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29.《약속을 다음 약속의 담보로 쓰지 않기로 했다》
약속은 대개 소란 없이 깨진다.
다툼도, 큰 말도 필요 없다.
그저 말 한마디가
조금 늦게 도착할 뿐이다.
“오늘은 좀 어려울 것 같아.”
“다음에 보자.”
“상황이 바뀌었어.”
그 말들이 쌓이면
약속은 사라지고,
남은 건 기다린 사람 하나다.
나는 약속을 잘 지키려고 노력하며 살아왔다.
성실해서라기보다
내가 한 말을
내가 기억하기 때문이다.
시간을 정하면
그 시간에 맞춰 하루를 조정하고,
날짜를 정하면
그날을 비워두었다.
약속은 늘
미래의 나에게 넘기는 책임 같았다.
그래서 바뀔 땐
설명이 필요하고,
사과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세상에는
약속을 상태처럼 다루는 사람들이 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 말은 부드럽고
상황은 늘 이해를 요구한다.
이상하게도
약속을 바꾼 사람은 편안하고,
약속을 지키려던 사람이
조심스러워진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예민한 건지,
상황을 잘못 읽은 건지
자주 헷갈리기 시작했다.
카페에서 기다리던 날이 있었다.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고,
커피를 시켰다.
“조금 늦을 것 같아.”
괜찮았다.
사람은 늦을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흘렀고,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아서
다음에 볼까?”
그날 나는 커피를 마셨고,
시간을 보냈고,
그 약속 안에서 이미 살고 있었는데.
상대는 말했다.
“왜 그렇게 심각해?”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설명해야 할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서운한 이유를, 불편한 지점을,
왜 그게 문제인지.
약속은 이미 없는데 설명만 남았다.
이런 일은 관계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나는 그 약속을 믿고
다음 약속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확정입니다.”
그 말을 믿고 거래처에 말했다.
“그 날짜로 진행 가능합니다.”
그리고 다시, 같은 말이 돌아왔다.
“다시 생각해 보니까
그날은 좀 어려울 것 같아.”
그 순간부터 나는 중간에 서게 된다.
설명하는 사람,
사과하는 사람,
조율하는 사람이 된다.
약속을 바꾼 사람은 뒤에 있고,
약속을 전달한 사람만 앞에 서 있다.
이 일이 반복되면
사업에서는 이름이 붙는다.
“변수가 많은 쪽."
"확정이 늦는 곳.”
“조율이 잦은 사람.”
그 이름은
약속을 바꾼 사람에게 가지 않고,
그 약속을 믿은 사람에게 남는다.
나는 어느새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변화를 관리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조금씩 정리하기로 한다.
약속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과는
약속을 잡지 않는다.
설명하지 않고, 설득하지도 않는다.
그건 냉정함이 아니라 생활의 정리다.
약속을 지키는 삶은 때로 고독하다.
사람을 줄여야 하고,
기대를 낮춰야 하고,
혼자 결정해야 할 일이 많아진다.
그래도 나는 그 편을 선택하기로 한다.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예민한 게 아니다.
약속을 시시각각 바꾸면서도
문제의식이나 반성 없이
그 상황을 넘기는 태도가 가벼운 것이다.
나는 여전히 약속을 지킨다.
다만 이제는 그 약속을
다음 약속의 담보로 쓰지 않는다.
고독해서 그래.
그래도
내가 한 말을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쪽이
조금 더 나답다고 느껴서...
감성 에세이, 일상, 고독
― EP.29. 《고독해서 그래 》 《약속을 다음 약속의 담보로 쓰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