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1990 LG 트윈스 우승 스토리 1

by 에덴의아래

(2013년에 쓴 글을 엮어 브런치북으로 올립니다. 글 쓴 시점을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1) 시작하며

(1) 연재를 시작하며

1990년 11월 18일 일요일. 겨울로 접어드는 문턱답게 날씨가 차가웠다. 어느 해보다도 뜨겁게 달아올랐던 여름, 그 여름을 추억하고 싶어 잠실을 채운 골수 팬들 앞에 차가운 늦가을 비가 흩뿌렸다. 꿈같던 1년을 마감하는 하루로는 어울리지 않는 날씨였다.


엘지 트윈스 사상 첫 우승을 축하하는 자체 청백전이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날이었다. 하지만 이미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가 끝난 지 오래. 선수들이 경기를 뛸 상태가 아니었고, 사실 제대로 된 경기도 아니었다. 그 해 최다 관중 신기록을 수립한 엘지 트윈스는 팬들을 위한 무료 청백전 이벤트를 만들었고, 한국 시리즈 이후 야구장을 갈 기회가 없어 몸이 근질근질했던 팬들은 멀찌감치서 선수들 등번호나 한 번 더 보기 위해 잠실을 찾았다.


나 역시 이대로 해를 넘기기 너무 아깝고 뭐라도 해야겠으니 잠실에 간 것일 뿐, 경기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승부와 상관없기에 재미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지금부터 23년 전의 일이다. 엘지는 90년대의 황금기를 지나,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이상훈의 역투로 의외의 선전을 펼치고 석패한 이후 기나긴 암흑기를 경험하고 있다.


8팀 중 4팀에만 들어가면 되는, 그러니까 절반 안에만 들어가면 되는 기형적인 포스트시즌에, 그것도 10년 동안 연속으로 못 들어간 경험은 큰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2013년 시즌이 시작할 당시 “제발 올해는 4강” “올해는 바라지도 않으니 내년” “4강에 들면 눈물날거 같다” "4강 들면 팬티만 입고 신천에서 춤을 추겠다"와 같은 게시판 글들을 보며, 1990년 엘지 트윈스 이야기를 꼭 한 번 써보고 싶었다. 1990년의 엘지는 2013년 엘지와 비슷한 상황이었으며, 그 해 엘지는 꼴찌를 달리다가 1위로 시즌을 끝냈고, 팬들이 스스로 겸손해질 필요는 없으며, 응원의 목표는 4강이 아니라 우승이어야 함을 쓰고 싶었다.


1990년은 무척 오래 전 과거이기도 하고, 생각보다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과거이기도 하다. 현 김기태 감독의 데뷔 해가 1991년이니, 아직 프로에 등장조차 안 한 사람이 레전드라 칭송되는 커리어를 남기고 은퇴한 후 감독이 될 시간이 지났을만큼 오랜 전 과거다. 불과 2년전인 88년 역대 최악의 트레이드로 팀을 맞바꾼 장효조와 최동원 두 사람이 은퇴 후 지도자의 길을 걷다 병을 얻어 둘 다 이 세상을 떴을 만큼 오래 된 과거이다.


그러나 1990년 훨씬 이전부터 감독을 하던 김성근 김응룡은 아직도 감독을 하고 있고, 90년에 엘지트윈스 코치였던 김용달 코치는 현재도 기아에서 코치를 하고 있으며, 당시 선수이던 이용철 이병훈이 최근에야 야구 해설의 신진세력으로 등장할만큼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이기도 하다. 배철수의 음악캠프는 지금까지 같은 시간 같은 목소리 같은 오프닝 음악으로 방송되고 있다. 30,100석에서 27,000석으로 정원이 줄긴 했지만 잠실야구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습이고, 맛없기로 소문난 김밥과 삶은 달걀은 그때나 지금이나 야구장 앞에서 똑같이 팔린다.


나는 그 때 대학교 신입생이었다. 지금처럼 학점 관리하는 대학생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던 시절이라 나는 아무 거리낌없이, 거의 모든 잠실 홈경기에 출석했다. 단순히 경기 시간에 맞춰 출근한 것이 아니라 관중 입장이 허용되기 시작하는 오후 3시반에 들어가서 경기가 시작되는 6시반 전까지 세시간 동안 3개 스포츠 신문을 탐독하고 스탯을 외우고 선수 연습을 지켜보다, 마침내 게임이 시작되면 또다른 세시간을 경기에 몰입해 보내고, 끝나면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 (그러니까 주변에 앉은 사람들... 당시는 지정좌석제가 아니었던 데에다 혼자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하철역 앞에서 곱창볶음을 먹고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면 밤 12시쯤 되는, 그런 나날의 반복이었다.


