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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음 Oct 24. 2024

샤이엔의 카니발

퍼널케이크는 손기계로 얼음을 갈아 색소를 뿌려주던 옛날 빙수를 닮았다. 

옛날 국민학교 앞에서 사 먹던 빙수처럼 퍼널 케이크 역시 그녀에게 위로가 된 적이 있다. 이 불량식품 같아 보이는 음식이 위로가 될 만큼 그녀의 삶이 고단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6년 전 미국으로 온 지 2년 만에 와이오밍주로 이사를 간다고 했을 때 절망적인 얼굴로 되묻던 준이의 눈빛에도 그런 고단함이 묻어났었다.


“어디라고?”

곧 미들스쿨에 입학하는 준이 넋이 나간 듯이 되물었었다.

“와이오밍이라고. 꽤 큰 주라네.”

“그러니까 그 와이오밍이 어디냐고. 미친 거 아냐?”

아들의 막말을 못 들은 척 넘긴 지 오래였지만 미친 거 아니냐는 말에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래 이보다 더 칠 수는 없지. 애초에 미국 땅을 밟은 것이 미친 짓이었는지도 몰랐다. 어린 남매를 데리고 학생비자를 받아서 온 지 이 년 째인 때였다. 이혼 위자료와 간호사 퇴직금으로 그래도 몇 년은 버티겠다 싶어 감행한 미국행이었다.

 

처음 간 동네는 흑인과 히스패닉이 적당히 섞여 사는 지역이었다. 위험한 곳은 아니었지만 유학원에서 소개해준 중개인이 약속한 동네도 아니었다. 중개료와 보증금 차익을 챙긴 한인 중개인은 세 사람을 낡은 주택의 지하방에 내려준 후 연락이 되지 않았고 결국 렌트비를 올려 주고 더 나은 동네로 이사해야 했다. 

방에 볕이 들고 학교도 가까워졌지만 통장의 잔고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미리 계산기를 두드리며 짰던 비용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그린카드가 절실했다. 

그러나 이민자가 많은 뉴저지에서 영주권 스폰서가 되어주겠다는 병원을 찾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간호사가 부족한 중부로 가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한인 취업센터의 권유에 따라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와이오밍 주의 지역 병원에서 스폰이 되어주겠다는 연락이 왔던 것이다.


“난 여기 살 거니까 엄마 혼자 가”

아이들의 반대는 예상했던 일이었다.

“다음 달에 학기 끝나는 대로 이사할 거니까 짐 싸고.”

“엄마, 미쳤냐고. 여기도 아직 적응 못했는데 어딜 또 가냐고”

“큰 짐은 다 버리고 갈 거야. 옷이나 챙기고”

기숙 씨는 아들의 말을 일부러 못 들은 체했다 

“안 간다니까? 야, 너 갈 거야?”

준은 폰을 만지고 있는 제 동생을 치며 소리쳤다.

“아, 왜?”

제 오빠를 보며 소리 지르는 윤이의 표정에도 짜증과 절망이 드러났다.

“딱 차에 실을 만큼만 챙겨. 집도 가서 찾을 거야”

아 진짜!라고 소리 지르며 벌떡 일어나는 준이의 팔을 기숙 씨가 우악스럽게 잡아끌어 주저앉혔다. 그 바람에 아이가 중심을 잃고 바닥에 무릎을 찧었다.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 서슬에 윤이도 눈치를 보며 폰을 내렸다. 

“의견을 묻겠다는 게 아니고 어른으로서 통보하는 거니까 잘 들어.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거기서 5년은 살아야 하고 여기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어.”

그녀는 현실보다 과장해서 더 독하게 말했다. 아들의 눈에 찼던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여기 올 때도 엄마 마음대로 왔으면서. 싫다는데 엄마가 마음대로 왔잖아.”

아들의 목소리는 누그러지고 떨렸지만 단호했다.

“난 안 가고 싶단 말이야”

“그럼 너 한국 갈래?”

데인 데 소금 치듯 아들의 상처에 또 상처를 냈다. 비겁했지만 늘 효과가 있었다. 미국에 와서 이 년이 지나고 기숙 씨와 아이들은 돌아갈 길을 잃었다. 이제 와서 돌아갈 집도 없고 돌아간들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다는 것을 어린 남매도 느끼고 있었다.

