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27.《연말 입장권은 분실했습니다만》
연말 입장권은 분실했습니다만
연말이 되면 괜히 바빠진다.
딱히 할 일은 없는데
마음이 먼저 분주해진다.
달력은 말이 없다.
그런데 표정은 꼭
“이제 마무리해야지?”
이런 얼굴이다.
12월 마지막 장을 넘기다 멈췄다.
체크해 둔 날보다
아무 표시 없는 날이 더 많았다.
‘올해는 꼭’으로 시작했다가
‘내년에 하지 뭐’로 끝난 일들.
괜히 달력한테 변명하고 싶어졌다.
“나름 열심히 살긴 했어.”
연말이면 연락 올 것 같은 사람도 떠오른다.
연락 오면 반가울 것 같고,
막상 오면 또 당황할 것 같은 사람들.
먼저 할까 말까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결국 안 했다.
연락하지 않았다고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니까.
그냥…
연말이라 바쁠 그들을 배려했을 뿐이다.
크리스마스도 슬쩍 지나갔다.
트리는 없고,
대신 스탠드 조명 하나 켜 놓고
귤을 까먹었다.
혼자라서 외롭다기보다는
이렇게까지 조용해도 되나 싶었다.
그래도 조명 불빛이 은근히 예뻤다.
이 정도면 트리 역할은 한 셈이다.
송년회도 슬쩍슬쩍 빠졌다.
“이번엔 꼭 와야지?”
라는 말에
“이번엔 진짜 힘들어서…”
라고 답했다.
사실 힘든 건 맞다.
올해는 사람 많은 데 가는 게
왠지 부담스럽다.
연말 모임에 안 가는 데에는
나름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연말만 되면
학연, 지연, 혈연을 총동원해 모인다.
마치 그 셋 중 하나는
반드시 소지해야 입장 가능한 연말 입장권처럼.
문제는 나는 그 입장권이 하나도 없다는 거다.
모임에 가면 대화는 대체로 이런 순서로 흘러간다.
“요즘 애가 사춘기라서…”
“아, 우리 애도 그래.”
“학원은 어디 보내?”
“아, 거기 요즘 인기잖아.”
그 사이에서 나는
컵에 든 음료를 천천히 마신다.
너무 빨리 마시면 괜히 더 빨리 말을 걸 것 같아서.
“다연 씨는… 애는?”
“없어요.”
“아, 아직이구나.”
아직은 무슨 아직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인다.
“결혼은?”
“안 했어요.”
“아… 그래도 요즘은 안 해도 되지 뭐.”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자연스럽게 말을 잇는다.
“우리 때랑은 다르지.”
“그래도 나중에 후회 안 할까?”
“그래도 혼자는 좀 그렇잖아.”
해마다 듣는 질문들,
그 사이에서 나는 웃으며 생각한다.
'사실 지금 이 자리가 더 그런데요.'
대화는 어느새 남편 이야기로 넘어간다.
“우리 남편이 말이야…”
“시댁에서 또 뭐라 해서…”
“어머님이 이번에 병원 가셨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적당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군요’와 ‘아, 힘드시겠어요’
사이의 가장 무난한 얼굴.
그래야 이 질문을 피할 수 있으니....
그러다 한 번씩 이런 질문도 나온다.
“그래서 다연 씨는 요즘 뭐 해?”
그때 잠깐 고민한다.
솔직하게 말할까, 대충 넘길까.
“저는…
요즘 저를 좀 키우고 있어요.”
그 말에 서늘함 속에 공기가 살짝 멈춘다.
“아… 그렇구나.”
“자기 계발 좋지.”
“그래도 여자 혼자서는…”
그 뒤의 나의 말은 굳이 끝까지 듣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연말 모임 대신 집으로 가는 쪽을 택했다.
집에 돌아와 코트 벗고, 신발 벗고,
소파에 털썩 앉아,
컵라면에 김치 올려 먹으며 생각했다.
아, 조용하다.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는다.
“결혼은 아직?”
“애는 생각 없어?”
“혼자 안 외로워?”
그 대신 내가 나에게 묻는다.
“올해 어땠어?”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배우고 싶었던 걸 배웠고,
미뤄둔 공부도 다시 시작했고,
나를 위해 쓴 시간이 꽤 많았다.
올해엔,
“이게 더 나은 송년회다.”
연말 결산은 시도조차 안 했다.
잘한 일보다
못한 일이 먼저 떠오르는 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올해는
정리 대신 연습만 하기로 했다.
올해를 보내는 연습.
완벽하지 않아도,
계획대로 안 돼도,
중간에 귀찮아진 날이 많아도
그래도 여기까지 온 거면
꽤 괜찮은 한 해였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연습.
고독해서 그래.
달력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생각보다 잘 버텼네.
연말이라고 꼭
진지해질 필요는 없잖아.
웃으면서 보내도,
충분히 연말이다.
감성 에세이, 일상, 고독
― EP.27. 《고독해서 그래 》 《연말 입장권은 분실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