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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복스 : 의리 있는 브랜딩

쉽사리 꺾이지 않는 그녀들

by 온시프트

1. 시작과 도전 : 파격적인 변신


1) 대중의 외면

1997년, 한국 가요계에 새로운 걸그룹이 등장했다. 베이비복스(Baby V.O.X)라는 이름의 이 그룹은 후에 S.E.S., 핑클과 함께 1세대 걸그룹의 황금기를 이끌어갈 존재였지만, 30대가 넘어가는 이들이라면 알다시피 이들의 출발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초기 베이비복스의 음악과 콘셉트는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다. 1집 '머리 하는 날'은 당시 유행하던 밝고 경쾌한 댄스곡 스타일을 따랐지만, 기대만큼의 반응은 얻지 못했다. 대중의 관심을 끌기에는 다소 애매했으며, 무엇보다 베이비복스의 컬러가 그다지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걸그룹 시장에서는 S.E.S.의 청순함과 핑클의 사랑스러운 이미지가 강세를 보이고 있었고, 지금이라면 이해할지 모르지만 상대적으로 많이 차별화된 스타일을 시도했던 베이비복스는 대중들에게 확실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릴 위기에 놓여있었다. 원래 SES나 핑클보다 선배였던 점을 고려하면, 당시 베이비복스가 더 늦게 데뷔했다고 생각했던 내가 이해가 간다. 초기의 정체성 부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였다 볼 수 있는 것이다.


2) 보수적인 가요계를 흔든 과감한 시도

주춤하는 상황에서도 베이비복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실패를 딛고 재도약하기 위해 2집부터는 멤버 교체를 단행했고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새로운 멤버들과 함께 팀워크를 다지면서 컨셉 역시 보다 세련되고 완성도 높은 방향으로 재정립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곡이 'Ya Ya Ya'였고, 이 곡을 통해 베이비복스는 서서히 대중의 눈에 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3집에서 결정적인 터닝 포인트를 맞이했다. 나에게는 최애의 곡 중 하나였던 'Get Up' 그리고 'Killer'가 연이어 큰 인기를 끈 것이다. 특히 ‘Get Up’은 중독성 강한 멜로디와 강렬한 퍼포먼스로 큰 주목을 받았고, 이 곡의 성공을 통해 베이비복스는 걸그룹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저 음악 스타일의 변화에 그치지 않았으며, 멤버들의 스타일링 역시 기존 걸그룹들과는 차별화한 방향으로 변한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핑클이나 S.E.S.가 맑고 순수하고 비교적 깜찍한 이미지를 강조했다면, 베이비복스는 좀 더 세련되고 카리스마 있는 스타일을 선보였다. 가죽 재킷, 짙은 스모키 메이크업, 강렬한 헤어스타일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스타일링을 시도하며 독창적인 정체성을 띄어갔다. 이러한 과감한 시도는 보수적이었던 당시 한국 대중음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여성 아티스트의 이미지와 표현 방식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계기가 되었다.


2. 하나의 유기체 : 어려움 속에서 피어난 연대


1) 불완전한 시스템

베이비복스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선구적인 위치에 선 1세대 걸그룹으로, 그들의 여정은 단순한 성공 스토리가 아닌 끈끈한 유대감과 팀워크의 발전 과정이었다. 초창기 베이비복스는 여러 차례 멤버가 바뀌는 혼란의 시기를 겪었지만, 결국 김이지, 심은진, 윤은혜, 이희진, 간미연으로 구성된 5인조로 안정화되면서 진정한 단합의 시대를 맞이했다.


당시 한국의 걸그룹 시장은 지금과 같은 체계적인 트레이닝 시스템이나 전문적인 매니지먼트 구조가 완벽히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현재의 아이돌 그룹들이 데뷔 전부터 수년간의 훈련을 거치고 전문 스태프들의 지원을 받는 것과는 달리, 베이비복스는 상대적으로 미성숙한 환경에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 했다. 정말 각종 고난의 굴레에서 스스로 성장하고 발견하고 경험해 나가야 하는 때였다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시 베이비복스를 포함한 많은 걸그룹들은 지금의 아이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실무적 책임을 직접 감당해야 했는데, 무대 의상을 직접 구상하고 준비하는 것은 물론, 때로는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링도 서로 도와가며 해결해야 했다. 스케줄 관리, 퍼포먼스 연습, 방송 출연 준비까지 많은 부분을 멤버들 스스로 챙겨야 했던 시대였다.


2) 결속의 시험대

특히 데뷔 초기, 멤버들의 결속력은 어려움 속에서 더욱 강화됐다. 대중적 인지도가 낮았던 시절, 때로는 공연 기회조차 얻기 힘든 상황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의지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관계가 더욱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팬들은 특정 멤버를 과하게 편애하며 내부 불화설을 조장하거나, 온라인상에서 루머를 퍼뜨리는 등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특히 멤버 윤은혜는 활동 중 괴롭힘을 당한 사례로 유명한데, 방송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정체불명의 팬에게 협박을 받거나 위험한 장난을 당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당시 팬 문화가 체계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K-POP이 점차 성장하면서 팬덤 문화도 성숙해졌지만, 베이비복스는 그 과도기적 시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든 부정적인 측면 든 간에 강한 팬덤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그룹 중 하나였다. 그렇게 그녀들은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고, 깊은 좌절 속에서도 함께 웃을 수 있는 관계로 발전해 나가면서 베이비복스는 각자도생 하지 않고,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팀으로 변해갔다.