그녀에게도 남매에게도 한국은 뼈저리게 그리운 외국이었고 미국은 어디나 낯선 집이었다. 언제부턴가 해가 눅눅히 지는 붉은 저녁이면 기숙 씨와 남매는 각자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소리 없이 흐느꼈다. 

준이의 눈에 눈물이 새로 차올랐다. 윤이도 폰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승리였다. 


와이오밍은 생각보다 더 멀었다. 

자동차를 타고 시간 변경선을 지나 해가 지는 쪽으로 닷새를 달렸다. 밤이면 주유소에 딸린 여인숙에 묵었고 해가 뜨면 가스를 가득 채우고 다음 주유소가 나올 때까지 노심초사로 달렸다. 

야간의 운전길은 더 험했다. 끝없이 이어진 도로에는 불빛 하나가 없어서 헤드라이트를 향해 달겨드는 벌레들이 차에 부딪히며 터지는 소리를 계속해서 들어야 했다. 범퍼에는 벌레들의 사체가 눌어붙은 콘크리트처럼 켜켜로 허옇게 덮였다. 기숙씨네는 떠난 지 하루 만에 사체를 벗겨내는 일을 그만두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종일 달리는 것은 소모적이고 피로한 일이어서 빨리 지치게 했다. 광야는 집 한 채 보기가 어려울 만큼 광활했다. 소 떼를 지나면 마을이 하나 나오고, 버펄로 떼를 지나면 농장 하나가 나오는 식이었다. 

중부 사람들은 휴게소를 오아시스라고 불렀다. 번듯하게 차려진 휴게소가 아니라 기념품점이 딸린 식당과 주유소가 전부인 쉼터였다. 그나마도 놓치면 수백 마일은 더 가야 했기 때문에 이정표나 도로가에 꽂아 둔 팻말을 잘 보며 달려야 했다.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아이들은 생기가 돌아서 경치를 즐길 만큼 여유가 생기는 듯했다.


그러나 와이오밍은 무참했다. 러시모어를 출발해서 바위 절벽 사이로 난 비포장 도로와 평원을 4시간 넘게 달려도 마을이 나오지 않자 남매는 말수가 적어지고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 도착한 시골 마을의 설탕공장 옆 근로자들이 사는 아파트에서 4년을 살았다. 공공시설이라고는 학교와 노후된 메디컬센터가 전부였고 마을의 중심에는 주유소와 원 달라 마트가 있었다. 

사방을 둘러싼 사막 때문에 아이들은 갇혀 지냈다. 그래도 멀리 지평선으로 해가 지면 하이스쿨에 다니는 아이들은 낡은 자동차를 나눠 타고 다이너 식당으로 모여들었다. 잘 나간다는 아이들은 사막 어딘가에 자신들의 아지트를 만들어 놓고 그들만의 일탈을 즐기기도 했다.


사막으로 고립된 마을의 오아시스는 카니발이었다. 카니발이 주도인 샤이엔에 연 세 번을 왔다. 샤이엔 외곽 공터에 화려한 그라피티로 멋을 낸 컨테이너 트럭들이 도착하면 마을 전체가 들썩였다. 벌판이었던 공터에 며칠 새 뚝딱 담이 세워졌다. 오색 등이 환하게 켜지고 집채 만한 컨테이너가 열리면 그 안에서 놀이동산에서나 볼 법한 화려한 놀이 기구들이 튀어나왔다. 장관이었다. 

밤 10시가 되면 스쿨버스들이 경찰의 지휘 아래 아이들을 태우고 먼저 떠났다. 그때부터 진짜 어른들의 시간이었다. 잘 차려입은 드레스나 진에 카우보이 부츠를 신은 사람들은 푸드 트럭을 누비며 맥주에 바비큐를 들고 축제를 즐겼다. 

기숙 씨도 동네 사람들의 트럭을 얻어 타고 카니발에 갔다. 아이들을 태운 버스가 떠나고 나면 그녀는 종이접시에 꾸불거리는 튀긴 빵을 수북이 담아서 초록 괴물 같은 크림을 범벅해 주는 퍼널 케이크를 혼자 사 먹었다. 그것은 한 번도 사막을 벗어나 보지 못한 수인에게 주어지는 바깥공기의 맛이며 문명의 맛이었다. 


그녀는 사업에 영감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인이라면 이 케이크에 향수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예상은 적중했지만 노인에게, 그것도 유독 할아버지들에게만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사업적으로는 유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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