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입관예배고 오늘이 발인예밴데 어제는 오고 오늘은 말고 그러래요.
어디 법이 있어서가 아니라 먼 길에 나까지 챙기기가 어렵다는 거지요.
내가 강단이 있어놔서 애들이 수이 보고 그러는 게 아닌 걸 알면서도 제 아버지가 갔다고 벌써부터 오니라 가니라 맘대론가 싶어 오해가 됩디다.
그러나 나까지 보탤 수 있나요. 큰 일을 치르는데 힘을 덜어주는 게 맞지요.
아이들이 알기나 할까요.
지금쯤 운구를 했겠다, 화장터에를 도착을 했겠다, 지금쯤.. 이러고 세고 있는 건 시간이 아니라 김길홍이 내 남편의 살아생전 모습이란 것을요.
생각을 안 하려고 뭐를 할까 뭐를 할까 하다가 시장에를 나갔지요.
순 장례식장 밥만 먹었을 아이들 저녁 끼니라도 제대로 먹여야겠다 싶어서요.
시장 좌판에 꽃게가 아주 실합디다.
게를 보니 이런 날은, 그러니까 뭐냐 제 아버지 장사를 지내고 돌아온 날요.
설라무네 이런 날은 어릴 적에 끓여 먹이던 게국지가 딱이다 싶어요.
살아있는 게가 너무 팔팔하면 지들끼리 부대끼다 집게도 부러지고 다리도 떨어지고 그래요.
그걸 주어다 군둥내 나는 신김치 있잖아요, 그걸 하룻밤 담가둔 걸 같이 물렁물렁할 때까지 끓이면 그게 게국지국이거든요.
신김치는 얼마든지 있고.
게가 쓸데없이 실하지만서도 다리야 분지르면 그만이지 꼭 주워야 맛인가요.
우리 집 영감은 게국지 같은 건 음식 축에도 안 껴줘요. 짠 국물을 떠먹는 음식을 해주면 꼭 그래요.
"누가 염전집 딸 아니랠까 봐."
그 말이 맞아요.
하루 네 끼 먹어제끼는 집에 시집을 와서 염전집 딸처럼 내가 살았답니다.
하루 네 끼 먹어제끼는 집에서 나고 자란 김길홍이 내 남편은 염전집 딸을 만나서 아이 셋을 키우느라 염전집 딸 남편처럼 밖에 못 살았고요.
음식 축에도 못 드는 짠 국도 물을 붜가며 먹었고, 썩어 문드러진 꽁치는 못 얻어먹었지만 말린 박대도 고추장을 찍어 먹었고, 알배기 은어탕 대신 꽁미리 조림도 투덜대며 먹긴 먹었지요.
누가 염전집 딸 아니랠까 봐, 그러면서요.
험한 세월을 살았다고는 하지만 고됐던 건 억울한 게 없어요.
우리 집 영감 말마따나 먹고사는 게 쉬운 시절이 있었을까요.
세상이 좋아졌다면서 요즘 젊은이더러 육이오를 안 당해봐서 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은 임진왜란이며 병자호란은 겪어봤대나요?
콤퓨터가 아무리 잘나고 기계가 로보트처럼 일을 척척해도 사람 입에 밥 들어가는 일까지 저절로 될까요.
밥이 입으로 들어가려면 뭐든 해야 되는 건 예나 지금이나 같은데,
지금 젊은 이네들은 콤퓨터라매 로보트하고 경쟁을 해야 하니 이들이 더 고달픈 게 맞지요.
다만요.
한 번도 일을 쉰 적이 없었는데도요,
홍제동 집에 연탄이 떨어져 냉골이 된 방에서 돌쟁이를 다리 사이에 끼고 몸으로 감싸 재우던 그이 모습이며,
동네 근대화수퍼에서 퇴근길에 뽀뽀빵 쭈쭈빵을 애들 저녁 끼니라고 외상으로 들고 오던 시절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요,
김길홍이나 내나 누구나 참 험한 세월을 살았던 건 맞다 싶어요.
이 양반이 평소에 잘 부르던 찬송가 노래가 있는데 그 가사가 이래요.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걱정 근심 없고 정말 즐거워.
예수께로 가면 맞아주시고. 나와 같은 아이 부르셨어요.
아이들이 부르는 찬송가 노래래요.
삶이 고단했을까요.
내가 처음 만난 그이는 인천 바닥에 따르르하게 사는 김의원댁 맏아들이었으나,
생각해 보면 이 양반의 황금기는 고 몇 년이 다 인걸요.
어릴 적에 월남을 했고, 전쟁을 넘어서, 또 서울살이는 애달프기가 그지없었으니.
인천시 중구 사동 5번지에 세상 본적을 두고 살았던 김길홍이는 천국 본향에서 아이처럼 저만 평안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