 팀은 태평양, 해태, 그리고 엘지였다.
태평양은 전 해인 89 시즌, 김성근 감독의 영도 아래 얇은 선수층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인 성적을 냈다. 90 시즌도 나름 선전하긴 했지만 결국 선수층 때문에 고전했다. 해태는 강력한 선발투수진과 선발 야수진을 갖췄지만 백업이 부족하고 스타 선수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나 심했다. 90년 전반기가 끝났을 때 해태는 27승을 거두었는데 그중 24승을 선동렬, 조계현, 이강철 세 명의 투수가 기록했다.
엘지는 앞서 말했듯 부상 선수가 많은데 하루에 두게임, 혹은 이틀에 세 게임을 치르려니 출혈이 심했다. 이광은, 김기범, 신언호가 부상이었고, 박흥식은 팀 합류가 늦었으며, 노찬엽마저 발목이 아파 한동안을 쉬었다. 시즌 초반이라 그런지 김동수, 이병훈 등 신인 선수들은 아직 제몫을 못했다.
그러니 한없는 추락을 거듭할 수밖에. 개막 2연전을 OB에게 내준 후 반짝 급반등, 5연승을 거두긴 했지만 곧 한계가 드러나고 말았다. 곧바로 6연패를 당하고 말았다. 특히 6연패 째를 당하던 5월 5일 어린이날 잠실 롯데전은 졸전의 극치였다.
스코어보드만 보면 9대 6으로 진, 평범한 게임이었던 듯 보인다. 문제는 이날 엘지가 무려 17 사사구를 내줬다는 것이다. 경기 기록을 찾아보면 그날의 답답함이 새록새록하다.
1회초 LG 수비. 볼넷 세 개로 허용한 2사 만루서 한영준에게 싹쓸이 2루타로 3실점. 3회초 수비. 안타와 볼넷 두 개로 초래한 2사 만루에서 몸에 맞는 볼로 밀어내기 실점. 5회초 수비. 몸에 맞는 볼, 내야안타, 번트, 내야땅볼(1실점)으로 만들어진 2사 3루상황에서 볼넷, 볼넷, 볼넷으로 밀어내기 추가실점. 8회초 안타 두 개와 볼넷 하나로 2사 만루에서 또 밀어내기 볼넷.
이날 엘지는 한 경기 팀 최다 사사구(17개), 팀 최다 볼넷(13개)이라는 KBO 기록을 세웠으며, 밀어내기 실점 3개를 허용했다. 롯데도 6 사사구를 허용하여 이날 총 23사사구가 난무, 역시 한경기 양팀 최다 사사구 KBO 기록을 세웠다.
한 경기 팀 최다 사사구 17개는 아직까지도 한국 프로야구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한 경기 23 사사구는 오늘날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투수별로 보면 이국성 4개, 김건우 3개, 김신부 4개, 문병권 3개, 김용수 3개의 사사구를 허용, 지리멸렬한 게임 끝에 6연패를 당했다.
다음날인 5월 6일, 드디어 박흥식이 시즌 첫 출장을 했고 김동수가 프로 데뷔 처음으로 선발 출전하였다. 정삼흠-윤학길의 투수전 끝에 2-1로 겨우 이기며 6연패에서 탈출했다. 그것도 8회초 실점 위기를 2루수 김동재의 다이빙캐치로 넘긴 후, 8회말에 1점을 추가해서 아슬아슬하게 이긴 것이었다.
그러나 승리는 잠깐. 5월 9일 OB전을 시작으로 또다시 7연패에 빠졌다. 5월 19일 삼성전 더블헤더 2차전에서 문병권의 완투승으로 겨우 이기며 7연패를 벗어났다.
4월과 5월 두 달이 지난 시점에서의 순위는 다음과 같았다.
서울 두 팀이 나란히 꼴찌를 달렸고, 특히 OB의 분위기가 흉흉했다. 5월 15일 OB 이광환 감독은 자율야구 포기를 선언했다. 5월 15일 당시 OB는 .219 팀타율 꼴찌, 4.65 팀 방어율 꼴찌, 최다 실책 30개의 3관왕을 달리던 중이었다.
OB 이광환 감독은 미국식 야구를 도입하는 것이 지론으로, ‘89 시즌 다른 팀은 아무도 안 하는 선발투수 예고제를 혼자만 모든 게임에 행한 감독이었다. ’90 시즌에도 선진 시스템을 도입한다며 노력했지만 결국 5월 중순을 기점으로 이를 포기하고 이례적인 시즌 중 합숙에 돌입했다. OB는 이후 반짝 5연승을 거두었지만 이내 끝없는 추락을 거듭, 결국 6월 중순 이광환 감독이 사퇴하고 만다.
시즌 초반 관중의 열기도 뜨거웠다. 시즌 전 예상치보다 무려 30% 이상 많은 관중이 들어왔다. '89 시즌은 모든 팀이 6,7천명 수준의 고른 관중 수를 기록했는데, '90 시즌엔 모든 팀의 평균 관중이 1,2천명 정도 늘었으며 특히 롯데와 LG의 관중이 폭발했다. 롯데는 무려 2만명이 넘는 평균 관중이 들었고 사직구장의 그 유명한 파도타기 전통이 시작된 게 바로 90년이었다. LG도 만오천명이 넘는 호황을 누리며 OB의 두 배 가까운 관중이 찾았다.
어두운 이면도 있었다. 경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빈병 깡통 등을 그라운드에 던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일부 열받은 관중이 집어치워라~ 하면서 그라운드에 병이나 깡통을 던지면 다른 관중들이 "하지마 하지마"를 연호하곤 했다. 아주 일상적인 풍경이어서 일주일에 최소 한두 번 정도는 본 것 같다.
