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 LG 트윈스 우승 스토리 8
(2013년에 쓴 글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7월 말. 무더운 여름의 절정. 500만명 대이동이라던 피서철을 맞아 바다로 산으로 인파가 몰리는 사이 중동에서는 전쟁 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에 대항하여 아버지 부시는 다국적군을 규합했고, 후세인은 미군이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 과정에서 생포되는 미군 조종사를 '잡아 먹겠다'고 위협했다. 한국의 참전, 혹은 전쟁 분담금 이야기도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중동 전쟁은 우리에겐 먼 얘기. 세인들의 이목을 끄는 연예가 핫이슈는 난데없는 최수지-김청 간의 감정 싸움이었다. 최수지와 약혼을 발표한 상대남이 그 이전 김청과도 약혼했던 동일인으로 밝혀졌는데, 두 여자가 모두 같은 중매장이를 통해 소개를 받았기에 이럴 수가 있느냐는 감정 싸움이 주된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로서 딱히 관심 있는 내용은 아니었는데, 다만 남자를 뺏겨서 열받았다는 김청이 여전히 “속이 답답하세요? 속청!”하는 광고에 계속 나오던 아이러니한 상황은 기억에 남는다. 보통 연예인 스캔들 같은 게 터지면 그 연예인이 출연한 광고가 중단되는 게 관례인데 ‘김청의 속청’ 경우는 꿋꿋하게 계속 김청을 내보냈다. 광고 카피와 완벽히 들어맞는 상황 전개에 광고주가 쾌재를 부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여름이면 늘 언론을 장식하는 물놀이 사고 뉴스도 사고를 당한 사람에겐 비극이었겠지만 뉴스를 소비하는 일반인들에게 피서철 분위기를 돋우는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다. 극장가에서는 여름 대목을 맞아 <로보캅2>의 대대적인 홍보가 진행되었고 미키 루크의 <와일드 오키드>도 여성 관객의 폭발로 흥행을 이어나갔다. 그때는 유독 에로틱한 영화가 많았고, 수위도 완성도도 꽤 높았던 것 같다.
좋은 일만 일어날 것 같던 LG 트윈스에게도 시련이 다가왔다. 예정된 시련이었다고 할까. 바로 빙그레 이글스와의 대전 3연전이었다. 우천 연기된 경기 때문에 첫날 더블헤더를 하게 되었으니 4연전인 셈이었다.
빙그레 이글스는 MBC 청룡 시절부터 LG의 천적이었다. 특히 대전구장에서는 88년 8월 20일 이후, 그러니까 만 2년동안 청룡/LG가 단 한번도 빙그레를 이긴 적이 없었다. 무려 15연패였다. 해태와 빙그레 두 팀이 이견 없는 최강이긴 했지만 LG에게 두 팀과의 경기는 유독 어려웠다.
LG 대 해태전은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흥행카드로, 수많은 관중이 자아내는 긴장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늘 박빙의 승부가 이어졌다. 경기 내용도 양팀의 호수비가 이어지고 긴박한 투수전이 전개되는 등 수준이 높았다. 그래도 LG 입장에서는 선동열 조계현 이강철 등 몇몇 투수만 공략하면 그나마 해볼만 하다는 느낌이 있었고 실제로 90년 양팀 전적도 호각세를 이루었다. 그와는 반대로 젊은 선수들이 펄펄 나는 빙그레에게는 속수무책이었다. 전년도인 ‘89 시즌에도 MBC 청룡의 대 빙그레 성적은 3승 1무 15패였다. 빙그레의 페넌트레이스 1위를 만들어준 결정적 도우미가 바로 청룡이었다.
그러니 대 해태전은 소위 ‘쪼이는’ 맛에 경기를 보는 재미라도 있었지만 빙그레는 정말 라디오 중계조차 듣기 싫었다.
우선 ‘황금 트리오’라고 불리던 이강돈 이정훈 고원부의 외야진부터가 무시무시했다. ‘87 신인왕인 이정훈은 장효조와 맞먹는다는 정확성을 자랑했고(후일이지만 91년과 92년 연속 타격왕을 차지했다), '깡통' 이강돈은 요즘 말로 전형적인 배드볼 히터로서 최다안타 부문 수위를 오르내렸다. 재일동포 출신 고원부도 ’89 타율 1위였다.
