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어느 주말 프린스턴 대학에 갔다.
싸래기 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기숙 씨의 학교에서 주최하는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에서 성공한 교포 2세 작가의 강연회였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세미나였지만 지인을 초청해도 된다고 해서 수지와 조앤이 동행했다.
강연회가 열린 곳은 맥케이센터의 Theological Seminary 안에 있는 중세 유럽의 살롱 같은 홀이였다. 벽돌로 된 벽난로 옆으로 그랜드피아노가 놓여 있고 한 쪽은 서고를 갖춘 아늑한 응접실이었다. 벽면마다 학자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들은 서고 쪽 소파에 자유롭게 앉아서 강연을 들었다. 성황이었다.
강연이 끝난 후 뷰티플마인드의 실제 주인공인 존 포브스 내쉬가 부인과 함께 자주 들렀다는 델리바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시장기가 돌기 전에 먹은 저녁을 소화시킬 겸해서 그들은 학교로 돌아갔다. 낫소홀을 지나 아치가 있는 블레어홀 쪽으로 걷자 영화에서 신입생 파티를 하던 잔디밭이 나왔다.
너른 잔디밭 가장자리에 놓인 벤치에 앉아서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조앤이 수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
“헤나가 연락은 좀 해요?”
헤나는 세인트루이스 훈련소로 입소해서 10주간의 훈련을 받고 있었다.
“도착해서 연락 한 번 온 게 다지 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이제 한 달 후면 조앤의 아들 사이먼도 한국으로 떠날 터였다.
사이먼의 아빠는 아들에게 따로 있을 곳을 마련해 준 모양이었다. 말이라도 함께 지내자고 하더냐고는 묻지 못했다고 했다. 아빠의 다른 가정을 확인하는 일은 상처가 될 것이 분명하지만, 그렇더라도 부디 함께 살자고 권했기를 조앤은 바란다고 했다.
조앤이 갑자기 정적을 깨고 말했다.
“알고 있는 노래 중에 제일 로맨틱한 노래가 뭐예요?”
잔디도 누렇게 쇠 버린 계절에 남의 캠퍼스에 앉아서 로맨틱한 노래라니. 젊기도 하다고 기숙 씨는 생각했는데 수지는 아무렇지 않은지 얼른 말을 받았다.
“로맨틱한 노래라면 ‘사랑하는 이에게’ 만한 게 없지. 절제된 열정의 백미랄까. 크~”
수지는 과장된 몸짓으로 마이크를 잡은 모양을 하더니 인상까지 써가며 시원하게 노래를 불러 제꼈다.
아이비리그 최고의 명문이라는 프린스턴의 캠퍼스에 구성진 유행가 가락이 울려 퍼졌다.
'그대 오소서 이 밤길로. 달빛 아래 고요히. 떨리는 내 손을 잡아 주오. 내 더운 가슴 안아주오.'
기숙 씨도 좋아하는 노래였다. 여고시절 친구 찬미와 정태춘 박은옥처럼 한 소절씩 나눠 부르던 생각이 났다.
수지가 이번에는 기숙 씨 차례라는 듯이 쳐다보았다. 로맨틱한 노래라니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라 머뭇거리자 조앤이 나지막한 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목장길 따라 밤길 거닐어, 고운님 함께 집에 오는데, 목장길 따라 밤길 거닐어, 고운님 함께 집에 오는데,'
해가 떨어져 사위는 어둠에 잠겼는데 조앤이 후렴을 불러주지 않아서 끝을 맺지 못하는 노래가 어스름한 풀밭 위를 아직 넘실거렸다.
“전 이 노래만큼 로맨틱한 노래를 들어 본 적이 없어요.”
조앤의 말소리는 그녀가 부른 노래의 다음 소절처럼 느리고 맑았다.
“밤길을 걸어서 고운 님과 함께 가고 있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요.”
그녀의 시선은 아까부터 앞만 응시한 채 하염이 없는 듯했다.
“제가 삼청동 쪽에 살았거든요. 종로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남편이 우리 학교에 와서 집까지 데려다주고 갔어요.”
수지가 몸을 구푸리더니 조앤 쪽으로 틀었다. 둘 사이에 있던 기숙 씨도 서로 잘 볼 수 있도록 몸을 뒤로 젖혀 주었다.
