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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음 Oct 13. 2023

뉴욕에서 길을 잃거든

바람이나 피하자고 들어간 커피숍에서였다. 

정확하게는 찻집에 있는 은영 씨를 발견하고 바람이나 피하자고 했던 것이 맞다. 테이크아웃 카페의 통유리창을 따라 배치된 긴 테이블에 은영 씨가 앉아 있었다.


이런 곳에서 은영 씨를 보게 되는 일이 의외는 아니었다. 맨하튼이 일터인 그녀는 안 다니는 데가 없다고 했다. 은영아, 하고 불렀을 때 그녀의 얼굴이 곤혹스러움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되려 당황한 기숙 씨는 옆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그녀가 멈칫거리자 은영 씨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 언니 여긴 왜.”

왜냐는 질문에서 뭔가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늦은 모양이었다. 기숙 씨는 그제야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있는 동양 남자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남루한 입성에 키가 작고 왜소한 중노인이었다. 그는 인사를 할까 말까 망설이는 것 같더니 마음을 정한 듯 테이블에 놓여 있던 비니를 집어 들고 그녀를 비껴서 나가 버렸다. 


머쓱한 기숙 씨가 그 남자가 있던 자리로 가서 그 남자처럼 엉거주춤 섰다. 

그녀의 컵이 비어 있는 것과는 달리 남자가 두고 간 컵은 거의 마시지 않은 듯 가득 차 있었다. 커피 한 잔을 다 마시지 못하고 내몰리듯 떠난 남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것도 넣지 않았는지 그가 남기고 간 커피는 검고 아득했다.

“여기서 아는 사람을 만날 줄은 몰라서..피한다고 피한 게 여긴데 언니한테는 잘도 다 들키네요.”

들킨다는 말은 무언가 숨기려 했다는 뜻이다. 아까 나간 그 남자를 숨기고 싶었던 걸까. 기숙 씨가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이 무색하게 그녀가 말했다.

“성식이 아빠예요.”

“미국에 계셨어? 한국에 계신 게 아니고?”

“봐서 알겠죠? 저 사람 나보다 열다섯 살이 많아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이 됐는데 제가 실업계가 아니었거든요. 대학을 갈 줄 알았지... 근데 아빠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은영 씨가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아빠 친구가 소개해 준 사무실인데, 직원들이 저를 잡아먹으려고 했어요.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인문고를 나왔으니 뭘 할 줄 알았겠어.”

“낙하산인 데다 그러니 얼마나 미웠겠어요.”

“어찌 견뎠을고. 어린 게.”

“아뇨, 저 안 견뎠어요. 저도 악에 받쳐서 막 들이받고 그랬어요. 내가 누구 눈치 볼 심사가 아니었거든요.”

도심 한가운데 있는 테이크아웃 커피숍에는 주말이라 사람이 적었다. 외국어로 말하는 익명자란 얼마나 편한 것인지. 두 사람은 세계에서 가장 붐빈다는 뉴욕 한 복판에서 익명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타이핑을 할 줄 모르는 게 뭐요. 기기를 쓸 줄 모르는 걸 왜 지들한테 미안해해야 하냐고요. 사장이 괜찮다는데.”

“그러게. 어리니 가르치면 될 것을.”

말은 이렇게 했어도 쉽지는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가르쳐 보려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빗겨 버린 운명에 꼬일 대로 꼬인 열아홉 살 신입사원은 사춘기를 다 벗어나지 못한 막내딸처럼 굴었을 것이었다.

“그때 나를 가르치겠다고 부른 사람이 저이였어요.”


“내가 신경질을 내도 차분차분 설명하고, 주말에 따로 기계 다루는 법도 알려주고, 야근도 시키고.”

“좋은 상사였던 것 같네.”

“전 첫 술도 그 사람한테 배웠고 야간대학이나 방통대를 가보라고 한 사람도 그이였어요. 아빠 같았죠.”

아빠 같았다던 남자와 어쩌다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너무 어렸다고만 했다.

“난 겨우 스물한 살이었는데, 결혼하고 나서 어린 신부를 앉혀 놓고 밥 값을 할 거냐 말 거냐 묻더라고요"

“밥값?”

“네. 밥 값을 할 게 아니면 야간대학을 꼭 다녀야겠냐구요. 자기가 가보라고 했으면서.”

은영 씨는 입을 앙다물고 천정을 노려보았다.

“우리 집에 십만 원씩을 보내주고 있었는데 대신 내 입에 들어가는 밥 한 톨도 아까워했죠.

