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가파도(加波島)
“섬은 바람으로 말을 걸고,
사람은 그 바람에 마음을 맡긴다.”
누군가는 청보리밭 사이를 걷고,
누군가는 파도소리 속에서 자신의 속도를 되찾는다.
가파도는 그런 섬이다.
加(가) : 더할 가
波(파) : 물결 파
島(도) : 섬 도
즉, ‘물결이 더해지는 섬’ 또는 ‘파도가 모이는 섬’이라는 뜻이다.
이름처럼 가파도는 늘 파도와 함께 살아온 섬.
제주 본섬 남서쪽에 자리해 바람이 세고 물결이 잦지만,
그만큼 생명력과 평화가 공존하는 섬 .
그래서 예로부터 “바다와 함께 더해지는 섬, 加波島”라 불려 왔다.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항에서 배로 10여분.
바람과 파도가 잠시 쉬어가는 섬, 가파도(加波島).
섬의 이름처럼,
가파도는 늘 파도와 함께 살아왔다.
해발고도 20m 남짓, 제주에서 가장 낮은 섬이지만 그 낮음 속에 오히려 깊은 평화가 깃들어 있다.
바람은 세지만 마음은 고요하고,
하늘은 가까워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하다.
섬은 작지만 그 안의 시간은 길다.
가파도의 봄은 초록으로 출렁인다.
3월에서 5월 사이, 섬 전체가 청보리로 뒤덮인다.
바람이 불면 보리 이삭이 파도처럼 흔들리며
진짜 바다보다 더 바다 같은 풍경을 만든다.
걸음을 멈추면 보리 향기와 파도 냄새가 한데 섞여 가슴속이 시원해진다.
섬 둘레 4.2km,
걸어서 한 바퀴 도는 데 두 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바다와 들판이 맞닿은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언제부터인가 생각이 고요해진다.
이 길을 걷는 건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는 일이다.
섬 남쪽 끝, 바다 위로 돌출된 흰 등대.
이곳에 서면 마라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멀리 제주 본섬이 아련히 보이고,
바람은 세차지만 따뜻하게 등을 밀어준다.
노을 질 무렵, 등대 불빛이 바다 위로 번지면
하루의 끝이 조용히 빛난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진 교정엔
지금은 여행자들의 발자국이 남는다.
옛 학교 건물은 작은 전시관으로 바뀌어
섬의 과거와 오늘을 잇는 기억의 공간이 되었다.
칠판엔 여전히 “행복하자, 우리”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섬 서쪽 해안 절벽에 서면
대한민국의 최남단, 마라도가 눈앞에 펼쳐진다.
날씨가 맑은 날엔 두 섬 사이 바닷길이 반짝이고,
해 질 녘 붉은빛이 번지면
마치 세상의 끝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기분이 든다.
행정구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
면적: 약 0.84㎢
인구: 약 200명 내외
지형: 해발 20m의 평탄한 저지대 / 청보리밭과 해안 절벽이 조화된 섬
교통: 모슬포항에서 여객선 약 10분 / 1일 4~6회 왕복 운항
대표 여행지: 청보리밭, 등대전망대, 가파도 올레길, 가파초등학교, 마라도 조망 포인트
가파도의 삶은 바람과 함께 흘러간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보리를 심고 고기를 잡으며 살았다.
이곳의 청보리는 단지 풍경이 아니라 생업의 흔적이었다.
지금도 섬사람들은 바람의 방향을 보고 하루를 시작한다.
섬에는 신호등도, 편의점도 거의 없다.
그 대신 이웃의 웃음소리, 갈매기의 울음,
그리고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섬의 배경음악이 되어준다.
봄, 바람이 따뜻해질 무렵
섬은 초록빛으로 물든다.
그 시기엔 ‘가파도 청보리축제’가 열려
섬 전체가 들판이 되고, 사람들의 웃음이 바람을 타고 흐른다.
보리밭 사이로 걷다 보면
마치 초록빛 바닷속을 헤엄치는 기분이 든다.
가파도의 봄은 그렇게,
시간을 천천히 움직이게 만드는 계절이다.
가파도의 하루는 단순하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고, 노을이 진다.
하지만 그 단순함 속에서
사람들은 마음의 균형을 되찾는다.
바람은 말없이 속삭인다.
“가파도의 시간은 느리지만,
그 느림이 평화의 시간이다.”
아주 오래전, 가파도에는 바다를 사랑한 한 여인이 살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여차부인(汝次夫人)’이라 불렀다.
그녀의 남편은 바다를 누비던 어부였고,
둘은 바람처럼 자유롭고 파도처럼 다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풍랑이 섬을 덮쳤다.
남편은 고기잡이를 나간 채 돌아오지 못했다.
그날 밤, 여차부인은 바다를 향해 기도를 올렸다.
“이 바람이 멎고, 파도가 그치면
당신의 노를 다시 볼 수 있을까요.”
하지만 새벽이 밝아와도 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절벽 끝에 서서 하루, 또 하루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 앉아 머리를 풀고,
손끝으로 바닷물에 이름을 새기며,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렸다.
세월이 흘러,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사람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바다의 정령이 되어
지금도 가파도의 남쪽 해안을 지킨다고 한다.
바람이 거세게 불 때면
그녀의 긴 머리칼이 파도처럼 흩날리고,
섬의 등대 너머에서 낮게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파도가 멈추면,
나도 그를 만나겠지…”
그래서인지 가파도의 바다는 언제나 살아 있는 듯 출렁인다.
사람들은 그 바람과 물결 속에서
여차부인의 한숨과 사랑의 속삭임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풍랑이 심한 날이면 바다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부디 오늘의 바다도,
누군가의 기다림이 되지 않기를.”
여행에세이, 섬, 여행감성
― 《섬 thing Special》: 《바람의 섬, 가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