1번 이정훈, 2번 이강돈, 3번 고원부를 넘고 나면 첩첩산중, 4번에 장종훈이 버티고 있었다. 게다가 강석천까지. 하위 타순으로 가면 유승안의 한 방이 무서웠다. 현실 세계의 라인업이라고 생각되지가 않았다.
90년의 빙그레 타선이 얼마나 대단했냐하면, 우선 장종훈은 유격수로 뛰며 120경기에 출장, 홈런 타점 장타율 1위, 득점 2위, 출루율 3위로 그 해 MVP 투표에서 선동열에 이어 2등을 했다. 유격수가 홈런과 타점 1위를 한 것은 역대 최초 기록이었다. 그의 유격수 수비를 못 미더워한 김영덕 감독이 자꾸 1루 수비를 시키는 바람에 조금의 불협화음은 있었지만 실로 대단한 성적이 아닐 수 없다.
'90 시즌 중후반까지 타격 5개부문 1위를 질주한 이강돈은 그 해 타율 2위 득점 1위 최다안타 1위 홈런 4위 타점 3위를 차지했다. 이정훈은 최다안타 8위 타율 10위 득점 4위 도루 5위를 기록했고, 프로 2년차 강석천역시 사이클링 히트를 치는 등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투수가 약한가하면 천만의 말씀. 한희민 이상군 한용덕 송진우 그리고 갑자기 튀어나온 김홍명까지.
걸출한 선수는 아니었지만 김대중이라는 투수도 기억난다. 야당 총재인 김대중과 한자까지 똑같아 별명이 '총재'였다. 조금 늦게 태어났더라면 총재가 아닌 대통령이라는 별명으로 현역 선수 시절을 보낼 수 있었을텐데.
젊은 선수들의 멋진 스토리도 많았다. 전기 수리공과 트럭 운전 조수를 하다 야구에 대한 꿈을 접지 못해 배팅볼 투수로 입단했던 한용덕, 역시 연습생 출신의 장종훈 등등. 80년대 말과 90년대 초는 이글스의 전성시대였고 충분히 그럴만했다. 지금도 대전구장에 가면 그 때의 선수들, 강석천 장종훈 이상군 한용덕 송진우 등의 대문짝만한 사진들이 걸려있다.
그런 빙그레와의 4연전을 맞는 LG는 연전연승 중이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체력소모가 극심했고 투수진이 고갈되어 있었다. 반면에 빙그레는 4일간 휴식을 끝낸 직후여서 어떻게든지 경기를 하고 싶어했다. 아침부터 대전구장에 비가 내렸지만 빙그레 측은 아르바이트를 동원, 스폰지로 운동장 물기를 없애고 경기를 강행했다.
7월 20일 더블헤더 1차전. 김상훈의 홈런 등으로 LG는 2대 1로 앞서갔지만 4회말 장종훈에게 역전 투런 홈런, 5회말 강석천에게 또한번 투런 홈런을 맞으며 3대 9로 패했다. 도루 실패 두 개에 무려 4개의 병살타를 기록한 무기력한 패배였다. 대전구장 16연패.
더블헤더 2차전에서 LG는 드디어 연패를 끊는가 했다. 3대 0으로 앞서가자 6회에 선발투수이자 에이스였던 김태원을 투입하며 총력 승부수를 걸었다. 하지만 야금야금 쫓아오던 빙그레에게 결국 8회말 실책이 빌미가 되어 동점을 허용했다. 연장 11회 초에서 한 점을 득점하며 이기는가 싶었지만 1사 3루에서 추가점을 내기 위한 김재박의 스퀴즈번트가 실패하며 더블아웃을 당했고, 이어진 11회말에 또 나웅의 실책으로 주자를 내보내고 동점을 주었다.
