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준비 : 투수력 보강?

1990 LG 트윈스 우승 스토리 2

by 에덴의아래

(2013년에 쓴 글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2) 시즌 준비 : 투수력 보강을 위하여


90년대가 열렸다. 앞자리 숫자가 바뀌었으니 희망과 기대의 분위기가 되어야 했지만 새해 벽두는 어수선하기만 했다. 89년 12월 말일까지로 기한이 정해진 5공 청문회가 흐지부지 끝나 버렸던 것이다. 새해 첫날인 1월 1일, 모든 신문의 1면은 희망찬 새로운 10년에 대한 기대는커녕 대문짝만한 전두환 사진으로 도배되었다. 광주 발포 책임자는 없고, 비자금은 민정당에 준 것 빼고는 없고, 언론사 통폐합도 정당했고, 모든 게 법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그는 주장했다. 전두환 7년을 여야 합의로 청산하고 새로운 90년대를 맞겠다는 정치 일정은 역시나 헛된 시도로 끝났다.


87년 6월 민주화항쟁과 이어진 노태우 집권 이후로 학생, 노동자의 시위가 광범위할 때였다. 요즘엔 구호를 외칠 때 주먹쥔 손을 올렸다가 내린다. 하지만 그 때는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가 위로 올릴 땐 손을 펴고, 다시 내리면서 주먹을 쥐는 형식이 보편적이었다. 시위하는 그 사람들이 야구장 안에서 야구 관객이 되는 것일 뿐 다른 사람들이 아니었으니 자연스레 야구장에서도 손을 폈다 오므렸다 하며 선수 이름과 팀 이름을 외쳤다. 돌이켜보면 여기에 묘한 아이러니가 있다. 밖에서는 민주화와 노동자 단결을 외치다가 야구장에 들어오면 똑같은 몸짓으로 구단 이름, 그러니까 재벌 회사 이름을 외쳤으니 말이다.


90년 벽두, 극장엔 이런 영화가 걸려 있었다


이 영화도 이 때였다....


LG 트윈스 역시 팀 매각에 따른 어수선한 연말 연시를 보냈다. MBC 청룡의 마지막 신인 지명이 11월에 있었고 여기서는 1차지명 두 명으로 한양대 포수 김동수, 고려대 외야수 이병훈이 지명되었다. 2차지명 명단에는 김선진이 들어 있었다. 곧 구단 매각 합의 사실이 보도되었지만 지명된 선수들은 신인 연봉 계약을 MBC 청룡과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매각 절차가 마무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선수와 코칭스태프가 그대로 인수된다는 합의는 있었지만 선수들 입장에서는 나름 복잡한 심경이었을 듯도 하다.


대형 트레이드도 곧 발표되었다. OB의 노장 투수 최일언과 청룡의 거포 내야수 김상호를 맞바꾸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투수력은 중위권이지만 물방망이로 유명했던 OB (‘89 팀타율 .247로 최하위), 타력은 그럭저럭이었지만 항상 투수가 문제였던 청룡(’89 팀방어율 4.27로 삼성에 이어 끝에서 두번째) 양 측의 필요가 맞아떨어진 트레이드였다.


최일언은 86년 19승 4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1.58로 다승 2위, 방어율 3위, 탈삼진 7위를 기록하여 커리어하이를 찍은 재일동포 출신 투수였다. 그해 무려 6번의 완봉승을 거두었다. 이후 하락세에 접어들어 매년 6-7승 정도를 기록하고 있었다.


김상호는 청룡의 차세대 오른손 호타준족형 내야수로 이광은의 후계자로 꼽히던 선수였다. 88년 입단 이후 2년 동안 20홈런 23도루를 기록했는데 뭣모르는 어린 내 눈에는 펀치력과 주력은 있지만 상당히 몸이 뻣뻣해 보였다. 데뷔 해 14실책, 89년 23실책이 보여주듯 전형적인 공격형 3루수였다.


내리막길을 걷는 고참 투수와 한참 뻗어나가는 오른손 거포의 맞트레이드, 당시 청룡의 팬들은 상당히 밑진다는 기분이었던 것 같다. 아닌게 아니라 최일언은 90년 한 해 LG에서 뛴 후 팀을 떠나지만 김상호는 이후 꾸준히 OB의 간판 타자로 활약한다. 특히 95년 25홈런 101타점으로 홈런왕, 타점왕에 올랐고, 이 해 정규리그 MVP를 차지하였으며, 무려 8개의 실책을 범했음에도 외야수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OB의 두 번째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 잠실을 홈구장으로 쓰며 홈런왕에 오른 선수는 김상호가 최초였고, 그 이후 아직까지도 98년 우즈가 유일하다.


