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개막하다

1990 LG 트윈스 우승 스토리 3

by 에덴의아래

(2013년에 쓴 글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3) 시즌 개막하다


1990년의 신참 대학생으로 야구를 좋아하기는 쉬웠다. 어쨌거나 야구는 한국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스포츠이고 신문을 보건 티비를 보건 야구 뉴스는 언제나 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야구를 '광적으로' 좋아하기는 쉽지 않았다.


대학생이니 당연히 학교 생활에 적응도 해야하고 시험도 봐야 했다. 게다가 써클활동도 ('동아리'라는 말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 해야 하고 선후배 사이의 술자리가 많았다. 25도짜리 소주에도 적응을 해야했고, 인사불성이 된 친구를 끌고 하숙촌도 누벼야 했으며, 자본주의와 국제질서의 부조리에 대한 공분을 나누려면 공부도 해야 했고, 대학가 술집 이 테이블 저 테이블에서 터져나오는 운동가요도 익혀야 했다. 매일매일 벌어지는 야구 게임에 쫓아다니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야구장에 다니면 연애가 어려웠다.


야구장을 여자친구와 같이 다니면 되지 않느냐고? 이론적으로는 가능해도 현실에선 매우 어려운 얘기였다. 우선 야구를 좋아하거나 야구장을 다니는 여자가 드물었다. 지금처럼 짝을 지어 유니폼을 맞춰 입고 야구를 보러 가는 커플은 일단 전혀 없었고, 야구 관객의 대다수는 삼사십대 아저씨들이었다. 여자를 배척하는 분위기까지는 아니었지만 분위기가 상당히 거칠었다. 관중석에 앉아 야구를 보며 담배를 피우는 시절이었기에 –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이다 – 앞자리 남자가 담배를 물면 여자들은 얼굴을 찡그리기 일쑤였다. 대학 주변의 카페나 술집에서 흡연하는 여대생들이 꽤 있긴 했어도 남자에 비해서 아직 여성 흡연율은 턱없이 낮았고, 담배를 마음대로 피운다는 건 그곳이 남자들의 공간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90 시즌이 끝난 후 럭키금성에서 신문에 게재한 광고. 얼추 칠팔십명 정도 되는 사람들 중에서 여자는 5-6명 정도 보인다.



관중 난동 사건도 꽤 많이 일어났다. 게임에 져서 흥분한 대구의 삼성 팬들이 해태 버스를 불질러 버린 사건이 86년이었으니 불과 4년 전 일이었다. 후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90년에도 전설로 내려오는 관중 난동 사건이 몇 개 있었다. 그런 난동이야 아주 가끔 일어나는 일이니 극단적인 경우라 하더라도, 왜 그랬는지 그 때는 야구장에 싸움이 잦았다.


한 쪽 팀 응원석에서 다른 팀을 응원했다가는 일단 시비가 붙었다. 주변 분위기 때문에 아무리 자제하려고 해도 극적인 상황에서 적시타가 나올 땐 자기도 모르게 함성이나 박수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면 앞뒤에서 어김없이 욕이 날아왔다. 안 그래도 게임 때문에 열받는데 눈앞에서 누가 박수치는 꼴을 못 본다.


“어이, 거기 좀 조용히 하시지.”


그 사람도 멀쩡히 돈 내고 들어왔는데, 그리고 그걸 떠나서 누군가 시비를 걸면 ‘한국인의 곤조’ 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그러면 점점 분위기 상승한다.


“야이 새끼야 니네 응원석으로 안 가?”
“너 이새끼 일루와봐. 니가 나 언제 봤다고 이새끼 저새끼야?”

“어쭈, 너 몇 살이야?”


하루 저녁에 서너번 정도는 항상 싸움이 났다. 멱살잡이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진짜로 치고박는 경우도 꽤 많았다. 사실 싸움구경이 재미있지 않은가? 누군가 싸우기 시작하면 다들 그쪽을 보았다.


“어, 싸운다 싸운다.”
“어디 어디?”


야구장에서 주로 소주를 많이 먹었고 (모든 주류 반입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그런다고 안 먹을 사람들이 아니다), 그땐 사람들 마음속에 억눌린 것들도 많았나보다. 어쨌거나 야구장이라는 데가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1번 타자, 중견수 이 대 형!”
“꺄아~~~”


이런 분위기는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94년 유지현 서용빈 김재현의 신인 3총사가 나타나면서 야구장에도 오빠부대가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그 이전엔 여성팬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낮았다. 처음 그 틀을 깨기 시작한 것이 1990년 엘지 트윈스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치어리더를 ‘상시’로 고용해서 모든 게임에 치어리더를 동원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신생팀 엘지 트윈스였고, 추첨 경품으로 여성용 화장품을 뿌리기도 하고 아무튼 팬 확대를 위해 의욕적으로 많은 노력을 했다.


