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 LG 트윈스 우승 스토리 6
(2013년에 쓴 글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8연승으로 승률 5할을 맞춘 LG가 다음날 9연승에 도전하며 맞은 상대는 태평양 돌핀스. 이날 잠실 야구장을 찾은 사람들은 여러 모로 진귀한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시즌을 치르고나면 120 게임이 넘는 경기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기 마련인데 이 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일찌감치 잠실야구장에 도착해 시간을 때우고 있으면 경기 시작 한 시간 전에 오더가 교환되고 전광판에 라인업이 뜬다. 이것은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인데 중요한 차이점은 당시엔 상대팀 선발 투수가 누가 나오는지 경기 한 시간 전 전광판을 보아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스포츠 신문에는 선발 예상투수가 매일 실렸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상’일 뿐, 실제와 어긋나는 경우가 꽤 많았다.
참고로 선발투수 예고제가 강제 시행이 된 것은 ‘98 시즌부터였다. 98년 전까지는 팀에 따라 팬 서비스 차원에서 자율적으로 선발 투수를 예고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했다. 첫 시행 당시 가장 반발한 팀이 김성근 감독의 쌍방울 레이더스였다. 김성근 감독이야 원체 온갖 '잔수'로 상대팀 골머리를 썩게 만드는 데에 귀재였던 데다, 당시 쌍방울엔 성영재 김현욱을 비롯 잠수함투수가 많아 투수 예고제에 가장 취약했다. 전쟁에서도 병력이 약한 나라는 정면 승부보다는 기습 공격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김성근 감독은 25명 엔트리를 최대한 이용하면서 기록지를 새까맣게 만드는 것으로 유명했다. (1군 엔트리는 쭉 25명이다가 2008년을 기점으로 26명으로 늘어났다.)
어쨌거나 그 때는 소위 ‘오더 싸움’이 중요했다. 가령 언더핸드 투수를 예상하고 1번부터 4번까지를 좌타자로 도배해놨는데 상대팀에서 좌완 투수가 기습적으로 나오면 경기 시작부터 한수 접고 들어가는 셈이었다.
그날 90년 6월 14일, 경기 시간 한 시간 전 전광판에는 투수 최일언이 LG 4번타자 우익수로 떴다. 상대 선발 여부에 따라 오른손 노찬엽과 왼손 최훈재를 선택하기 위한 ‘위장 오더’였다. 자주는 아니라도 가끔 볼 수 있던 광경인데, 내 기억에 그날이 백인천 감독의 첫 위장오더였던 것 같다. 태평양 역시 1번타자 중견수에 투수 박정현, 3번타자 3루수에 투수 최창호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 때 태평양의 감독이 누구였던가? 당연히 김성근 감독이었다.
6월 초까지 진행되는 2연전 일정이 끝나고 3연전이 시작되는 첫 시리즈였다. 앞선 두 경기에 LG가 이기는 바람에 양팀의 순위가 뒤바뀌어 LG는 정확히 5할, 태평양은 한 게임을 뒤지는 상황이었다. 연승을 이어가려는 LG, 그리고 스윕을 막고 5할에 복귀하려는 태평양, 양 팀 감독의 필승 의지가 드러나는 라인업이었다.
다시 6월 14일 경기로 돌아가자. 요즘은 별로 볼 수 없지만 전광판에 위장 오더가 떠 있으면 나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들뜬다. 뭔가 치열한 머리싸움이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날은 양쪽 팀이 둘 다 위장 오더를 동원할 만큼 분위기가 치열했다.
2회말 LG 공격, 무사에 이광은 김동수의 연속 안타로 찬스가 왔지만 후속타 불발로 득점에 실패. 그러자 곧바로 3회초에 위기가 찾아왔다. 볼넷 두 개에 이은 2루타 두 개로 석 점 실점. LG는 투수를 차동철로 바꾸었지만 또다시 만루가 되더니 태평양 대타 홍문종이 만루홈런을 터뜨렸다. 순식간에 7점이 나 버렸다. 스코어는 0대 7.
그러나 상승세의 LG는 그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이어진 3회말. 안타 여섯 개, 볼넷 두 개, 상대 실책과 희생플라이가 이어지며 무려 8득점. 8대 7로 곧바로 역전을 시켰다. 관중석의 팬들은 희희낙락이었다. "뭐 이런 게임이 다 있어?" 양 팀이 3회 초와 말을 통해 15점을 교환했고 이는 같은 이닝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이었다.
