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시모인 김 씨 부인이 노냥 틀린 말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바른 말을 하는 위인에 속했다. 팔이 안으로 굽는 아전인수격인 사고만 거둬낸다면 그랬다.
하필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길홍이 집에 없는 시간에 마침 돈을 주러 온 시모는 그날따라 택시를 오래 기다리게 한 채로 용옥에게 말을 많이 하다 돌아갔다..
길홍이 실업을 한 일은 회사가 잘못했다. 사업이 안 된 것은 영달이가 잘못했다.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는데 그건 나라님이 잘못했다.
가난 구제를 나라님이 왜 못하겠는가 말이다. 나라님이 돈도 있겠다 사업자금이라도 좀 대주고 하면 금방 일어설 것을 갖다가.
길홍이 말아먹은 사업자금이 어디서 왔나 했더니 시모의 주머니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시모의 말대로라면 애초부터 길홍과 용옥에게 왔어야 할 돈이었다.
혼인을 하면 시댁에서 집을 사 줄 요량이더라는 매파 왕 씨의 말은 사실이었다.
성혼이 되자 시부인 김의원으로부터 아들 내외를 분가시킬 적지 않은 돈이 나왔던 것이다. 이것을 시모인 김 씨가 쥐고 있다가 사업 자금이라고 내놓았던 사실을 용옥은 처음 알았다. 길홍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듯했다.
벼르고 별러 결국에는 영달의 결혼자금으로 쓰이고 만 그 돈이었다.
어쩐지 시모가 크게 아까워하지 않길래 배포가 남다르다 했더니 처음부터 당신 것이 아니었던 일이다.
시모의 논리는 이랬다.
세상이 신식으로 변했는데 아들이 어딨고 딸이 어딨냐는 거다. 시가에서 한 번 자금을 대줬으니 찢어지게 가난한 것도 아니고 처가에서 한 번 도와준들 요즘 같은 세상에 흉도 아니라는 말이었다.
동생들은 다 대학에를 보냈는데 언니인 용주와 용옥만 고녀를 마쳤으므로 학비로 치면 못 해줄 것도 없다는 말도 했다.
돌려서 하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대로 쏟아붓는 시모의 말을 용옥은 담담하게 듣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들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용옥과 용주만 대학을 안 간 것도 사실이고 고사장 부부가 이 일을 두고두고 미안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전쟁 후에 염전을 일구느라 가업이 번성하기 전이었으므로 그럴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다.
남매들의 월사금도 겨우 내던 시절이었고 돈이 없어 용주와 용옥은 고녀 졸업 여행도 못 갔다.
그런 사정을 다 아는 용옥이었으므로 대학을 못 간 것이 억울하지는 않았다.
다만 시모의 말이 옳다고 여긴 것은 세상이 변했는데 일가를 이루는 일에 남편과 아내가 따로 있을 수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용옥은 시모의 말을 너라도 나가서 벌어야 하지 않겠냐는 말로 들었다. 용옥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그 말이 하나도 서럽지가 않고 당연하게 들렸다.
용옥은 이제껏 자신을 짓눌러 오던 부끄러움의 정체를 알고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신경줄이 틱 하고 끊어지듯 명쾌한 답을 얻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시모인 김 씨 부인 측은하게 여겨졌다.
세상 믿음직한 큰 아들이 들어앉아 있는데, 이렇게 살 아들이 아닌데, 회사도 친구도 하다못해 나라님도 나몰라라 하는 지경에 너라도 니 남편의 비빌 언덕이 돼주라는 시모의 당부를 용옥은 명심해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