분명 굉장히 폭풍 같은 시기였겠지만, 동시에 베이비복스 멤버들은 이 과정에서 뛰어난 자립심과 책임감을 키워나갔다. 이러한 숨 쉴 틈 없는 환경에서 오히려 멤버들은 더욱 단합하고 뭉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본다. 물론 다른 아이돌 그룹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메인 보컬을 맡았던 김이지는 그룹의 중심축으로서 안정감 있는 리더십을 보여주었고, 막내라인이던 윤은혜와 간미연은 각각 독특한 개성으로 그룹의 이미지를 다양화했다. 시크한 매력의 이희진과 솔직 담백한 심은진까지, 다섯 멤버는 각자의 색깔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그룹으로서 조화로워지는 법을 저절로 터득해 갔다. 이러한 밸런스 있는 그들의 호흡은 무대에서의 완성도 높은 퍼포먼스로 이어졌고, 베이비복스 특유의 카리스마와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3. 해외 진출 : 가요계 선구자?!


1) 한류의 시작?!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한국 대중문화가 세계적인 흐름으로 발전하기 이전의 시기에 베이비복스는 K-POP의 해외 진출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낯선 땅에 씨앗을 뿌리는 것 마냥 개척해 나갔다. 당시에는 '한류'라는 용어조차 생소했던 때로, K-POP이 글로벌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기 전 초창기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베이비복스는 국내 인기에 안주하지 않고 해외 시장, 특히 아시아 지역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며 한국 걸그룹의 글로벌 가능성을 최초로 증명해 보였다.


베이비복스의 해외 진출은 무모한 도전처럼 보였다. 당시 아시아 음악 시장은 서구의 팝 음악과 현지 아티스트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한국 가수들에 대한 인지도나 관심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대형 기획사의 체계적인 지원이나 전략적인 마케팅이 부족한 상황에서, 베이비복스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음악적 색깔과 퍼포먼스로 해외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했다.


중국은 베이비복스가 가장 먼저 성공적으로 진출한 시장이었다. 중국에서 베이비복스의 인기가 높아진 데에는 갖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그들의 음악은 중국 청중들에게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갔는데, 카리스마 있는 퍼포먼스와 당시 중국 가요계에서는 보기 드문 섹시하면서도 파워풀한 여성 이미지는 중국 젊은 세대들에게 특별한 인상을 남겼다. 사실 한국 가요계에서도 큰 파란이었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상당히 이질적이면서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2) 한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가능성

베이비복스의 해외 활동은 상업적 성공을 뛰어넘어 문화적 의미 역시 갖추고 있다. 그들은 한국 대중문화의 세계화 가능성을 처음으로 실증적으로 보여준 선구자였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한국 문화 콘텐츠의 해외 수출은 일부 드라마에 국한되어 있었고, 음악 분야에서의 성공 사례는 드물었다. 가령 <사랑이 뭐길래>, <겨울연가>, <대장금>과 같이 말이다. 이때 베이비복스는 K-POP이라는 이름으로 글로벌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했고, 한류라는 문화 현상의 초석을 다진 가수로서 입지를 굳건히 다질 수 있었다.


베이비복스의 해외 진출 경험은 이후 등장한 걸그룹들에게 소중한 선례가 되었다. 원더걸스, 소녀시대, 2NE1, 블랙핑크와 같은 후배 걸그룹들은 베이비복스가 개척한 길을 따라 더 넓은 세계 시장으로 나아갔다. 물론 시대가 점점 변화하면서 소셜 미디어 발달,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 보편화 등 K-POP의 글로벌 확산을 돕는 다양한 장치들이 등장했지만, 베이비복스가 물꼬를 튼 한국 걸그룹의 해외 진출이라는 흐름은 이에 박차를 강하게 가한 추진체 같은 역할을 했다.


4. 게임 : IP 활용


2000년대 초중반,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아직 콘텐츠 간 융합이라는 개념이 본격화되기 이전이었다. 대부분의 아이돌 그룹들은 음악 활동과 방송 출연, 광고 모델 정도의 활동에 국한되어 있었고, 그들의 브랜드 가치가 다양한 미디어 플랫폼으로 확장되는 사례는 드물었다. 이러한 시기에 베이비복스는 음악과 게임 산업 간의 경계를 허물며 K-POP 아티스트의 IP(지적재산권) 활용에도 열심히였다.