역전에 성공한 LG는 곧장 투수를 유종겸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5회초 9번타자 정진호에게 2타점 싹쓸이 3루타를 얻어맞고 다시 8대 9로 역전 당했다. 경기가 이렇게 되자 백인천 감독은 아직 5회인데도 마무리투수 정삼흠을 올리는 다소 무리한 승부수를 던졌다. 정삼흠으로선 4일 연속 등판이었다.
7회말 LG 공격 만루 찬스가 무산되자 야구 격언대로 곧바로 위기가 찾아왔다. 8회초 태평양은 김일권의 도루에 이은 적시타로 한 점을 추가, 8대 10 두 점 차로 달아난다. LG 역시 그대로 물러나진 않았다. 8회말 이광은의 안타와 도루, 김동수의 적시타로 한 점을 만회했다. 9 대 10. 이어 볼넷 두개로 2사 만루가 되자 김성근 감독은 투수를 조병천으로 바꾸었다. 안타 한 방이면 역전. 성원을 받으며 등장한 9번타자 김동재는 그러나 삼진으로 물러나고 만다.
9회초 태평양 공격. 선두타자가 2루타를 치고 나갔으나 희생번트 시 주자가 3루에서 아웃되며 득점에 실패.
이제 9회말 LG 마지막 공격. 선두타자가 볼넷으로 출루하며 기대감을 높였지만 박흥식의 잘맞은 타구가 유격수 직선타로 잡히며 결국 동점에 실패. 경기는 그냥 그렇게 끝났다.
이날 LG는 잔루 13개와 함께 연승행진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다지 수준이 높다고 할 수는 없는 경기였지만 7점을 내주고 곧바로 8점을 따라붙는 등 상승세의 팀 분위기를 여실히 보여주는 한 판이었다. 당시는 지금보다 경기 시간이 월등히 짧아서 세 시간을 넘는 경기가 많지 않았는데 무려 네 시간이 넘는 혈투를 펼치며 승리에 대한 집념을 보여준 경기라 기억에 오래 남는 하루였다.
이튿날인 15일 삼성과의 대구 더블헤더는 첫 경기에 패했지만 두번째 경기에서 김동수의 솔로 홈런 두 개를 비롯해 김상훈, 나웅, 노찬엽이 홈런을 추가해 무려 5홈런을 때리며 승리했다.
16일 토요일 낮경기에서 김동수는 또다시 4회와 5회 연타석 홈런을 때리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17일 일요일 삼성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김동수는 2점짜리 홈런을 또다시 쳤다. 3게임 연속 홈런이자, 세 경기 동안 홈런을 다섯개나 때려낸 것이다.
그 전 주는 문병권이었는데 이번 주는 김동수가 각 매체의 주간 MVP를 휩쓸었다. 29타수 16안타 .552의 타율에 5홈런 10타점이 일주일간의 성적이었다. 시즌 초만 하더라도 신인왕은 롯데 박동희가 유력했는데 이 때를 기점으로 김동수가 강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김동수에게도 역시 스포츠서울에서 주는, 생뚱맞아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 ‘정철생활영어 카세트테이프(영어 일어 중 택일)’이 부상으로 주어졌다.
시즌 초엔 투수 리드가 불안하다는 이유로 선발 출장을 못하던 김동수였지만 불과 한두달만에 주전을 꿰차고 LG 상승세의 주역으로 올라섰다. 타순도 7, 8번에서 어느덧 5번으로 올라섰고, ‘미친 일주일’을 보내고 난 후엔 4번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아울러 백인천 감독은 '세이브 포수'라는 걸 만들어냈다. 지고 있으면 공격이 강한 김동수를 그대로 가져가고, 이기고 있을 때엔 베테랑 심재원이 김동수 대신 들어가 한두 이닝을 맡았다. 착착 팀 운영의 틀이 잡혀갔다.
LG가 상승세를 타는 동안 프로야구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우선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삼성과 OB의 난투극이 6월 5일 잠실에서 벌어졌다. ‘벤치 클리어링’이 아니라 ‘난투극’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정말로 유혈 난투극이었기 때문이다.
두 팀은 멀리 1983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감정이 있었다. 매해 사소한 충돌이 있었고, OB 포수가 상대팀 삼성 감독이었던 김영덕 감독에게 “변태”라고 소리를 쳐서 따귀를 얻어맞은 사건도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사실 ‘변태’ 사건은 조용히 지나갈 수도 있었는데 스포츠 신문 기자가 지면에 쓰는 바람에 널리 알려져 버렸다. 그 기자가 김영덕 감독을 싫어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김영덕 감독이 제일 싫어하는 별명이 변태'라고 온 천하에 알려졌으니 언론의 힘이 크긴 하다.