결국 LG는 이 경기 연장 13회말 무사 1,2루에서 강석천에게 펜스 맞는 끝내기 안타를 맞고 패배했다. 무려 네 개의 실책을 범했고, 진 것도 억울한데 김재박이 번트를 대다 손가락 부상을 입어 한동안 라인업에서 빠지는 타격도 입었다. 대전에만 가면 여러모로 꼬였다. 대전구장 17연패.
7월 21일. LG는 경기에 앞서 대전구장에 소금을 뿌리며 연패 저지를 위해 별짓을 다했지만 주루사와 견제사가 속출했고, 4대 4로 동점이던 8회말 2사 후 대타 김상국에게 통한의 투런홈런을 맞으며 4대 6으로 패했다. 대전구장 18연패.
7월 22일. 하루를 쉰 김태원을 또 선발로 낸 LG가 1회초 공격에서 넉 점을 뽑았다. 하지만 연투가 부담이 되었는지 1회말 수비에서 김태원은 5안타를 맞으며 4점을 곧바로 토해냈다. 백인천 감독은 2회부터 역시 하루 쉰 김기범을 투입했고, 6회에는 사흘연속 등판하는 정삼흠까지 내며 총력전을 펼쳤지만 고원부에게 홈런 두 방, 이강돈에게 한 방을 맞으며 4대 6으로 또다시 패했다. 4연전 전패이자 대전구장 19연패.
이 충격은 컸다. LG는 1위에서 3위로 내려앉았고 빙그레가 다시 1위로 올라섰다. 2번타자 이강돈은 이 4연전 이후 타율 타점 장타율 최다안타 득점 등 타격 5개부문에서 1위로 올라섰고, 3번타자 고원부는 네 경기동안 8타점 8득점을 기록하며 중간고리 역할을 했으며, 4번타자 장종훈은 홈런 1위로 올라섰다. 신문에선 시즌 MVP가 이강돈과 장종훈 두 팀메이트 간의 경쟁이라고들 했다.
모든 걸 쏟아 붇는 총력전이었지만 충격의 4연패. 설상가상으로 이어지는 일정이 잠실 해태전이었다. 해태는 투수 한명 한명의 능력은 정말 뛰어나지만 워낙 선수 숫자가 적어 장기 레이스에서 고생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그들에겐 선동열이라는 언터쳐블이 있었다.
‘90 시즌을 앞두고 해태는 투수가 가장 큰 문제였다. 노장 이상윤 방수원이 은퇴했고, 차동철은 LG로 트레이드 되었으며, 문희수는 무릎 수술, 신동수 역시 훈련 중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했다. 실전 투입 가능한 투수가 겨우 9명이었다. 그 선수들로 120 경기를 꾸려가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고안해낸 투수로테이션 방법은 이러했다. “선발이 초반 3점 실점하면 바로 교체. 5회를 던지면 이틀 휴식. 완투하면 사흘 휴식.” 물론 선발투수가 줄줄이 무너질 때의 대비책 따위는 없었다.
시즌이 진행되며 신동수 문희수가 부상에서 돌아왔고 연습생 출신 송유석이 등장해서 큰 힘을 주긴 했지만 턱없이 부족한 투수층 때문에 해태는 중위권을 맴돌았다. 고육지책으로 김응룡 감독은 7월 하순부터 선동열을 선발에서 제외하고 불펜 대기한다고 선언했다. 선동열은 불펜보다는 선발을 단연 선호하긴 했지만, 이기는 게임에만 선동열을 투입해서 자원 낭비를 막겠다는 취지였다.
그렇게 맞은 7월 24일 해태와의 잠실 3연전 첫경기. 해태는 신동수, LG는 김용수가 선발로 나왔다. 5위에 처져 있는 해태는 시급한 반등이 절실했고, 충격의 4연패를 당한 LG도 반드시 1승이 필요했다.
3회말 윤덕규의 희생플라이로 한 점을 득점하며 앞서나갔지만 5회초 해태는 단타 3개를 묶어 1득점하며 1대 1 동점을 만들었다. 계속 이어지는 해태의 찬스에서 정회열이 주루사하며 흐름이 끊긴 게 천만다행이었다.
