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 씨는 토요일마다 뉴욕에 갔다.
정확하게는 맨하튼이다. 매주 토요일마다 상담학을 들으러 다닌 게 벌써 마스터 과정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뉴욕과 맨하튼을 분리해서 말하지만 그녀는 그냥 뉴욕이라고 부르는 게 좋았다.
그녀는 토요일 아침 일곱 시에 글랜데일의 메인역에서 기차를 탔다. 그리고 시카쿠스역에서 한 번 갈아탄 후 여덟 시 십오 분에 뉴욕 펜스테이션역에서 내렸다.
학교는 코리아타운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 미국에 처음 올 때 i20를 받았던 학교였다. 와이오밍으로 가게 되면서 몇 해 멈추었다가 뉴저지로 돌아와 다시 다니기 시작헸다.
토요일에는 미국 할아버지들이 오지 않기 때문에 베이커리를 무인으로 운영했다.
냉동 빵과 인스턴트 티가 전부여도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의외로 자기만의 장소와 시간을 찾아 어디든 가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 듯했다.
아무도 없는 장소에 혼자 있는 것은 진정한 고립이 아니다. 혼자 있고 싶다면 사람이 많은 곳으로 나가는 게 옳았다. 고립이란 군중 속에 있어야 의미가 있다는 것은 세상 좀 외롭게 살아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진리였다. 혼자 있으면 오래 울지 못하는 것처럼.
토요일의 베이커리는 혼자 있고 싶은 자신과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은 자신이 한 테이블에 앉아서 사심대로 시공을 공유하는 일종의 평행차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주인장이 없는 카페는 얼마쯤의 불편을 감수하게 하는 자유분방한 아늑함이 있는 듯했다.
방과 후의 맨하튼 투어는 기숙 씨가 유일한 호사로 누리는 토요일의 루틴이었다.
세 시에 수업이 끝나면 깜깜해지기 전까지 뉴욕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녀의 수첩에는 뉴욕의 기차 시간표와 지하철 노선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뉴욕은 시간표대로 움직일 수 있는 도시가 아니었다. 있던 길이 사라지고, 역이 폐쇄되고, 배차가 취소되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뉴요커들은 우왕좌왕하는 그녀를 두고 시원하게 자리를 떴다.
익숙해지려면 이 도시가 사람을 받아들여줘야 했다. 첫인상은 도도해도 친해지면 수더분한 친구 같은 이 도시는 서울과 닮아 있었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그녀는 하나의 길을 닫으면 다른 하나의 길을 열어놓는 이 도시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게 되었다. 돌고 돌아서라도 길은 반드시 있었다. 사람들이 폐쇄된 역 앞에서 빨리 돌아서는 것은 길을 알아서가 아니라 찾기 위해서라는 것을 이제 안다. 막힌 길 앞에서는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 상책이다.
개강일의 첫 여행지는 어퍼맨하튼에 위치한 콜롬비아 대학교였다.
대학교를 둘러보고 브로드웨이 쪽 출입구로 나가자 뉴저지가 건너다 보이는 시원한 허드슨 강을 만날 수 있었다. 길을 되짚어서 웨스트 116번가를 따라 모닝사이드파크 쪽으로 걸었다. 오래된 성당과 교회가 고풍스러운 조화를 이루는 거리였다. 옛 할렘의 자취가 남아있으면서도 뉴요커들의 느긋한 휴식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공원을 끼고 존 더 디바인 성당을 따라 내려가다가 길이 끝나는 담벼락 공터에서 토요일마다 열린다는 파머스 마켓을 만났다. 오후 3시면 파시를 한다는데 개학일이라 오전 수업만 하는 바람에 운이 좋았다. 상인들이 직접 만들어온다는 피클이나 마말레이드, 햄 등을 마음대로 시식할 수 있었다.
거기서 네모난 번철을 놓고 감자전을 지져 파는 한국인 아주머니를 만났다.
“벌써 5년은 했을걸요?”
아주머니가 능숙하게 감자전을 뒤집으며 말했다.
“이네들이 감자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여기다 김치를 얹어 먹으면 더 맛있대. 아주 먹을 줄 안다니까.”
병에 담아놓은 김치는 피클처럼 그 자리에서 먹으라고 파는 모양이었다.