직전 대구에서의 양팀 2연전 당시 삼성 선수들의 과도한 세레머니, 큰 점수차임에도 보내기번트를 대는 등의 비신사적인 행위가 발단이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어쨌든 그 해에도 몇 번이나 양팀 간 위협 투구 논란과 욕설이 오가더니 6월 5일 잠실 OB 홈경기에서 드디어 큰 사건이 터진다.
7회초 OB 투수 김진규가 삼성 타자 강기웅에게 던진 초구가 타자 머리 위로 날아가자 욕설이 오갔고, 2구째에 드디어 옆구리에 맞자 강기웅이 배트를 들고 마운드로 돌진했다. 보통 이럴 땐 싸우는 척만 하다 마는 경우도 많지만 이날은 달랐다. 양팀이 진짜로 패싸움을 한 것이다.
이날 삼성 박용준은 OB 이복근의 스파이크에 밟혀 턱뼈에 금이 가고 얼굴을 20여 바늘 꿰맸으며, 강기웅은 아수라장 속에서 밑에 깔리는 바람에 허리를 다쳤다. 김동앙 주심은 누군가에게 발길질을 당해 왼쪽 갈비뼈에 금이 가서 병원으로 실려갔다(발길질의 당사자가 OB 선수인지 삼성 선수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발단이 된 강기웅 김진규, 싸우는 과정에서 방망이를 휘두른 박정환, 김종갑, 조범현, 김태형이 집단으로 퇴장 당했다. 강기웅과 이복근은 심지어 형사 입건까지 되었다.
가뜩이나 팀 분위기가 좋지 않은 OB에게 이 사건이 그다지 좋은 영향은 끼치지 못한 듯하다. 시즌 초반 7연패 후 합숙에 들어가며 반짝 상승세를 탔지만 또다시 11연패에 빠지고 말았고, 이광환 감독이 결국 견디지 못하고 사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90 시즌 개막 전, 신문에 이광환 감독에 대한 작은 에피소드가 실린 적이 있다. 잠실 구장 장내 오르간 주자에게 (당시엔 오르간 주자가 있었다) 매 경기 시작 전에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충청도 아줌마>라는 곡을 연주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기사였다. 나는 이 기사를 보고 꽤 웃었다. OB는 초창기 3년간 연고지였던 대전과 충청도의 이미지를 벗고 어떻게든 서울화를 꾀하고 있는데 정작 팀의 감독이 홈게임에 <충청도 아줌마>를 연주해 달라고 하다니.
일개 팬에 불과한 나로서는, 이광환 감독이 워낙 둥글둥글하고 착한 외모였던지라 그냥 사람 좋은 순둥이 감독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각 매체들에서는 ‘선수단 장악 실패’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89년 박노준 박현영, 90년 김상호 최동창 등 신진 세력을 중용하며 팀컬러 변화를 꾀했는데 기존 고참들의 반발로 팀 통솔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직 미숙한 박현영을 너무 믿은 나머지 김경문 포수에게 은퇴를 종용해서 결국 팀을 떠나게 만들었고 이 때문에 전력이 약화된 게 결정적 실책이라고 쓰기도 했다. 하지만 각 신문의 대체적인 논조는 ‘자율야구가 시기상조’ ‘악화가 양화를 몰아냈다’는 것으로, 감독이 야구 문화의 선진화를 꾀했지만 팀이 받아주지 못했다는 동정론이 대세였다.
후일 이광환 감독이 LG 감독으로 오며 그의 자율야구, 5선발 체제, 투수분업, 파격적인 신인 기용 등이 빛을 보아 90년대 LG의 전성기를 이끌게 되지만, 이때만 해도 이광환은 패배자로 쓸쓸히 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OB의 11연패를 끊은 것은 다름 아닌 박철순이었다. 또 한 번의 부상으로 일 년여를 쉬고 돌아온 6월 18일, 박철순은 해태를 상대로 눈물의 시즌 첫 승을 거둔다. 이후 6월 23일 시즌 2승, 7월 4일 1500일만의 첫 완봉 등등, 야구 볼 낙이 없는 그 해의 OB 팬들에게는 박철순만이 희망과 감동이었다.