위기 뒤엔 찬스. 곧바로 5회말 LG에 기회가 찾아왔다. 김동재의 2루타와 후속 내야땅볼로 1사 3루.
여기서 김응룡 감독은 승부수를 던졌다. 나웅을 고의사구로 내보내어 1사 1,3루를 만든 후 다음 타자 윤덕규를 상대로 선동열을 투입한 것이다. 선동열은 프로입단 후 3년동안 외야 희생플라이 실점조차 단 한번도 허용한 적이 없을만큼 무시무시한 투수였고, 이번에도 김응룡은 선동열을 믿었다. 좌타자이므로 스퀴즈도 어려울 것이고, 선동열이니 병살이나 삼진으로 잡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삼진과 내야땅볼로 이닝을 끝내 버렸다.
이후 LG 투수 김용수가 호투를 이어갔지만 선동열에게 단 한개의 안타도 치지 못하며 1대 1 동점이 계속 이어졌다.
8회말 공격. 8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선두타자 박흥식이 마침내 우월 3루타를 터뜨렸다. 무사 3루에 타순은 3,4,5번 클린업. 여기서 1점만 내면 9회초는 마무리투수 정삼흠이 막고 승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몇 년에 한 번 꼴로만 외야 희생 플라이를 허용한다는 선동열답게 3번 김상훈이 얕은 좌익수 플라이로 아웃되며 득점에 실패했다. 4번 이광은은 허무한 삼진. 5번은 원래 노찬엽이었지만 이미 신언호로 교체된 상황이어서 이번에도 역시 득점은 거의 물건너간 것과 같았다. 나 뿐 아니라 모든 LG 팬들은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번에 점수내긴 글렀고, 김용수는 1회부터 던지고 있고 선동열은 5회에 나왔으니 이대로 계속 진행되면......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그건 기적이라고 밖에 얘기할 수가 없다. 선동열이 폭투를 범한 것이다. 어 어 하는 사이 3루 주자가 홈을 밟았다. 고대하던 1점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과 같았다. 그 하늘 같은 선동열이 폭투로 점수를 헌납해 주다니.
9회초 정삼흠이 세이브를 하고 그렇게 경기는 끝났다. 2대 1 승리. 승리투수 김용수. 패전투수 선동열. 드디어, 4년 만에 처음으로 선동열에게 한 번 이겨본 것이었다. (그 4년 전에도 선동열 손가락 물집 때문에 이긴 경기였다.)
기쁘긴 한데 약간의 떨떠름함이 23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기억에 남는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4연패도 끊고 해태도 이겼으니 기분이 나쁠 리야 없었다.
다음날 2차전. 백인천 감독은 또 특유의 승부를 걸었다. 부상에서 돌아와 시즌 첫 선발등판한 이용철에 이어 2회 김기범, 3회 문병권, 5회 이국성 등 주축 투수들을 줄줄이 투입했고, 4대 3으로 앞서던 6회초 무사 1,2루 위기를 맞자 정삼흠까지 조기 투입했다. 결국 6회와 7회 대량실점으로 경기는 6대 13으로 패배했다.
이러한 투수 운영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빙그레와의 4연전에서도, 해태와의 3연전에서도 연일 투수력을 다 쏟는 총력전이었다. 곧이어 4일간 휴식이 있다고는 해도 선발 로테이션을 다 망가뜨리는 운영이었고, 그나마 이겼으면 모르되 총력전을 펼친 경기에서 죄 패하고 말았다.
백인천 감독은 캐릭터가 강한 사람이었다. 감독이 등번호 2번을 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김동수는 입단 첫해에 12번을 달았다가 백인천 감독이 물러난 후에 2번을 썼다). 후일 다른팀 감독으로 가서 이대호 감량 논란 등 몇 가지 논쟁에 휩싸였지만 그 때 LG 팬들 사이에선 나름 인기가 좋았다. 우선 82년 팀 창단 첫 감독이었고, 아직 틀이 잡히지 않은 초창기였다고는 하지만 한국 프로야구의 유일무이한 4할타자 아닌가.