당시 한국 온라인 게임 시장에서 급부상하던 리듬 음악 게임 '오투잼'(O2 Jam)은 베이비복스의 음악을 게임 콘텐츠로 적극 활용했다. '게임오버', '가까이', '야야야', '인형', '퍼즐' 등 베이비복스의 대표곡 5곡이 게임 내에서 플레이 가능한 트랙으로 서비스되었고, 이를 위한 정식 음원 사용 계약이 체결하기도 했다. 이는 어린 친구들에게 더욱 접근성을 용이하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하며, 아티스트의 정체성과 게임 콘텐츠가 유기적으로 결합한 특별한 콜라보레이션이기도 했다. 오투잼에도 있지만, EZ2DJ라는 당시 10대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리듬게임에서는 Love & Extasy가 실리기도 했다. 당시 리듬게임을 그렇게 즐겨하지 않았던 나는 그냥 그 노래들이 있다는 정도만 안다.

5. 개인 활동 : 그녀들의 영향력


1) 개인 커리어 확장

베이비복스는 2004년 이후 점차 활동이 줄어들었고, 결국 2006년 공식적인 해체를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룹 활동이 종료된 이후에도 베이비복스가 남긴 영향력은 K-POP 역사 속에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결혼을 한 멤버들이 있는가 하면, 배우의 길을 걸어간 멤버도 있고, 뮤지컬과 솔로활동을 이어간 멤버들도 있었다. 윤은혜는 배우로 전향하여 '프린세스 아워즈', '커피프린스 1호점' 등의 작품으로 큰 인기를 얻었고, 간미연은 솔로 가수와 방송인으로 활약했다. 심은진은 뮤지컬 배우로, 김이지는 주부로, 이희진은 사업가로 각자의 영역에서 새로운 도전을 이어간 것이다.


이처럼 멤버들이 그룹 활동 이후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간 것은, K-POP 아이돌의 진로 다양화에 대한 중요한 선례가 되기도 했다. 특히 윤은혜의 배우 전향 성공 사례는 많은 아이돌들이 연기 분야에 도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현재 K-POP 산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이돌 출신 배우'라는 커리어 패턴의 초기 모델이라 볼 수 있다.


2) Z세대가 발견하는 베이비복스의 매력들

베이비복스의 팬들.. 즉 '베이비앤젤스'는 그룹 해체 이후에도 그들의 음악과 활동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아니 여전히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디지털 플랫폼이 발달함에 따라 팬들은 과거 베이비복스의 공연, 방송 출연, 인터뷰 등을 온라인에 아카이빙하며 다음(Daum)카페에 그들의 유산을 보존하고 새로운 세대에게 소개하고 있다. 현재진행 중인 개인활동까지 모두 말이다.


이러한 팬 주도의 아카이빙은 베이비복스의 문화적 영향력이 지속될 수 있게 한 중요한 요인이다. 유튜브,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베이비복스의 콘텐츠가 지속적으로 공유되면서, 그들의 음악과 퍼포먼스는 시간이 지나도 그리고 현재의 복귀까지 합쳐 계속해서 재생산하고 있다.


최근에는 '레전드 무대', '숨은 명곡', '방송 사고' 등의 키워드로 베이비복스의 과거 활동을 재조명하는 경우가 늘고 있으며, 이를 통해 Z세대 K-POP 팬들도 베이비복스의 매력을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 1세대 K-POP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재평가의 흐름 속에서, 베이비복스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


지금이라도 베이비복스는 단순히 한 시대를 풍미한 아이돌 그룹이 아니라, K-POP 글로벌화의 기틀을 마련한 선구자로 평가받아야 한다. 그들이 열어놓은 길을 따라 후배 그룹들이 세계 무대로 도약했고, 현재는 BTS와 블랙핑크가 그 정점을 찍고 있다. 물론 그들은 분명 그 팬덤이나 확장성이 더 커서 베이비복스를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냐 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베이비복스의 도전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들의 도전은 때로는 많은 이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으며, 그들의 전례 없는 시도들 역시 당시 한국 가요계에서는 생소하고 파격적인 것이었기에 대중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만큼 그들이 선택한 길이 역풍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고, 감히 얼마나 어려웠겠냐 말할 수 있겠냐만은 알 수 없는 소문과 비난에 휘둘리며 각종 시련을 겪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비복스는 쉽사리 지치지 않았으며, 꿋꿋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무대 위에서도, 방송 속에서도, 그들은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들이 지나가고 지나가야 할 길은 단지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길이었고, 그 길을 묵묵히, 당당하게 걸어가며 자신을, 나아가 모두를 증명해 보였다. 이번 그들의 복귀무대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며,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볼 수 있다.







이미지 출처 : AI 및 엘르 사이트 (아래 주소 표기)


참고 자료 :

https://kofice.or.kr/b20industry/b20_industry_03_view.asp?seq=8074

https://www.elle.co.kr/article/1875073

https://namu.wiki/w/%EB%B2%A0%EC%9D%B4%EB%B9%84%EB%B3%B5%EC%8A%A4

https://thewiki.kr/w/Love%20%26%20Ex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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