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를 넘은 남자, 조훈현

직관, 바둑 그리고 인간

by 누리장인


2025년 3월 26일 김형주 감독의 '승부'라는 영화가 개봉하면서 바둑계나 영화계 모두 꽤나 떠들썩했다. 기존에 극장 개봉 없이 넷플릭스에 공개할 예정이었던 이 영화는 출연 배우의 마약 관련 사건으로 인해 공개가 연기된 바 있다.


이 글을 쓰는 게 살짝 시기가 지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얼마 전 유퀴즈에 조훈현 9단이 출연하시며 다시금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마냥 나쁘지는 않은 타이밍이라 본다.




조훈현 9단의 경기 스타일은 현대 바둑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전범(典範)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독창적 기풍과 치밀하게 조직화한 전략적 수읽기는 동시대 및 미래의 프로기사들의 기보 운용 방식 전반에 걸쳐 다양한 국면을 맞이하도록 했던 만큼 그 영향력이 막대했다 볼 수 있다.



1. 제비의 바둑

조훈현의 기풍은 속도감 있는 전개와 공격성의 극대화를 특징으로 하며, 이는 그저 직관적 수읽기를 넘어 체계적으로 전장을 지배하기 위한 접근 방식으로 진화했다. '제비'라는 별명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포석 단계부터 기선 제압에 주력하며 국면 전체를 자신의 통제 하에 두는 전략적 접근법을 구사했다. 특히, 실리를 추구하면서도 형세 판단과 국면 전환의 밸런스를 정교하게 맞춰가며 수를 읽는 그의 능력은 후대 많은 기사들에게 새로운 전술적 프레임을 제시했고, 현대 바둑이 더욱 전략적으로 발전하는 데 큰 토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조훈현 바둑은 심리적 요소의 전략적 활용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는데, 상대방 심리를 정확히 읽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불안정한 국면을 조성하여 실수를 유도하는 것 또한 그의 전략 중 일부분이었다. 고의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나 안 풀린다 싶으면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상대방을 거슬리게 만든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 또한 그의 색다른 접근법이지 않나 싶다.


2. 가르치지 않는 바둑

조훈현 9단의 독창적이면서도 체계적인 바둑 철학은 그의 특별한 학습 경로와도 밀접하게 연관지어 볼 수 있다. 9세라는 세계 최연소 나이에 프로에 입문한 그는 이후 일본기원으로 유학하여 세고에 겐사쿠 9단의 문하에 들어갔던 때부터 말이다.


그는 후지사와 슈코, 아베 요시타로 등 당대 최고의 기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각종 스타일과 갖가지 사고방식을 접했다. 일본 바둑의 정밀함, 한국 바둑의 역동성, 그리고 중국 바둑의 구상력 등은 그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며, 이는 후에 그만의 독창적 스타일로 변모하였고 그렇게 지금의 조훈현 국수가 되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일본기원의 수평적 학습 구조와 자율적 기풍 개발 방식이다. 전통적인 도제 관계의 수직적인 가르침 전수와 달리, 일본기원에서는 다양한 기사들과의 교류를 통한 자기주도 학습을 장려했다. 이 같은 환경이 조훈현으로 하여금 통상적인 방식을 벗어나서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방식을 탐색하도록 만든 것이 아닐까 싶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이창호를 비롯한 후진 양성 과정에서 엿보인 그의 자율적인 지도 방식은 바로 이 시기 때 경험한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제자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을 무작정 강요하기보다는, 각자의 개성과 강점을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넓은 자율성을 부여했다. 이러한 교육 철학은 한국 바둑이 다양한 스타일과 접근법을 포용하며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온라인상 논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조훈현이 가르친 게 맞느냐, 그냥 이창호가 스스로 배운 거다'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데, 앞서 말했듯 교육 방식의 차이일 뿐 이창호는 분명 조훈현의 제자이며 그의 밑에서 배운 게 많았을 것이다. 말을 좀 달리 하자면 무언가를 배우게끔 환경을 조성해 줬다는 점에서도 스승으로서의 본분은 확실히 했다.