앞자리에 앉아 있다가 난데없이 뒤통수에 뭔가를 맞는 일은 새로울 것도 없었다. 관중들은 자신의 던지기 솜씨를 과신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라운드로 던진다고 던지지만 채 관중석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즌 초인 4월 15일 부산 홈경기에서 롯데가 LG를 상대로 패색이 짙어지자 누군가 던진 빈병에 앞쪽에 앉아 있던 어린이가 얼굴을 맞았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4월 23일엔 롯데가 막판 역전을 허용하자 부산 관중들이 외야 스탠드 곳곳에 불을 질렀다.
5월 16일 대구. 2-0으로 지던 삼성이 9회말 이만수의 투런 홈런으로 극적인 동점을 만들었고 곧바로 롯데는 투수를 김종석으로 교체했다. 이후 주자가 또 나갔을 것이다. 아무튼 셋포지션을 취하던 김종석이 갑자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관중석에서 누군가 새총으로 쏜 10원짜리 동전에 머리를 맞은 것이다. 김종석은 곧바로 교체되었는데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다.
그 며칠 전에는 잠실에서 소동이 있었다. 일요일 LG-해태전을 맞아 구름관중이 몰렸다가 (90년대 최고의 흥행 카드가 바로 잠실 LG-해태 전이었다) 비로 취소되자 환불을 요구하는 관중과 못해주겠다는 구단 사이에서 엄청난 실랑이가 벌어진 것이다.
위에도 이야기했듯 취소된 경기는 다음날인 월요일 열릴 예정이었는데, 같은 표로 다음날 입장할 수 있다는 안내에도 불구하고 관중들은 평일날 어떻게 오느냐며 환불을 요구했고, 구단에선 다음날 오면 될 것 아니냐며 환불을 거부했다. 요즘 기준으로는 당연히 환불을 해 주어야 할 듯한데 당시는 그렇지 못했나보다. 점점 갈등이 고조되고 거칠어져 급기야 매표소 유리창이 깨졌고, 전경이 출동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만수가 관중석에 병을 되던진 그 유명한 사건도 90년 5월이었다. 경기는 삼성과 해태가 맞붙은 대구 경기. 4-8로 삼성이 뒤지고 있던 7회말 1사 1,2루에서 이만수가 등장했다. 경기 후반 역전극을 학수고대하던 팬들의 바램과 달리 결과는 투수 앞 병살타로 이닝 종료. 그러자 실망한 누군가가 이만수에게 빈병을 던졌다.
날아오는 병을 보고 격분한 이만수가 이를 집어 홈팬 관중석을 향해 되던지며 사태는 크게 번졌다. 삼성이 즉각 이만수를 교체하였고, 경기 후 이만수가 정중히 사과를 하고 장내방송을 통해 이만수 선수 및 구단 사과, 이만수의 무기한 출전 정지를 알렸다.
하지만 한 번 흥분한 홈 관중들은 멈출 줄 몰랐다. “어린이들까지 합세해” 스탠드에 불을 지르고 빈병 등 오물을 계속 그라운드에 던져댔다. 결국 전경이 출동해 사상 최초로 야구장에 최루탄까지 쏜 후에야 사태는 진정되었다. 어린 애들까지 어른들 틈에 끼어 스탠드에 불을 지르며 뛰어다니는 모습이 기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는지 모든 언론에 빠지지 않고 이 모습이 거론되었다.
연패에 빠지면, 혹은 이해할 수 없는 투수 교체로 경기에 지면 관중들이 야구장 출입구에서 청문회를 요구해서 선수단이 락커룸이나 버스 안에 갇히는 일도 굉장히 많았다. '노련한' 선수들은 나름 잘 대처했지만 부산에서 신인 박동희가 멋모르고 혼자 밖에 나섰다가 성난 군중에 휩싸이기도 했다. 다행히 별 일은 없었고 이삼십분간 곰짝없이 둘러싸인 채 욕을 먹는 것으로 끝나긴 했지만.
경기가 마음에 안 들면 경기 중에 그물을 타넘는 건 그냥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것도 왜 그렇게 팬티 바람에들 올라가는지. 경기가 중단되고, 위험하니 내려오라는 안내방송이 나와도 꿋꿋하게 버티다 내려가는 아저씨들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마산이 가장 악명이 높았고, 부산 대구 인천도 만만치 않았다. 그때 사람들은 질서 의식이 없고 경기를 즐길 줄 모르고 공중 도덕이 없었다며 혀를 끌끌 찰 수도 있겠는데, 굳이 좋은 표현을 동원하면 그만큼 야구장이 뜨거웠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시즌 첫 두달이 지나갔다. 빙그레와 함께 2강으로 꼽혔던 해태의 부진, 태평양의 선전 정도가 특이점이었는데 아직 시즌 초반이라 변수가 많았다. LG는 전년도보다 관중이 두 배 가까이 폭증했음에도 하위권을 전전하였고, 6연패와 7연패를 거듭하는 백인천 감독에 실망한 팬들은 3년 전 감독이었던 ‘김동엽’을 관중석에서 연호하기도 했다.
그리고 시작된 6월, 일년 중 가장 큰 이벤트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이 개막하였다. 이회택 감독과 김주성 변병주 등이 이끄는 축구 대표팀과 월드컵 16강 이야기로 언론이 도배될 동안 당연하지만 야구장의 관중 수는 폭락하였다.
MBC 청룡에서 LG 트윈스로 바뀌어도, 감독이 또 한번 바뀌어도 늘 항상 똑같구나, 축구나 봐야겠다, 라고 생각했다. LG 팬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LG의 기적 같은 6월 대반격은 그 월드컵 열기 속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