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이 길에 서다
매일 운전을 한다.
출퇴근도, 모임도, 여행도—
가까운 마트까지 가는 길도 늘 내 손끝에서 시작된다.
핸들을 잡는 순간
길은 소리 없이 내 속도에 맞춰 흐르고,
나는 그 흐름 속에서 하루를 정리한다.
그래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일은 거의 없다.
낯선 속도에 몸을 실어본 적도 오래다.
얼마 전, 지인의 결혼식에 가게 되었다.
자리 분위기상 평소 잘 못 마시는 술을
한 잔쯤은 해야 할지도 몰라,
모처럼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작은 자유에 살짝 설렘까지 일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부천에서 송파까지 가는 길.
지인에게 어떻게 가는지 물었더니
무려 10가지가 넘는 ‘가능한 경로’를 줄줄 설명하는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갈아타고,
어딘가에서 버스로 환승하고,
또 어떤 방향으로 걷다가 지하로 다시 내려가고…
그 설명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의 지도가
순간적으로 고장 난 기분이 들었다.
평소 눈칫수는 좀 있다는 말을 듣곤 했는데,
이번엔 은근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어떤 길이 가성비가 좋을까?”
그동안 내가 너무 무지하게 살았던 걸까.
대중교통은 누구나 타는 게 아니라,
‘익숙함’이라는 능력이 필요한 영역이란 걸
그제야 깨달았다.
여러 잔소리를 들은 끝에
나는 결국 카카오맵을 깔았다.
세상 사람들 절반은 쓴다는 그 앱을
이제야 처음 켜본 것이다.
이 작고 귀여운 지도 아이콘이
오늘의 불안을 조금 줄여주길 바라며.
그런데 앱 속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넓고 친절했다.
도착 알림부터 실시간 이동 경로까지—
말 그대로 신세계였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시간도 단축되었고,
길을 헤맬까 조바심 나던 마음도
금세 안정되었다.
그렇게 나는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식장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마음의 자세를 고쳤다.
평소에는 조금만 권해도 얼굴이 붉어지곤 했지만
오늘은 대중교통까지 타고 온 마당에,
한 잔쯤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정말 아무도.
나에게 술을 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를
‘평상시 술을 잘 못 마시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고,
게다가 오늘도 당연히 차를 가져왔을 거라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착한 오해가 어찌나 단호하던지,
내가 오늘만은 조금 다른 마음으로 왔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순간 살짝 허탈했지만 웃음이 났다.
“아… 내가 준비를 너무 철저히 했나?”
변화라는 건 때때로 나 혼자만 아는 조용한 일이고,
어떤 날은 아무도 모르게 스쳐 지나가는
작은 사건에 그치기도 한다.
그래도 물 한 잔을 들고 식장을 천천히 둘러보는 동안
그 낯섦이 오히려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주었다.
누군가의 사소한 하루가
오늘의 나에게는 나름의 모험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신발을 벗는 순간,
복잡했던 하루의 끈을
조용히 내려놓는 기분이 들었다.
냉장고를 열어 귤 하나를 꺼냈다.
껍질을 벗기다가
‘슥—’ 하고 떨어져 나가는 소리에
작은 한숨이 자연스레 섞였다.
하루의 복잡함이 함께
벗겨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아, 고독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껍질을 하나씩 벗기며
마음의 층을 가볍게 덜어내는 일.
그때, 손끝으로 전해지는 온기.
눈처럼 하얀 우리 아름이가
조용히 내 옆으로 와 앉았다.
귤 한 조각을 쪼개
아름이 입에 넣어주었다.
아름이는 천천히, 아주 맛있게 받아먹었다.
그 모습이
오늘의 마지막 남은 외로움까지
따뜻하게 삼켜주는 것만 같아
절로 웃음이 났다.
귤 한 조각을 천천히 씹으며 생각했다.
오늘의 고독도
이렇게 조금씩 벗겨내면 그만인 거라고.
한 조각씩, 천천히.
지하철 환승도, 버스 갈아타기도,
수십 가지 경로도
결국 귤 한 조각으로
부드럽게 마무리될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고독해서 그래.
그리고 집에 귤이 있고,
아름이가 있어서
— 참 다행이다.
감성 에세이, 일상, 고독
― EP.20《고독해서 그래》: 《고독은 귤껍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