3. 냉정과 열정 사이

조훈현 9단은 '프로'로서의 철저함과 '인간'으로서의 진솔함을 바둑이라는 지적 스포츠 위에 조화롭게 펼쳐낸 인물이다. 그는 그저 수읽기의 정확성과 직관적 감각에 의존하는 기사는 아니었다. 조훈현의 바둑은 경기 외적으로 나타내는 태도와 철학, 그리고 감정을 드러냈다 숨겼다 하는 나름의 통제술이 숨어있다.

오랜 시간 한국 바둑의 정점에 있던 조훈현은, 자신이 길러낸 제자 이창호 9단에게 타이틀을 내주며 세대교체의 흐름을 맞이한다. 많은 이들은 그의 하락세를 예상했지만, 조훈현은 오히려 이 순간을 '홀가분함'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본인의 바둑 인생에 새로운 장을 열겠다는 결의였다 볼 수 있다. “이기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 아니라, 아직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기 때문이었다"라고 했던 그에게는 진정한 거장의 면모를 비춰진다. 그에게 패배는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었고, 시련은 성장을 위한 자양분으로 큰 역할을 했다. 바둑 기사로서의 성장이든 인간으로서의 성장이든

말이다.


조훈현의 바둑은 감정 절제와 리듬 관리의 예술이었다. 대국 중 그가 보여준 일관된 태도와 페이스 유지는 상대방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무기가 되었다. 그의 경기 운영은 자기 통제력에 기반했으며, 이는 우연히 만들어진 습관이 아닌 어찌 보면 세심하게 계산된 전략으로 바둑의 진수를 보여줬다. 마치 고요한 연못 표면 아래에서 격렬하게 움직이는 잉어마냥, 그의 내면에는 승부욕이 치열하게 소용돌이 쳤을 것이나, 다소 평온한 대국 자세로 상대방을 곤란하게 했다. 물론 마냥 계산된 전략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훈현의 와기(臥棋)가 생각나지 않는가? 와기라는 이름과는 달리 그저 신체적으로 힘들어서 그랬다고 하니 감정 절제의 대명사가 이창호 9단 앞에서 육체적인 한계를 맞아 그런 자세를 취했다는 게 한편으론 인간적이고 멋지기도 하다.


이는 영화 속 이병헌을 통해 간접적으로 찾아 볼 수 있는데, 일관된 태도라고는 의아해 할 수 있는 그가 재현한 조훈현의 모습에서 정갈한 흰 한복, 여유로운 담배 연기, 미세한 다리 떨림, 낮은 허밍 소리는 단순한 습관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대부분 상대의 집중력을 흔들고 심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정교한 심리전의 도구였다. 마치 바둑판 위의 배치와 마찬가지로, 그의 모든 행동은 승리를 향한 의도적인 수이기도 했다 본다. 바둑판 외적으로 보여주는 또 다른 바둑이었던 것이다.


그의 제자 이창호가 보여주는 차가운 바둑이 현대적 컴퓨터를 연상케 한다면, 조훈현의 이 같은 뜨거운 바둑은 인간의 감정과 직관, 고뇌가 살아 숨 쉬는 전쟁터를 떠올리게 한다. 때로는 속으로 격정을 내기도, 때로는 침착함을 보이기도 하는 그의 태도는 바둑을 단순한 품위와 지적임을 겸비한 게임에서 감성과 이성이 교차하는 드라마틱한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영화를 아직 보진 못했는데 새삼스럽지만 몇몇 장면을 봤을 때 이병헌의 연기는 참.. 기가 막히다.