6월 초. 이탈리아 월드컵이 개막했다.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한국의 16강 진출 여부였다. "초전박살 땅벌작전." 전반 20분이 지나면 우리팀의 약점이 파악되니 전반 시작하자마자 미친듯이 몰아붙여서, 아직 얼떨떨한 상대방이 엉겁결에 골을 먹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언론의 주문.... 지금 보면 약팀의 몸부림 정도로만 보이지만 그때는 진지했고, 진짜 16강에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어쨌든 이회택 감독의 축구 국가대표팀은 처참한 실패만을 안겨주었고, 월드컵 때문에 잠시 썰렁하던 야구장은 다시 사람들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전반기 종료를 향해 가는 일정. LG에선 드디어 김기범이 긴 부상에서 돌아와 합류했고, 정삼흠도 이기는 경기마다 나와 구원 성공을 이어갔다.
6월 28일 전반기 마지막 경기. 올스타 휴식기를 의식한 LG는 무려 7명의 투수를 넣으며 총력전을 펼쳤다. 백인천 감독은 초반과는 달리 ‘승부사’ 기질을 발휘하는 일이 잦아졌다. 혹자는 '드디어 백 감독이 내일이 없이 오늘 다 쏟아붇는 한국 야구에 적응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혹자는 '운이 좋아서 통하는 거지 저러다 한 방에 팀이 무너진다'고 걱정했다. 이날 빙그레 이글스와의 승부도 비슷했다. 결국 6대 6으로 연장 돌입.
그러나 김용수가 10회초 선두타자에게 볼넷을 주고 말았다. 그리고 희생번트에 이은 대타 조양근의 적시타로 1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6대 7.
이어진 10회말. 선두타자 나웅이 우전 안타를 터뜨리며 불씨를 살렸다. 히트 앤드 런 작전이 걸렸으나 안타깝게도 신언호의 타구에 주자 나웅이 맞으며 1아웃. 이어 나온 박흥식의 기습번트 안타로 1,2루가 되었고, 빙그레의 2루 견제 에러로 한 베이스씩 진루하여 상황은 1사 2,3루.
대수비로 들어와 있던 신인 이병훈이 타석에 들어왔고 대기타석엔 4번타자 김동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빙그레 송진우 투수는 김동수 대신 이병훈을 선택했다. 그날 안타가 없는 김동수였지만 만루 상황에서 김동수에게 던지는 것보다는 이병훈이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코너로 승부하다 1루를 채워도 좋다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볼-볼-파울-파울이 이어지며 2볼 2스트라이크. 5구째 던진 공이 방망이에 정통으로 맞았고 하늘에 뜬 공은 우익수 키를 넘어갔다. 그 순간, 우익수 쪽으로 하늘을 날아가던 하얀 야구공이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다. 거짓말같은 2타점 끝내기 역전 2루타였다. 잠실 구장을 가득 메운 구름관중....은 아니었고, 1루쪽만 들어찬, 그것도 경기 시간이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듬성듬성 이가 빠진 관중석은 난리가 났다. 10회초 1점을 주고 10회말에 2점을 내 역전한 8-7 케네디 스코어 승리.
이 한 방으로 이병훈은 생애 처음으로 스포츠신문 1면을 장식했다. 이병훈은 ‘90 시즌 72경기 출장 (경기 후반 대수비가 많았다) 120타수 31안타 .258 1홈런 19타점 11볼넷 15삼진으로 숫자만 보면 딱히 눈에 띄지는 않지만, 김경기와 함께 고려대를 이끌던 중심 타자답게 결정적인 순간 한 방이 있었던 데다 클러치 안타를 치고 난 후의 격한 세레머니 때문에 LG 팬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어딘가 익살스런 이미지도 인기에 한 몫을 했던 것 같다.
6월 한달, LG는 16승 6패, 승률 .727을 기록하며 후반기 약진의 기초를 다졌다. 전반기가 끝났을 때의 순위는 아래와 같았다.
투수 쪽에선 최일언 김신부 등 외부 수혈된 베테랑들이 부진했지만 김태원 문병권이 드디어 잠재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정삼흠이 구원투수로 자리를 옮기며 팀이 안정된 것이 소득이었다. 타격에선 김재박이 체력 문제로 7번 타순으로 내려갔지만 윤덕규가 1번에 자리를 잡았고, 특히 김동수의 선전이 고무적이었다. 김동수는 신인이라 시즌 초반 출장이 많지 않았고 포수라는 포지션이었음에도 타율 10위, 홈런 4위, 타점 7위, 최다안타 8위 등 대부분의 순위에서 10위권에 들었다.
80년대를 통틀어 포스트시즌에 단 한 번밖에 진출하지 못했던 팀, 오랜 하위권 생활에 지친 팬들에게도 볕이 드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약속의 후반기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