82년 백인천은 감독 겸 선수로, 공격 시에 3루 코치박스에서 작전을 내다 타순이 돌아오면 방망이를 들고 타석에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타격 5관왕을 했고 홈런은 2위를 했다. 2010년 타격 7관왕 이대호에 버금가는 타자였던 셈이다. 물론 1982년과 2010년은 리그 수준이 다르긴 했지만, 백인천은 1975년에 일본 프로야구에서 수위타자를 차지한 선수였으니 그 클래스를 의심할 수는 없다.
백인천은 84년 갑자기 간통사건에 휘말리면서 팔자에 없는 구치소에도 가고, 재산도 명예도 잃고 야구계에서도 퇴출됐지만 변론의 여지가 없지는 않다. 당시 일본에 머무르던 부인은 한국에 오고 싶어하지 않았다 하고, 백 감독은 사건의 당사자인 그 여성과 나중에 결혼까지 하게 된다. 90년 3월엔 새로 태어난 아기의 돌잔치가 조촐하게 열렸다고 신문에 나기도 했다. 후일 백인천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단순한 불장난이 아니라 자신은 인생을 건 사랑을 했고 다시 그 상황이 와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 이야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간통죄란 세계적으로 몇 나라 없는 희한한 처벌 조항으로 우리나라도 시간의 문제일 뿐 곧 위헌 판결이 날 것이니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그 하나로 송두리째 바뀌는 것은 조금 부당하지 않을까.
논란은 그게 아니라 그의 야구 지도 스타일이었다. 그 사건 이후 사무용 집기, 골프용품 등의 무역업을 하다 야구계에 돌아온 백인천은 일본에서 배운대로 ‘혼의 야구’를 추구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청운의 꿈을 품고 일본 야구계에 입단했는데, 그 때 도에이 플라이어스(현 니혼햄 파이터스) 감독은 2군 선수에겐 인사를 받지 않았다 한다. 2군 선수는 프로 선수라 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런 정신을 이어받은 백인천은 무엇보다 ‘정신력’을 강조했다.
시즌 전 전지훈련에서는 자신의 스파르타 훈련에 적극 동참하지 않은 오영일을 트레이드 시켜 버렸고, 하기룡은 의지는 있었으나 몸이 따르지 못하자 은퇴 후 코치로 고용했다.
‘90 시즌 초반 김용수가 제대로 나오지 못한 것도 백 감독에게 찍힌 탓이 크다고들 했다. 7대 2인가로 크게 앞서던 경기에 등판을 지시하자 김용수가 ’세이브 상황도 아닌데 굳이 왜 나가느냐‘고 불만을 표시했던 모양이다. 그 말에 백인천 감독이 대노하여 한달동안 김용수를 개점휴업 시키다시피했고, 김용수의 정신자세가 달라졌다고 판단이 되자 차차 등판을 시켰다. (전반기 마지막 경기 이병훈의 끝내기 2타점 2루타가 김용수에겐 결정적이었다. 그 경기에서 승리투수가 되며 여러 모로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과장이었겠지만 그 즈음에 심지어 '야구를 그만둘까'도 생각했다고 한다.)
최일언 김신부 김상훈 등등 팀의 주축 베테랑들을 ‘정신 상태가 썩어빠졌다’는 코멘트와 함께 2군으로 내려보낸 것도 웬만한 감독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간접적으로 들려온 말에 의하면 그 선수들은 승복을 할 수 없어 감독에 대한 불만이 대단했다 한다. 비싸게 데려온 투수 최일언이 계속 부진하자 시즌 중반엔 심지어 “1루까지 토끼뜀으로 50회 왕복을 할 수 있게 몸을 만들면 남은 기간 1승도 못해도 아무 상관 안하겠다”고 제의하기도 했다. (구체적인 숫자에 대해선 나의 기억이 틀릴 수도 있다.)