4. 한국 바둑의 무게

조훈현 9단의 국제적인 성과는 단지 한 사람이 이룬 영광이나 기록의 차원을 넘어서, 한국 바둑이 인정받는 계기가 된 중요한 순간들이었다. 이로 인해 한국은 바둑의 중심 국가 중 하나로 올라섰고, 바둑이 나라 간 문화 교류에도 쓰일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세계 최연소 프로 입단(9세 7개월), 통산 전관왕(최대 11관왕), 총 162회의 타이틀이라는 전례 없는 기록을 세웠지만, 그중에서도 1989년 제1회 응씨배 우승은 그의 경력은 물론 한국 바둑사 전체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당시 일본이야말로 동아시아 바둑의 중심이었고, 중국이 그 뒤를 쫓고 있는 형국이었으며, 한국은 거의 무시당하는 위치였다. 그런데 조훈현만이 한국에서 유일하게 초청받아 출전했고, 당시 중국 최고의 기사였던 녜웨이핑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 승리는 국제 바둑 질서 속에 한국이 새로운 주체로 등장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후 바둑 세계 랭킹 시스템인 고 레이팅(goratings)에서도 1986~1990년 세계 1위 자리에 조훈현이 수정 반영되었고, 이를 기점으로 한국 기사들이 세계적 무대에서 본격적인 존재감을 갖게 됐다.


조훈현의 성취는 분명 한국 바둑사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임에 틀림없지만, 때로는 이 성과를 지나치게 상징화하거나 민족적 자긍심의 도구로만 활용하는 경향도 있는 듯하다. 물론 상징화는 문화 콘텐츠로서의 바둑을 더욱더 확장시키는 데 유용한 수단이긴 하지만, 가끔은 지나친 서사로 인해 본질이 왜곡되기도 한다. 가령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을 두고 "최후의 저항", "인간의 승리" 등을 언급하며 과장했던 것처럼 균형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훈현의 경우에도, 그의 개인적 노력과 성과가 한국 바둑의 어떻게 바꾸었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상징적인 이야기보다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재조명하고, 그것이 어떻게 한국 바둑을 더 경쟁력 있는 분야로 만들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조훈현의 국제무대 활약은 단지 한 시대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를 보고 큰 후배들인 이창호, 유창혁, 이세돌 등이 세계 강자들과 경쟁하던 시기에도 조훈현은 여전히 녜웨이핑, 창하오, 왕레이 같은 중국 최고의 기사들과 싸워 이겼다. 그 와중에도 그는 한때 자신의 제자였던 이창호를 이기고 춘란배 결승에서 우승했는데, 이는 "조훈현은 여전히 최고다", "클래스는 영원하다"라는 사실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의 업적은 바둑을 스포츠이자 예술로, 나아가 외교수단으로 활용하게 만든 위대한 문화 자산이었다. 조훈현은 한국 바둑의 정체성을 세계에 각인시킨 인물이었다. 그는 한국 바둑의 황금기를 연 초석이자, 이후 이창호, 이세돌로 이어지는 전설의 시발점에 있는 바둑 기사였다.


5. 정치도 둔 사나이

조훈현은 정치에도 참여한 바 있다. 그의 정치 참여는 그저 개인적인 선택이 아니라, 바둑을 제도적으로 인정받게 하려는 전략적 행보였다. 2016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후 그는 '바둑 진흥법'을 제정하려고도 노력했다. 이는 바둑이라는 문화 생태계가 법적인 체계 안으로 들어가게 만들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그의 정치 활동에는 갈등도 있었다. 보수 정당에 속한 조훈현은 정부가 바둑 예산을 줄이고 문화 정책을 축소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이런 의견이 항상 잘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정치 참여는 바둑을 제도화하려는 긍정적인 목표와 정치적 갈등이 함께 존재하는 복합적인 시도였다 볼 수 있다. 이외 일련의 행보에 있어서 그를 좋게 볼지 나쁘게 볼지는 여러분의 생각이다. 정치 얘기는 더하기가 무섭다..




부득탐승(不得貪勝) : 승리를 탐하면 이길 수 없다


그의 바둑은 속도로 찔렀고, 직관으로 꿰뚫었으며, 결국 스스로를 이겨내는 싸움이었다.
그렇게 그는 조훈현이 되었다.




참고자료


https://sports.news.nate.com/view/20250418n20837

https://www.cyberoro.com/news/N_news_view.oro?num=523245

https://blog.naver.com/idw103/223805402630

https://namu.wiki/w/%EC%A1%B0%ED%9B%88%ED%98%84

https://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3113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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