딱히 할 일도 없고 야구에 미친 내 눈앞에 하필이면 1년에 걸친 기적의 드라마가 펼쳐졌으니 어찌 야구로 나날을 보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엘지 트윈스의 그 시대를 모르는 트윈스 팬들, 그리고 그 시대를 함께 했지만 이제 많은 것을 잊어버렸을 이들과 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청룡팬북.png 88년 MBC 청룡 팬북


80년대 말, 나의 고등학교 시절 그리고 MBC 청룡의 무기력하던 시절,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면 잠실운동장 쪽 하늘이 늘 부옇게 빛났다. 조금 높은 곳에 올라가면 불이 환히 밝혀진 조명탑이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뽀송뽀송했다.


뽀송뽀송. 그 단어가 자꾸 떠오른다. 알알이 박힌 동그란 조명이 줄지어 늘어선 모습. 포장재로 쓰는 공기방울 들어간 비닐처럼 하나씩 터뜨려 보고 싶기도 했다. 그 불켜진 조명탑을 보면 도저히 학교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불과 몇 킬로미터 앞 밤하늘이 허옇고 그곳의 상황이 라디오로 생생히 중계되고 있는데 어찌 가만히 앉아있는단 말인가?


요즘처럼 케이블 티비는 없었지만 당시엔 대신 라디오 중계가 활발했다. 지금보다 팀 수도 적었으니 (초창기 6개 팀이다가 86년부터 빙그레 이글스의 가세로 7개팀) 하루에 딱 세 경기가 열렸고, KBS 라디오, MBC 라디오, CBS 라디오에서 각 한 경기씩 맡아 중계해주는 날이 많았다. 학교 야자 시간에 이어폰으로 라디오를 듣다 6회쯤 되어 슬슬 야구장으로 출발하면 시간이 딱 맞았다. 몇 년 전 없어졌지만 7회말 종료 후 무료 입장이라는, 정말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만 같은 고마운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7회쯤 도착해서 1루 출입구에 가면 (지금 TV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는, 담배도 피우고 음식도 파는 곳) 나 같은 사람 수십명 정도가 서성이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마침내 7회말 MBC 청룡 공격이 끝나면 직원이 문을 열어주고, 그러면 기다리던 사람들은 우르르 들어가 빈자리를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가장 명당 자리는 내야석(지금 블루석) 2층 계단이었다. 지금은 계단에 못 앉게 하지만 그때는 내야 좌석이 없으면 계단에 앉는 게 당연했다. 아예 경기 시작 전부터 계단에 앉는 사람이 많을 만큼 야구 보기에 딱 좋은 명당 자리였다. 계단이 꽉 차 있을 경우 2층과 3층 사이 통로에 서서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남아있는 1회부터 야구장 안에서 차츰차츰 분위기에 젖어든 사람은 잘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8회쯤 되어, 완전히 어둠이 내리고 조명으로 환히 빛나는 야구장으로 들어가면, 썰렁한 야구장 밖의 인적 없는 분위기에서 갑자기 조명과 함성과 사람들의 떠들썩한 흥분 속으로 걸어들어 가면, 그 대비가 너무도 강렬했다. 야구장 밖에서 갑자기 들어간 사람의 눈에 야구장 안의 사람들은 반쯤 미쳐 있는 것처럼 보였고, 조금의 시간이 지나면 나도 어느새 그들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야구장 안은 야구장 밖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고, 나는 그 다름이 너무나 좋았다.


8회초에 입장해서 8, 9회만 보고 나오기는 아쉬웠기에 연장에라도 돌입하면 운이 좋은 날이었다. 그보다 더 운 좋은 날은 김용수를 보는 날이었다. 4,5천명 정도가 찾는 80년대 후반 평일의 잠실 야구장은 김용수가 세이브하러 나오면 달아올랐다.


투수교체 시엔 무슨 여성 합창단이 애국가 필로 부르는 <MBC 청룡의 노래>가 항상 흘러나왔는데, 동영상이 나오는 전광판은 그 땐 당연히 없었고 노란색 텍스트로 가사가 표시되었다. 사실 ‘청룡’이라는 팀 이름은 나름 운치가 있어서 노래 가사와도 잘 어울렸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 청룡이 간다 /

청룡이 가는 길엔 / 승리 뿐이다.....