물론 나도 곧 여자친구가 생겼고, 야구장에 같이 다니며 야구팬으로 만들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기는 했지만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선 나 스스로 성에 차지를 않았다. 3시 반에 입장해서 스포츠신문 공부를 해야 하는데 여자친구와 같이 그렇게까지 할 수는 도저히 없었고, 혼자 가면 잘 보이는 곳 계단 아무곳이나 앉아서 볼 수 있는데 두 자리 연속으로 빈 좌석을 찾으려면 한참 저 멀리까지 가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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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시즌 개막을 앞둔 3월 15일, 엘지 트윈스가 공식적으로 창단되었다. MBC 청룡의, 구름 위에서 노닥거리는 무척 한가해보이는 용은 이제 역사속으로 사라지고(하늘에서 노는데 왜 무릎에 흙이 묻어 있는지는 항상 의문이었다), 배트를 든 쌍둥이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트윈스라는 이름과 마스코트에 대한 새 구단의 설명은 이러했다. 대다수 스포츠 팀이 호랑이, 사자, 곰, 독수리 등 용맹한 동물을 마스코트로 하지만 럭키금성 그룹의 인간존중 정신을 표현하기 위해 마스코트를 사람으로 정했으며, 럭키금성이 추구하는 첨단과학기술 지향을 나타나기 위해 로봇 복장을 하고 있다고. 이 마스코트는 88올림픽 때 호돌이 캐릭터를 제작한 김현 씨가 제작했다 한다.


앞뒤가 모순이다. 인간존중이라면서 로봇이라니. 사실 트윈스라는 이름부터가 생뚱맞은 구석이 있다. 미국에 미네소타 트윈스가 있지만 그건 야구단의 근거지인 미니애폴리스와 세인트폴이 강을 사이에 두고 ‘트윈 시티’라고 불린다는 배경이 있다. 구단 측에선 서울도 강남과 강북의 균형발전을 추구한다고 애써 갖다붙이긴 했지만 여의도 쌍둥이 빌딩을 홍보하기 위함이란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아마도 회사 쪽에선 그 두 건물이 서울의 랜드마크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때 같이 검토되던 이름이 '럭키 골드스타즈'였던 모양이다. 삼미 슈퍼스타즈를 연상시키는 그 이름이 탈락한 것이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것보단 그래도 트윈스가 나았다.)



이름엔 나름 불만이 많았지만, 그러나 어쩌랴. 응원팀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도 새로운 유니폼은 마음에 들었다. 줄무늬가 세련되어 보였고, 검은색 원정 유니폼도 괜찮았다. 야간경기에 검은색 헬맷이 조명에 반짝반짝하면 예뻐 보였다. MBC 청룡의 다소 유치한 파란색보다 무채색 계열이 훨씬 패셔너블했다. 내가 그나마 여자친구를 데리고 야구장에 같이 다닐 수 있었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유니폼이 제일 세련되었다는.



0344EA3D51CA7C9A10.jpg 검은 유니폼에 대한 반론도 없는 바는 아니었다. 당시 <주간야구>에 "엘지 몬스터스"란 제목으로 실렸던 만평


지난 장에 썼듯 엘지 트윈스 90년 전력에 대해선 평가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89 아마야구 MVP였던 김동수의 가세, 그리고 최일언 김신부 차동철 등 투수 보강이 있었다고 애써 좋게 볼 수는 있었지만 객관적인 평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많은 이들이 주목했던 건 오히려 백인천 감독이었다. 82년 프로야구 원년 4할타자였던 백인천은 나름 확고한 타격관의 소유자였다. 짧게 끊어치는 그 스타일이 기존 엘지 타자들과 시너지를 얼만큼 낼 수 있는지가 일종의 관전 포인트였다. 물론 여기에 비관적인 사람들도 많았다. 백인천은 일본에서 활동할 전성기에 보통 선수는 휘두르기도 벅찬 1kg짜리 배트를 썼기에 짧게 끊어쳐도 힘이 실렸지만, 똑같은 이론을 다른 선수에게 과연 적용할 수 있겠는지가 이슈였다.