기숙 씨도 한참 줄을 선 끝에 노릇하게 구워진 감자전을 살 수 있었다. 감자전은 기다린 보람이 있을 만큼 맛이 좋았다.
센트럴파크에서 웨스트 77번가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사 박물관 맞은 편 공터에서 주말마다 그랜드바자가 열린다. 주로 가구나 공예품 같은 것을 파는 오래된 중고시장으로 꽤 쓸 만한 물건을 건질 때도 있었다.
1950년대에 만들어졌다는 마호가니 상판을 댄 엔틱 탁자를 70불에 산 적도 있었다. 서랍에 군청색 페인트를 거칠게 덧칠해 놓은 것이 멋을 더해줘서 두고두고 잘 샀다는 인사를 듣는 탁자였다.
기숙 씨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는 뉴욕퍼블릭도서관이었다.
그녀가 처음 그곳에 가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원래는 야외 스케이트장을 구경하러 브라이언파크에 갈 생각이었다. 얼음링크 한가운데서 스케이트를 신은 채 프러포즈 이벤트를 하는 커플을 볼 수 있는 장소였다.
해질녘의 겨울사진 같은 풍경 속에서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반지를 내밀면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여자가 yes라고 하는 순간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치던 관객들은 연인의 길고 긴 키스가 이어지는 동안 플래시몹이 끝난 것처럼 우아하게 얼음을 지치며 흩어졌다.
그녀는 화려한 불빛이 어우러진 스케이트장의 몽환적인 분위기가 좋았다. 그런데 하필 그날 브라이언파크에 도착했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겨울비 치고는 줄기가 제법 세서 비를 피하겠다고 급하게 뛰어간 곳이 퍼블릭도서관이었다. 비를 핑계 삼은 그날 고색이 창연한 도서관의 3층 열람실에서 세 시간을 보냈다. 꿈같은 시간이었다.
가을 학기가 끝나는 11월의 마지막 주에 기숙 씨는 오전 수업만 마치고 조퇴를 했다. 뉴욕투어의 마지막 날인만큼 오래 걸을 각오로 운동화에 배낭을 메고 학교에 갔다.
계획으로는 34번가에서 지하철을 타고 첼시로 가서 소호를 거쳐 리틀이태리까지 걸어갔다가 배터리파크에서 페리를 타고 뉴저지의 호보큰으로 갈 생각이었다. 호보큰 기지창에서 기차를 타면 갈아타지 않고 글랜데일까지 한 번에 갈 수 있었다.
호보큰 역사는 해리포터에 나올 법한 웅장한 건물이었지만 여행객보다 홈리스들이 더 많았다. 그래도 강 건너로 바라 뵈는 로어맨하튼의 야경은 탄성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나 한참을 걸어서 베터리파크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 호보큰으로 가는 페리는 끊어지고 없었다. 맵앱에는 여전히 배편이 있는 것으로 나왔지만 주말인 데다 손님이 없다고 자기들 마음대로 끊은 모양이었다.
“호보큰으로 가는 배는 이미 없다.”
표를 파는 사람이 창구 안에서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왜 없어? 아직 운행 시간이 아니냐?”
“브룩필드로 가라. 거긴 여덟 시까지 배가 있을 거야.”
“있는 거 확실해? 브룩필드가 어디지?”
“가깝다. 여기서 나가서 오른쪽으로 가면,”
매표원이 일어나다가 그녀의 손에 들린 폰을 발견하고 도로 엉덩이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너 폰 있네, 맵으로 찍고 가면 돼.”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인가?”
“물론이지. 가깝다니까?”
매표원의 말과는 다르게 맵으로 찍어보니 40분은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기왕 걸어야 한다면 돌아가더라도 월스트리트를 가로지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증권거래소와 트리니티 교회까지 볼 수 있고, 더 크게 돈다면 911 메모리얼파크까지 갈 수 있을 것이었다.
월스트리트는 그늘진 빌딩 사이로 바람이 휘몰아쳐서 마치 서울의 명동거리를 걷는 것처럼 옷깃을 여미게 하는 혹한이었다.
강 위나 넘실대던 건달바람이 고층건물들 사이를 휘돌다 된바람으로 무리 지어 몰려다니는 월스트리트 한 복판에서 기숙 씨는 은영 씨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