어둡고 날은 추워 인적이 없는 벤치에 이마를 맞댄 세 사람의 실루엣이 기괴하리라.
그러나 오후 4시면 해가 떨어지는 북부 뉴저지의 겨울은 이제 늦은 낮이지 아직 밤은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걸었던 거 같아요. 그 사람 집은 반대쪽이라 날 데려다주면 한참을 돌아가야 했거든요. 그런데도 학교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는 길에 그러는 거예요. 우리 걸어갈까?”
그녀가 남편 이야기를 하는 것은, 특히 연애할 때의 얘기는 처음이었다.
“혜화동에서 성북동 쪽으로 가면 걷기가 참 좋거든요. 느릿느릿하게 걷고도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정류장에 또 한참을 같이 있더랬어요.”
기숙 씨와 수지는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는 남자의 푸르렀던 시절 이야기를 듣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집과 멀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가슴이 뛰는 사람을 따라 걷던 아름다운 청년의 순수는 청청했던 시절의 어디쯤을 서성이고 있기나 한 걸까.
“나 그 사람과 헤어지려구요.”
이혼도 열정이 있어야 하는 거더라구요, 이렇게 말했던 조앤이었다. 남편이 새살림을 차렸다는데도 아무렇지 않다고 했었다.
핑계처럼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늙은 여인들은 그 말이 사실인 것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신경줄이 하나가 툭하고 끊어지면 어떤 사람 하나가 송두리째 사라져 버리는 것을 그들도 경험했었다.
다만 사람들, 특히 아이들을 납득시켜야 하는 일만은 다른 문제였다. 조앤이나 기숙 씨가 과거와 자꾸 맞닥뜨리게 되는 이유였다.
납득할 만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아빠 없는 아이들이 돼 버린 이유를 남매에게 이해시켜야 하는 일이 기숙 씨에게도 숙제로 남아 있었다.
말없이 듣기만 하던 수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이유를 찾은 거야?”
“네. 헤어지고 싶은 열정이 생긴 거 같아요”.
기숙 씨는 새로운 사람이 생긴 걸까 생각했다. 수지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시원하다는 듯이 말했다.
“잘 생각했어. 조앤도 새로 시작해야지. 벌써 그랬어야 했는데 귀찮다고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네.”
“새로 시작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요.”
“그게 아냐?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그냥, 갑자기 돌아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왜, 돌아오겠대?”
“그건 아니구요. 애들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었는데.”
애들 엄마란 남편 딸들의 엄마를 말하는 거였다. 연례행사로 조앤에게 전화를 해서 정 있는 동서지간처럼 안부를 묻고, 이젠 행복해지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주제에 넘치는 소리를 한다던 사람이다.
“서류해서 보내면 사인해서 보내주마고 했죠. 그러면 또 일 년은 잠잠했는데 이번엔 애들 아빠가 다시 전화를 했더라구요.”
“어쩌라는데? 서류라도 해서 보낸대?”
“아니요. 갑자기 전화를 해서는 미안하다고, 당신은 아무 걱정 말고 우리 아들이나 잘 돌보라고.”
“아무 걱정 말랬다고?”
“그러더라구요? 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요?”
“알 수가 있나. 그런데 하나는 분명하네. 아주 공식적으루다가 두 집 살림이라도 하겠다는 거잖아.”
“그런 거 맞죠?”
“그러게 진작에 정리를 할 것을. 미련이 남아서 기다리는 줄 알게 만들었냐고.”
수지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갈라져 나온 것과는 달리 조앤의 목소리는 여전히 굴곡이 없었다.
“과거를 아무리 되짚어 봐도 아까운 기억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가 돌아오는 상상을 하니까 그 사람 없이 지낸 모든 시간이 아까워지더라고요.”
잔디 쪽을 응시하고 있던 조앤이 두 사람을 쳐다보며 익살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나 코 꿰기 전에 얼른 끝내야겠죠?”
조앤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고 기숙 씨와 수지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 사람은 깜깜한 남의 학교 벤치에 앉아서 배꼽을 잡고 웃었다. 수지가 프린스턴 대학을 무슨 동네 운동장처럼 와서 수다를 떨고 있다고 말해서 진정되던 웃음이 다시 터져 나왔다.
그들은 텅 빈 학교에 괴이한 웃음소리가 담을 넘지 않게 하느라 끅끅대며 허리가 휘도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