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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난감기

by 김주음

길홍이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안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게 됐다는 말이다.


그는 중간에 그만둔 고시공부를 다시 해보겠다고 본가에 둔 책을 지게에 지워 와 윗목에 쌓아두었다.

순자가 뒤란 창고를 뒤지느라 애를 먹었다고 했다. 그렇게 찾아온 책은 군데군데 쥐가 갉아먹은 자국이며 오줌 자국이 선명했다.

용옥이 진저리를 치자 길홍은 책을 다시 지게를 지워 절간으로 올라갔다가 보름 만에 책은 어디 두고 혼자 내려왔다.


무슨 번역일을 한다고 일감을 들고 온 날은 비싼 타자기 한 대가 일감보다 앞서 배달이 왔다. 원고지 몇 장이면 될 분량을 받아와서는 일단 타자기부터 들여놓고 본 것이었다.

용옥이 혼수로 해 온 자개상을 펴서 타자기를 고이 올려놓은 다음에야 길홍은 자신이 타자를 칠 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큰 일도 아닌 것이 타자기를 쓸 만큼 일감이 많지도 않았다.


주에 한 번씩 시모 되는 김 씨 부인이 생활비를 들고 송현동 집을 찾아왔다. 시부인 김의원이 보낸 돈이었다.

매일 병원과 이층 방만 오르락내리락하는 어른이 신기하게도 바깥일은 모르는 게 없었다.

시부는 어디서 들었는지 길남이 제 형 돈을 가로채 자취를 감춘 일을 알고 불같이 화를 냈다. 길홍내외가 불려 갔고, 시부는 남의 새끼는 모르겠으나 내 집 새끼는 잡아서 싹을 잘라버려야겠다며 경찰에 수배를 놓겠다고 전화기를 들었다.

김 씨 부인은 길남이 어떻게 될까 봐 벌벌 떨며 남편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아직도 높은 데 줄이 있는 시부가 나선다면 길남 하나 잡아오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긴 했다. 길남은 어디 멀리도 안 가고 주변에서 탕진하는지 가끔 목격담이 들리던 참이기도 했다.


시부는 길남이 집어간 돈만큼 큰아들에게 다달이 생활비를 보내라고 시모에게 엄명을 놓았다.

그게 독이 되었다. 생활비가 들어오자 길홍은 뭐든 해보려고 쓰던 애를 점차 그만두었다.

시모는 다른 일은 몰라도 돈을 주러 오는 일은 꼭 당신이 했다. 그녀는 언덕 아래 택시를 세워두고 들어오지도 않고 댓돌에 서서 사방으로 욕을 하다 돈 봉투를 던지듯 두고 돌아갔다.

김 씨 부인에게 있어서 두 아들은 세상 피해자였다.

그녀의 말은 이랬다.

큰 아들은 이렇게 살 아들이 아닌데 친구를 잘 못 두는 바람에 신세가 처량해졌고,

작은 아들은 그 친구의 꾐에 넘어가 범죄자가 되어 바깥으로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용옥이 듣기에는 틀림없이 욕 같아 보이는 말들을 자식 두둔이라고 한참을 하고 돌아갔다.


그래도 용옥이 견딜만했던 것은 남편 길홍 때문이었다.

열심을 놓진 공부는 이미 틀렸고, 허세를 버리지 못해 막일은 가당찮고, 놀고먹다 보니 이골이 났을지언정 그는 수치를 아는 사람이었다.

길홍은 돈봉투의 무게만큼 가장으로서도 맏아들로서도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용옥은 알고 있었다.

길홍 삼십 평생 최대의 난감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용옥의 인내는 오래가지 못했다.

시모의 인내가 오래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럭저럭 잔소리만 늘어놓던 시모는 달이 지닐수록 아들 내외 보는 일을 못 견뎌했다.

용옥으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었다.

혼인을 해서 분가까지 했건만 곧 아이가 나올 텐데 집에만 있는 아들 내외가 왜 답답하지 않았겠는가.

생활비를 주러 올 때마다 시모의 그 타는 속을 생각하면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용옥이었으나,


어느 날 용옥을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던 신경줄 하나가 툭 하고 끊이져 버리는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 불똥이 마침내 용옥에게 떨어져 급기야 시모의 입에서 경동 본가에 가 니 남편 사업 자금이나 얻어오라는 말이 나오고야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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