17사사구를 주며 졸전을 펼쳤던 5월 5일 롯데전 후 백인천 감독의 진단은 “투수들의 정신무장이 덜 되었다”는 것이었다. 사사구를 줄이기 위한 긴급 회의가 열렸는데 프런트에서는 ‘참선 교육을 보내자’고 제안했고, 조창수 수석코치는 ‘사사구 4개를 주면 자진해서 강판하는 제도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도 냈다 한다. 즉 기술적으로 뭘 다듬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 투수들의 정신력이 문제라는 게 백인천 감독의 진단이었다.
역시 시즌 초반인 5월 10일, 김태원이 잘 던지다 말고 유승안에게 투런홈런을 맞은 후 마운드에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그 모습을 본 백 감독이 화를 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태원으로선 홈런 맞은 원인을 스스로 진단하고 한 행동이었겠지만, 백인천은 홈런 맞은 투수가 분하고 억울한 표정이 아니라 그렇게 고분고분해서야 프로 선수라고 할 수 있겠냐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90년엔 백인천 감독의 그런 정신력 강조가 잘 맞아 떨어졌다. 김태원은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5이닝 투수라는 오명을 벗고 그 이후 몇 년간 팀의 에이스로 환골탈태했고 김용수도 초반 부진을 떨치고 선발투수로 보직을 옮겨 승승장구했으며, 무엇보다 만년 하위였던 팀이 완전히 바뀌었으니 말이다.
그에 맞춰 백인천에 대한 팬들의 인기도 하늘을 찔렀다. 시즌 초반 꼴찌로 추락했을 때 안티 백인천도 생겨났지만 원래 (나를 비롯한) 팬들이란 그때그때 성적에 따라 감정이 조변석개하는 지조 없는 갈대들이 아닌가. 연승이 이어지자 백인천 감독이 항의하러 그라운드에 나오기라도 하면 팬들의 성원이 쏟아졌다. 이기고 있는 경기 막판 전광판 선수 명단을 차례로 부르며 응원할 때엔 마지막에 반드시 '백인천'이 두 번씩 들어갔다. 다른 어떤 선수보다 “백인천”을 연호하는 목소리가 가장 컸다.
그래도 나는 백인천 하면 이 광고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비타민제 이름도 참..... 백인천 감독에 대한 팬들의 친근감엔 이 광고가 큰 역할을 했을 것 같다. 감독이 마음에 안 드는 결정을 내릴 때면 "야 게브랄티! 똑바로 안해?"하는 고함도 들려오곤 했다. "야 이 개부랄.....티!" 라는 고함에 늘 왁자한 웃음이 터졌다.
해태와의 7월 26일 마지막 잠실 3차전도 그랬다. 그날은 김태원 조계현의 숨막히는 투수전이었다. LG가 5안타, 해태가 7안타를 쳤지만 LG 윤덕규의 3루타를 제외하곤 전부 단타였고, 6회말에 나온 그 3루타에 김상훈의 희생플라이로 한 점을 낸 LG가 1대 0으로 이겼다. 해태는 두 번의 주루사가 나오는 등 경기가 꼬이며 김태원에게 끌려갔다.
0의 행진이 이어지다 6회말 마침내 LG가 한점을 득점하고 맞은 7회초. 단타 두 개로 위기가 찾아왔다. 그러자 백인천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갔다. 팬들은 김태원을 연호하며 투수 교체하지 말 것을 감독에게 압박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감독이 투수 교체 없이 그냥 내려오자 관중은 이번엔 백인천을 연호했다. 그 성원에 힘을 얻었는지 김태원은 이어진 두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처리하며 이닝을 끝냈다. 팬들은 열광했다.
그렇게 김태원은 두 번째 완봉승을 거뒀다. 시즌 8승째. 해태와의 시리즈는 2승 1패로 위닝.
빙그레에게 당한 4연패의 충격은 곧바로 이어진 위닝 시리즈로 최소화되었다. 1차전 김용수의 8이닝 1실점 9탈삼진 역투, 3차전 김태원의 완봉승 덕분이었다.
잠시 올랐던 1위 자리는 넘겨 주었고 선두와 승차도 꽤 벌어지긴 했지만, 팀에 찾아온 위기는 다행히 그럭저럭 잘 넘어간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