이외에도 LG는 사이드암 투수 이길환과 태평양 돌핀스의 재일동포 투수 김신부를 맞트레이드했다. 80년대 청룡의 마당쇠였던 이길환은, 이종도의 만루홈런으로 유명한 82년 한국프로야구 개막전 MBC-삼성 게임의 청룡 선발투수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5년 여 전 작고했다. 그와 트레이드 되어 합류한 김신부는 한국에서 활동한 5년동안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86년의 한 경기는 아직까지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청보 핀토스 (삼미 슈퍼스타즈 - 청보 핀토스 - 태평양 돌핀스가 80년대 인천 팀의 이름이다) 투수 시절, 해태 차동철 투수와 맞붙어 연장 15회 0-0 완투 무승부라는 진기록을 세운 것이다. 두 투수가 모두 연장 15회까지 완투하고 단 한 점도 내주지 않은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공교롭게도 그 때 김신부와 맞붙었던 상대 투수 차동철도 같은 시기 LG로 팀을 옮겼다. 차동철은 86년부터 88년까지 29승 4세이브를 기록하며 해태의 주력 투수로 활약했지만, 89년 이른바 ‘국가대표 3인방’인 이강철 조계현 이광우에 밀려 입지가 좁아진 상태였다. 물론 해태 타이거즈엔 두말할 필요없이 선동열도 버티고 있고 말이다. 그는 현금으로 트레이드되어 왔다.


한편 왕년의 청룡 에이스 오영일은 현금 트레이드로 태평양 돌핀스로 이적했다. 오영일은 하기룡과 함께 청룡의 초창기를 이끌었던, 장신의 오른손 정통파 투수였다. 83년 15승 14패 3세이브 (무려 14완투)가 그의 커리어하이였으며, 한 시대를 풍미한 투수였지만 이미 80년대 막판엔 완연한 하락세였다.


오영일은 키가 185cm로 당시로서는 찾아보기 힘든 거구의 장신 투수였다. 대학때 노히트노런을 기록했고, 김재박의 플라잉번트로 유명한 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 팀 멤버이기도 했다. 86년 해태와 경기에서 9점을 실점하고도 완투승을 거두었는데, 당시의 14-9 게임은 아직도 한 경기 최다실점 완투승 공식 기록으로 남아 있다.


오영일과 기억해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프로 입단 후 자신의 이름을 따서 501번으로 등번호를 해도 되냐고 질의하였는데, KBO에서 세자리수는 불가능하다는 답을 보내왔다 한다. 그래서 가운데 0자를 뺀 51번을 등번호로 달게 되었다. 어쨌거나 청룡 팬의 향수를 자극하는 선수 오영일은 ‘90 시즌을 앞두고 태평양 돌핀스로 옮겨 선수 생활의 말년을 보내게 된다.


2323D04D51B46B6F1A.jpg 오영일 투수. 훤칠한 키에 얼굴도 잘 생긴 선수여서 요즘 같았으면 유니폼 좀 팔았을 것이다. 등번호는 51번에서 몇년 후 18번으로 바뀌었다


오영일과 항상 이름이 같이 거론되는 ‘영원한 청룡의 에이스’ 하기룡은 자유계약 방출 후 코치로 다시 팀에 합류하였다. 하기룡 투수는 조금 늦게 태어나거나 아니면 프로야구가 조금 일찍 출범했으면 훨씬 좋은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조금은 안타까운 경우였다. 이광은, 신언호와 함께 배재고 동기동창 황금트리오라 칭해졌는데, 코치 발탁에는 친구들이자 아직 팀에서 현역으로 활동 중인 이광은 신언호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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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렇게 ‘90 시즌을 앞두고 다양한 투수력 보강이 이루어졌다. 시즌 전 전망에 의하면 선발에 정삼흠, 김태원, 최일언, 김기범, 중간계투로 차동철, 문병권, 김덕근, 마무리에 김용수를 기본으로 운영하고, ’88 신인왕 이용철, ‘86 신인왕이자 비운의 에이스 김건우 등이 5월 혹은 6월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청룡은 89시즌 172도루로 팀 도루 1위를 한 팀이었다. 김재박, 민경삼 등 발 빠른 타자들, 이광은, 김상훈 등 중장거리형 타자들, 박흥식, 노찬엽, 윤덕규, 김영직 등 3할 가능한 타자들에 대형신인 김동수까지 가세했으니 공격력은 그럭저럭 쓸만했다. 포수는 베테랑 심재원을 중심으로 박철영, 서효인, 신인 김동수까지 층이 두터웠다.


하지만 여전히 투수력에는 큰 물음표가 붙어 있었고, 그 덕분에 전체적인 전력은 중하위권으로 받아들여졌다. 대만 전지훈련 중 백인천 감독이 당초 “4강 목표”를 수정하여 “2강에 들 자신 있다”라고 선언하긴 했지만 정말 그렇게 인정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그렇게 시즌 개막이 다가왔다. 하지만 곧 연이어 터진 사고 때문에 분위기는 계속 뒤숭숭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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