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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댄편-참기름 찬 소년

by 김주음

다른 얘기지만, 길홍의 남정기 얘기도 좀 해야 할 것 같다.

길홍이라고 전쟁을 겪지 않았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용옥의 눈에는 김 씨 일가의 회복하는 속도가 남다른 것처럼 보였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생전 전쟁같은 것은 안 치러 본 마냥 말끔하게 행세하는 사람들이었다. 세월을 감안하더라도 그랬다.

그러나 길홍 역시 상흔을 지워내지 못하고 자주 잠결에 자지러지는 것을 용옥은 알고 있었다.


김의원 내외는 함경도 성진이 고향이라고 했다.

해방 후 맏이인 길홍을 데리고 남하하여 동인천에 자리를 잡고 두 남매를 더 두고 사는 동안 전쟁이 났다.

김의원은 전쟁이 나자마자 국군으로 차출이 됐다가 일사후퇴 때 부산으로 오라는 말을 남기고 유엔군과 함께 떠났다.

피난 길에 김 씨 부인은 젖먹이들 때문에 걸음이 자꾸 처지자 당시 소년이던 길홍을 먼저 가게 했다. 부산으로 앞서 가 아버지를 찾으라는 것이었다.


겨우 열다섯을 넘긴 큰아들의 허리춤에 참기름을 한 병 매달아 주고는, 큰 길 말고 산을 타라고 신신당부를 한 후 떠나보냈다.

그러나 자신도 아직 아이인 이 피난소년은 무리에서 떨어지자 금세 길을 잃고 산 길을 헤매다 인민군 소년을 만나게 된다. 이 인민군 소년 역시 무리에서 떨어진 까까머리 애녀석이었더란다.

겁에 질려있던 인민군 소년은 피난소년을 보자 냅다 총부터 갈겼다.

안 맞히려고 쏜 총이 빗나가는 바람에 그만 피난소년의 엄지 손가락을 맞히고 말았다. 타는 통증에 정신을 잃는 와중에도 뭐라고 소리를 지르는 인민군 소년의 사투리가 귀에 들어왔다. 고향인 함경도의 말씨였다.


목숨이 경각에 놓이자 길홍의 입에서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는 고향 사투리가 술술 나오더란다.

두 소년은 어디 그루터기에 나란히 앉아서 인민군 소년의 허리춤에서 나온 미숫가루에 피난소년의 허리춤에서 나온 참기름을 개서 먹으며 고향 얘기를 했다.

이상하게도 등에 업혀서 떠나온 고향이 잘도 기억이 났다.

장승 옆 땜통네 라매 마을 입구에 점방, 뒷산의 여우굴과 골목이 끝나는 곳에 이어지던 바닷길까지.

두 소년은 한참을 고향 얘기를 나누다 각자 갈 길로 헤어졌다.

남은 참기름은 총을 든 인민군 소년이 챙겨갔다.


길홍은 자신의 목숨을 살린 것은 '기억'이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땜통네가 무슨 소용이고 여우굴이 무슨 상관인가.

죽고 싶지 않은 소년과 죽이고 싶지 않은 소년의 공통점이라고는 고작 말씨 하나였을지도 몰랐다.

피난 소년이 묘사하던 동네 풍경이 동인천 역 배다리의 기억이었대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골목 끝에 바다는 과연 있었을지.

두 소년이 그리던 것은 각자의 목숨줄이었을 거다.


전쟁 난리 통에 칼도 아니고 총도 아닌 참기름 한 병을 차고 산 길을 헤매거나,

총이라고 차긴 했는데 제대로 쏠 줄도 모르면서 혼자 낙오돼 산 길을 헤매거나,

이도 저도 아니라 요즘 어른인데 그냥 산길을 헤매거나,

길홍은 그런 게 제일 무섭다고 했다.

그리고 살면서 어려울 때면 그 꿈을 꿨다.


피난 소년 길홍은 사선을 넘어 부산도 갔고 지프차를 탄 아버지도 기적적으로 만났고 가족과도 해후하였으나,

오른손의 엄지 손가락 한 마디는 뭉그러진 채 평생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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