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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해서 그래/고독이 끓는 온도는 정확히 100도다

혼밥, 그리고 라면 예찬

by 이다연

고독이 끓는 온도는 정확히 100도다


퇴근길 ,

엘리베이터 안의 공기는
늘 그렇듯 무겁다.


누군가는 오늘의 회식 장소를 말하고,
누군가는 집 앞 마트를 떠올린다.

그리고 나는, 선언한다.

“오늘은…
라면이 좋겠다.”


그 짧은 문장 안에는
귀찮음, 피로,

그리고 위로가 함께 들어 있다.
라면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나답게 살아내는 의식이다.


혼자 먹는다고 대충 먹는 건 아니다.
나는 내 저녁식탁을

하나의 작은 의식처럼 차린다.


라면 한 봉지라도
물의 온도는 100°,
달걀은 노른자가 살아 있는 반숙.


김치는 젓가락으로 네 번만 집는다.
그 이상은 욕심이고,

그 이하는 예의가 아니다.


식탁 위 한 그릇의 라면.
그건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라,

세상이 나에게 건네는

‘퇴장 허가서’가 된다.



1958년. 일본 오사카의 작은 창고.
안도 모모후쿠라는 한 남자가

‘치킨라면’을 만들었다.

그 한 그릇의 뜨거운 국물이

전쟁 후 굶주린 세대를 살렸고,

“혼자 먹는 사람도
인간답게 먹을 권리가 있다.”

라는 선언이 되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편의점 앞에서,
새벽의 작업실에서,
이별 후 빈 방 한가운데서

면발을 후루룩 삼키며 하루를 버틴다.


라면은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음식이 되었다.


나의 라면은 결이 조금 다르다.

냄비에 들기름 한 숟갈.
향이 고소하게 피어오르면
잘게 썬 파를 볶는다.

그다음 물을 붓고, 수프를 투척.


면이 익어갈 때쯤 달걀을 풀지 않고 그대로 떨어뜨린다.

노른자가 해처럼 둥글게 떠오르면,

그날의 고독도 해를 따라 환해진다.


라면을 다 끓이고 나면
얼마큼의 면을 건져 물에 헹군다.
수프의 짠맛을 완전히 빼고
부드럽게 식힌 라면 몇 가닥.

그건 우리 아름이 몫이다.


어느새 노견이 된 울 아름이.

예전처럼 잘 뛰지는 못하지만,

라면 냄새가 퍼지면
아직도 천천히, 그러나 정확하게
내 곁으로 다가온다.

의례 자기 몫을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름이 앞에 작은 접시를 놓아주고 말한다.

“아름아,
너도 오늘 고생했지?”

아름이는 조용히 자기 면을 받아먹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라면을 먹는 게 아니라,
서로의 고독을 나누어 먹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나의 그릇에서
아름이는 아름이의 작은 접시에서
같은 온기를 나눠 가진다.


라면이 식탁 위에서
‘식사’가 아니라 온기가 되는 순간이다.


누군가 내게 묻는다.

“혼자 먹으면 맛있어요?”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혼자 아니고,
둘이라서 더 맛있어요.”


라면은 내게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고독을 끓이는 방식이다.

보글보글, 그 소리에
오늘의 피로가 녹아내리고
내일을 버틸 힘이 함께 익어간다.


고독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견디는 것.


고독해서 그래.
그리고 아름이가 있어서,
라면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감성 에세이, 일상, 고독

― EP.19《고독해서 그래》: 《고독이 끓는 온도는 정확히 100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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