다시 천정을 노려보는 그녀의 눈에서 그만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성식이를 가지고서는 애엄마 될 여자가 씀씀이가 헤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구요."


“난 그래서 성식이가 싫어요.”

“응? 성식이가?”

넋 놓고 듣고 있던 기숙 씨는 의외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왜 결말이 저렇게 되는 거지?

“무슨 소리야, 애를 왜?”

“저 사람이 아이 앞이라고 조심했겠어요? 애 있는 데서 엄마를 조롱하고 무시하는 일이 한두 번이었겠냐고요.”

"그래도 아이한테 엄마는 엄마지, 무슨 그런 소리를."

“난 걔가 날 보는 눈이 싫어요. 엄마가 어떤 대접을 받는 사람인지 다 안 다는 듯한 눈요. 야단을 치려고 하면 지 아비가 날 무시하던 그런 눈으로 날 본다니까요.”

“저기, 은영아, 그건 자기 생각이지. 애가 무슨 엄마를. 아니, 그런 마음으로 아이를 키웠던 거야?”

학교에서 배운 상담 기술은 다 어디 갔는지 서툴기 짝이 없는 그녀의 아무 말을 끊으며 은영 씨가 피식 웃었다.

“언니 알아요. 나 안 미쳤어요.”

그녀는 평소의 은영 씨로 거의 돌아와 있었다.

“이게 자격지심이라는 거죠. 불편하다는 말이 맞겠네요."


“남편이 실직을 하니까 그때는 학벌도 경력도 없는 내가 미안하긴 하더라구요. 어리고 고졸인 게 유리하대서 제가 학생비자를 받아서 여기로 왔죠.”

“처음부터 같이 왔구나.”

“그런데 와서 보니까 너무 무능력한 거예요.”

자신은 몰랐을 수 있지만 그녀는 외향적이고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영특해지는 동안 불혹의 나이를 넘긴 그는 젊은 아내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허우적대고 있었을 것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잘난 척을 하더니 자기 손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매일 저한테 매달려서 이가 해달라 저거 해달라. 그런데 무얼 배울 노력도 안 하는 거예요. 오 년이 지나도록 영어 한 마디를 못 하는 게.”

그녀의 말하는 투에서 남편을 향한 적의가 느껴졌다. 전에 알던 그녀들의 막네 은영 씨가 아닌 듯 낯설었다.

“그동안 나를 보던 이 사람의 심정을 알겠더라구요. 참을 수가 없었겠구나. 그래서 나는 모욕하는 대신 그 사람을 떠났어요.”

“어디서 어떻게 사시는 지는 알고?”

“전화번호만 서로 갖고 있어요. 돌아가는 게 나을 텐데, 뭐 찾아먹을 게 있다고 안 가는지 모르겠어요”

그녀의 말이 점점 격의가 없어져서 얘기를 끝내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은영 씨가 단정적인 어조 말했다. 이 긴 대화의 끝을 알리는 말이었다.

“그래서 만났어요.”


“성식이 때문이구나.”

“네. 전 여기가 좋아요. 저는요, 늙은 여인들의 여름이 싫어요. 이름도 싫고 사람들도 싫어요. 자식 때문에 희생하는 걸 무슨 장한 일이라도 하는 양.”

“아빠가 데리고 나갔으면 하는 거지? 그래서 뭐라셔?”

기숙 씨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이 불편해져서 자르듯이 물었다. 그러나 정말 묻고 싶은 것은 성식에 관한 것이었다. 긴 얘기 중에 그녀가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은 성식이의 마음과 의사였다.

“성식이는? 성식이는 가겠다고 하는 거야? 아빠와 돌아가고 싶어 하는 거 맞고?”

기숙 씨는 아직 들을  말이 남아 있는데 직원이 와서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다고 알려 주었다.

 

두 사람은 카페를 나와 어둠 속에 섰다. 여덟 시였다. 뉴저지로 가는 마지막 배가 이미 출발했을 시간이었다. 

기숙 씨는 이제야 말로 그녀를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월스트리트의 낯선 카페에서 은영아, 부르던 순간부터 그녀를 익명의 아무개로 만들 작정으로 은영 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을 것이었다. 이제 두 사람은 낯선 곳에서 스쳐간 타인일 뿐 이웃으로도 친구로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뉴욕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기숙 씨는 길을 잃었다. 배는 끊어졌고 다른 길은 모르는데 기차역에서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그녀는 행인이 사라지고 상점도 문을 닫은 밤거리에 한참을 서있다가 불빛을 향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하나의 길을 닫으면 다른 길을 반드시 열어 두는 이 곳은 뉴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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