시범경기의 관심은 온통 롯데 박동희에게 쏠렸다. ‘한국의 노모’로 일컬어지는 – 그렇다, 박찬호의 팀 동료 노모가 그 해 일본에서 신인으로 혜성같이 등장해 한 경기 17 탈삼진을 기록하는 등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다 – 박동희가 과연 선동렬 급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 구속은 과연 얼마를 낼 수 있을지, 삼진은 몇 개나 잡을지, 기자들의 시선은 그쪽으로 쏠렸다.


또하나의 관전 포인트는 최동원이었다. 삼성으로 트레이드 된 최동원이 과연 올해는 예전의 구위를 되찾을 수 있을지 많은 이들이 궁금해 했지만, 시범경기에 등판한 최동원은 최고구속 125km도 안 되는 형편없는 직구를 던지는 투수가 되어 있었다. 이것이 과연 일시적인 것인가, 아니면 최동원 시대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런데 4월 4일, 개막을 불과 3일 앞둔 시점, 큰 사고가 터지고 만다. 엘지 트윈스의 3번 지명타자로 내정되어 있던 이광은이 심야 강변북로에서 교통사고를 내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은 것이다. 혼자 운전 중에 교각을 들이받았다고 보도가 되었다. 안 그래도 그 열흘 전 신언호가 연습 중 손목 뼈 골절을 입어 타격이 컸는데 이광은의 교통사고는 대단한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적어도 두 달은 지나야 경기에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의사의 소견이었다.


이광은 교통사고.jpg 스타 플레이어 이광은의 교통사고는 TV 뉴스에도 나올 만큼 큰 사건이었다. 90년 4월 4일 MBC 뉴스 영상.


그렇게 4월 7일 OB와의 개막전이 다가왔다.


선발 예정 투수는 김기범, OB 투수는 ‘개막전의 사나이’ 장호연이었다. MBC-LG 팬이라면 징글징글한 이름이 바로 장호연이다.


장호연은 데뷔 첫해인 1983년, OB의 개막전 선발투수로 나와 MBC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두었다. 이후 거의 매년 개막전 선발투수로 단골로 등장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MBC와 OB는 개막전에 자주 맞붙었는데 그 때마다 번번히 장호연에게 당하곤 했었다. MBC는 83년 이후 88년까지 7년 연속 개막전을 패했다.


장호연은 심지어 88년 롯데를 상대로 개막전 노히트노런을 달성한 기록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날 원래 예정된 OB의 선발은 김진욱이었는데 (지금 두산 감독과 동일인이 맞다) 경기 전 연습하다 타구에 급소를 맞는 바람에 부랴부랴 장호연이 등판했다. 그리고 공 단 99개로 롯데를 노히트노런해 버린 것이다. 그 중 탈삼진은 하나도 없었다.


장호연은 구속이 140km를 넘지 않았다. 100km 대의 변화구로 슬슬 던지다가 130km짜리 직구를 던지면 타자들이 번번히 속곤 했다. 맞춰잡기의 달인으로, 그의 야구 지론이 ‘뭐하러 삼진을 잡느냐’는 것이었다 한다. 아무리 잘 던져도 삼진을 잡으려면 공을 세 번이나 던져야 하는데, 한두번 만에 맞춰잡으면 될 걸 굳이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투구 스타일 때문인지 엘지 팬인 우리가 보기엔 생긴 것도 능글능글하고 정말 징그러운 투수였다. 저 느린 공이 치는 족족 빗맞으니, 정말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225D873951B5D27E32.jpg OB 투수 장호연


사실 우리 팀을 상대로 하지만 않는다면 은근한 쾌감도 불러 일으키는 선수였다. 뭐랄까, 천부적인 강속구를 타고 태어나지 않아도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사실, 잘나고 똑똑하게 태어나지 않아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그런 자신감을 불러 일으켜 준달까? 야구가 발전한 때문인지 요즘 그런 유형의 투수를 찾기 힘들다는 게 조금 아쉽기도 하다.


장호연의 별명은 ‘짱꼴라’였다. 장씨인 데다 얼굴이 동그랗고 능글능글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몰라도 그다지 호감이 가는 별명이라 할 수는 없었다. ‘무등산 폭격기 선등열’이니 ‘검객 노찬엽’이니 하는 멋있는 별명이 있는 반면, LG 신인선수 이병훈의 별명은 ‘뚱뚱이’ 혹은 ‘뚱땡이’였다. 그 당시엔 딱히 멋있지 않은 별명이라도 신문이나 방송에 자주 거론되곤 했다. (그러고보니 최근에 ‘류뚱’도 있긴 하다.)


