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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hrjung Oct 22. 2023

저는 싫어 bot입니다

2023년 8월 31일. 무직 되기 D-1

2019년 4월. 나는 베를린에 살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 4년 넘게 이곳에 살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맥주, 클럽을 좋아하지도,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밖에서 노는 것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집에 가만히 앉아 참새들 모이 주는 거나 즐기며 독일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처럼 CCTV를 자처하며 지낼 뿐이다.


19년도에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이곳에 와서 독일어를 배웠다. 왜 배웠냐고? 언젠가 독일어 원서를 읽고 싶어서였던 것 같기도 한데 솔직히 4년 넘게 여기 사는 동안 기껏해야 B1까지 밖에 배우지 못했다.

몇 개월 살다 보니 평화롭고 - 베를린 모든 곳이 복잡하고 클럽이 많은 건 아니다 - 공원 많은 이곳에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직장을 구했고 운 좋게도 코로나 직전에 베를린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 인생에서 운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런데 나는 몇 년 동안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당분간 무직을 직업으로 갖기로 결정했다. 그러고 보면 살면서 단 한 번도 미래에 대한 그 어떤 계획 하나 없이 무작정 직장을 그만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솔직히 말해 인플레이션이니 세계 경제 위기니 하는 것들 때문에 나중에 직업 구하는 게 어려우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 하나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냥 더 이상 이렇게는 안될 것 같았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는 안될 것 같은데?


일에 대한 열정, 그런 걸 마지막으로 가진 게 도대체 언제일까? 난 그저 몇 년 동안 책임감 하나 만으로 일을 꾸역꾸역 해냈을 뿐이었다. 특히나 베를린에 오고 난 이후로는, 무능한 코리안, 게으른 코리안이라는 나라 이미지를 다른 외국인들에게 주고 싶지 않아서 - 내가 베를린에서 일했던 두 회사 모두 한국인 개발자는 나 하나뿐이었다 - 더욱이 책임감을 갖고 일을 해냈다.


다른 개발자들을 보면 따로 시간을 내 개발 공부도 하고, Hobby Project도 하고, 주말에 새로운 오픈소스를 발견했다며 좋아하며 동료들에게 공유해 준다.

하지만 나는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개발 공부도 시간 내서 하지 않고, 사람들과 논쟁하며 이 기술이 좋니 저 기술이 좋니 하면서 회의하는 것도 싫고, 페어프로그래밍 하는 것도 간 쫄려서 싫고, 내게 누군가 기술 관련 질문을 하는 것도 싫고, 누군가를 인터뷰하는 것도 싫어졌다- 내가 인터뷰당하는 거는 당연 싫다 -.


일 뿐만이 아니었다. 회사 사람들과 워크숍으로 하이킹 가는 것도 싫고 -  그래도 가끔은 일 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 회식도 싫고, 크리스마트 파티니, 신년파티니 하는 것도 다 싫다. 다행히 베를린에서 다녔던 회사들은 그 누구도 파티나 워크숍에 오는 것을 강요하지 않았어서 대부분을 불참했지만 말이다 - 생각해 보면 신년 파티는 단 한 번도 참석해 본 적 없는 것 같다 -.


최근 몇 년은 어쩌다 보니 스포츠 신발/의류 회사에 들어가 e-commerce 플랫폼 관련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스포츠 회사 특성상 이곳 사람들은 점심시간에 삼삼오오 모여 달리기를 하러 나갔다. 맙소사... 인생 최고의 운동은 숨쉬기라고 생각하는 인간에게 달리기라니.... 게다가 다 같이 모여 달리기를 해야 한다고? 물론 난 무릎이 아프다는 핑계로 - 핑계 아니고 사실이다 - 단 한 번도 참여를 해본 적이 없긴 하다.


결국 나는 싫어 bot이 되어 있었다. 일하기 싫어요, 회의하기 싫어요, 공부하기 싫어요, 인터뷰하기 싫어요, 사람 만나기 싫어요, 달리기 하기 싫어요, 싫어요, 싫어요.


물론 10년 차 시니어 엔지니어다 보니 싫어 bot 속내를 숨기고는 제23의 자아를 꾸역꾸역 꺼내어 어찌어찌 살아왔는데.... 이제 더 이상은 이렇게는 못 살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5월 중순, 나는 매니저에게 나는 퇴사를 신청했다.

* 독일은 최소 3개월 전 퇴사 신청을 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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