(이후 기억 안남)


그러나 노래가사와는 달리 청룡이 가는 길엔 승리보다 패배가 훨씬 많았다. 87년 전기리그 5위, 후기리그 4위로 플레이오프진출 실패, 88년 전기리그엔 만년꼴찌 태평양을 제치고 대망의 꼴찌, 후기리그엔 OB와 동률로 꼴찌에서 두번째, 전후기가 통합되어 단일리그가 된 89년엔 49승 4무 67패로 (그나마도 시즌 막판 미친듯한 연승 행진을 한 끝에) 꼴찌 롯데에 딱 반게임 앞선 6위..... 그러니 김용수가 세이브 하러 나오는 광경을 보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운이 좋은 날이었다.



성적에 걸맞게 감독도 자주 바뀌었다. 87년 김동엽, 88년 유백만, 89년 배성서... 3년 연속해서 매년 감독이 바뀌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프로야구 출범(82년)후 '89 시즌을 마칠 때까지 8년간 무려 12명의 감독이 MBC 청룡을 거쳐갔으니 제대로 된 성적이 나올 리가 없었다.


특히 마지막 감독인 배성서 감독은 선수들이 말을 들어먹지 않아 곤욕을 치른다는 게 스포츠신문 1면 톱으로 나올 정도였다. 야구계 일부에선 이를 ‘공기업에 가까운 MBC가 운영하는 이상 강력한 구단 정책을 펼칠 수가 없고 따라서 MBC 청룡의 태생적 한계’라고 꼽는 이들도 있었다. (곧 창단하는 KT가 이러한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꼴을 보다 못한 고참 선수들이 '89 시즌 종료 후 구단에 강력 건의하여, 창단 감독이었던 백인천 씨를 다시 감독으로 모셔오게 된다. 이래저래 팀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얼마 후인 89년 12월, 충격적인 소식이 발표된다. 팀이 럭키금성 그룹에 팔렸다는 것이다.


사실 그동안 많은 청룡 팬들은 구단 주인이 일반 사기업이 아니라는 데에 은근한 자부심이 있었다. 구단 응원을 하며 본의 아니게 남의 회사 이름을 외치는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남들이 “짝짝 짝짝짝 짝짝짝짝 OB!" 혹은 ”해태 짝짝짝 해태 짝짝짝“ 할 때 유일하게 우리만이 ”청룡 짝짝짝 청룡 짝짝짝“하는 구호를 외쳤다. 회사 이름이 아닌 팀 이름을 외쳤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도 똑같이 바보같이 남의 회사 이름을 불러야 하는가... 뭐라고 부르지? 럭금? 럭키금성? 골드스타?


후일 팀 이름은 LG 트윈스로 결정되었다. 럭키금성 그룹의 축구단은 여전히 ‘럭금’이었는데 야구단은 그나마 세련된 LG 라는 이름이 결정되어 다행이었다. 회사 이름을 외치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LG라는 회사는 당시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후일 그룹명 자체가 LG로 바뀔 줄이야...)


김재박 이광은 김상훈을 필두로 한 타력은 좋았지만 늘 투수력이 신통찮아 하위권을 전전하던 이 팀이, 구단 주인과 감독이 바뀌었다고 갑자기 성적이 크게 향상될 것 같지는 않았다. 남들도 다 하는 신인 지명, 그리고 몇몇 노장 투수를 데려온 것 빼고는 오프 시즌에 대단한 전력 보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이제 대학생이 되어 마음껏 야구장을 드나들 수 있게 되었지만, 그리고 야구장에 모인 다른 아저씨들처럼 야구 보면서 술도 (합법적으로) 마실 수 있게 되었지만, 과연 얼마나 팀 성적이 나올지는 미지수였다. 사실 시즌 전 많은 전문가들은 여전히 LG 트윈스를 중하위권으로 꼽았다. 당시는 팀이라고 해봤자 겨우 7개. 그 중 절반도 넘는 네 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고 세 팀이 떨어질텐데, 떨어질 강력한 후보로 태평양 돌핀스, OB 베어스, LG 트윈스가 꼽혔고 그나마 LG는 운 좋으면 4강도 갈 수 있다는 정도였다. (참고로 현재와 같은 4강 사다리 방식의 플레이오프 제도는 89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렇게 1990년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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