그런 장호연에게 마침내 89년 개막전에서 이긴 투수가 바로 김기범이었다. 신인이던 89년 파격적으로 개막전 선발투수가 된 김기범은 4안타 1실점으로 완투승, 지긋지긋한 개막전 연패를 끊었다. 장호연은 개막전에서만 통산 6승 2패를 기록했는데, 그 2패 중 하나의 상대 투수가 바로 김기범이었다. LG는 이번에도 김기범을 선발 투수로 예고했다. 김기범 - 장호연의 개막전 리턴 매치가 성사된 셈이었다.


별명이 '일본 킬러'이던 김기범에게는 후일 '곰 사냥꾼'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개막을 하루 앞두고 김기범이 양손에 부상을 입고 전력에서 제외되고 만 것이다. 구단의 공식 발표는 샤워 중 미끄러져서 왼손을 다쳤다고 했지만, 지나가는 행인과 시비가 붙은 끝에 주먹다툼을 벌여서 양 손에 부상을 입었다는 게 정설이었고 그렇게 일부 보도도 되었다.


그 1년 전인 89년엔 청룡의 사이드암 투수 문병권이 (보도대로라면) ‘불량배들에게 뭇매를 맞아’ 한동안 이탈해 있었음을 보면 그 시절엔 선수나 관중이나, 아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싸움을 지금보단 많이 했음이 분명하다. 90년의 유명한 관중난동 사례 서너개는 나중에 다시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작은 에피소드로 90년 시즌 개막 한달 후엔 롯데의 박동희가 부산의 ‘고추 2’ 카페에서 여종업원의 얼굴을 가격하여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종업원이 “롯데가 지금은 잘 나가지만 곧 무너질 거야”라며 반복적으로 약을 올렸던 모양이다. 무슨 종업원이 손님 접대를 그렇게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격분한 신인 박동희가 손찌검을 했고 여종업원이 거액의 (웬만한 야구선수 1년 연봉치) 배상금을 요구해서 떠들썩했다.


즉 LG는 훈련 중 부상을 입은 신언호, 교통사고 이광은, 그리고 김기범까지, 주요 선수들이 줄줄이 이탈한 셈이다. 주전 외야수인 박흥식이 ‘89 시즌을 마친 후 고질적인 허리디스크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갔고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하다가 뒤늦게 계약서에 사인, 아직 훈련 중이었음을 생각하면 전력 이탈이 어마어마했다.


결국 개막전 선발투수는 OB에서 이적해 온 최일언으로 결정되었다. 1년 전까지 동료였던 최일언과 장호연이 개막전에서 맞붙게 되었다. 개막전은 사상 최초로 비로 연기되어 다음날인 일요일, 2차전은 그 하루 뒤인 월요일에 열렸다.


90년 개막전의 LG 선발 라인업은 아래와 같다. 시즌 후반의 베스트 라인업과 비교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여 일단 적어둔다.


1번 김재박 6
2번 최훈재 8
3번 김영직 D
4번 김상훈 3
5번 노찬엽 9
6번 윤덕규 7
7번 김동재 4
8번 심재원 2
9번 민경삼 5
투수 최일언


이날 LG는 1회 초에 2점을 낸 것을 끝으로, 7-2로 역전패를 당했다. 역시 개막전의 사나이 장호연에게 134구 4안타 완투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날 처음에 이기고 있다가 점수차가 벌어지자, 개막전부터 역전패 당하는 것에 분개한 한 팬이 옷을 벗고 그라운드에 뛰어든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엔 왜 그런지 야구장에서 누드 쇼를 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한달이면 두어번은 본 것 같다), 특별히 이날을 기억하는 이유는 시즌 개막전이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웃통 벗고 그라운드를 횡단하는 정도, 아주 심해봐야 팬티 바람에 내야 그물을 타넘는 정도인데 반해 이 아저씨는 팬티까지 벗으려다 청원경찰에 끌려 들어갔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경기 중에 옷 벗고 질주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사례가 너무 없어서 오히려 섭섭한 기분마저 들기도 하는 걸 보면.... 그런 걸 어려서 너무 많이 봤나보다.


다음날 2차전에는 정삼흠이 144구를 던지며 완투하였지만 역시 5-4로 지며 개막 2연전을 모조리 OB에게 내준다. 설상가상으로 가뜩이나 선수가 부족한데, 주전 외야수인 노찬엽마저 개막전에서 1루로 전력질주하다 발못이 삐끗하는 바람에 한동안 이탈해 버렸다.


이렇게 롤러코스터 시즌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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