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가 가게 문을 열자 제법 차가운 9월의 저녁 바람이 그녀를 따라 들어왔다.
“레이철, 엄마는 요새 바쁘신 모양이지? 통 안 오시네?”
수지가 카운터를 보고 있는 레이철에게 말을 걸었다. 레이철은 대답 없이 눈알만 또르륵 굴렸다. 원래 부끄럼이 많은 아이였지만 한국말이 서툴기도 했다. 레이철은 저녁 시간에 가게 일을 도와주는 친구로 그녀의 엄마인 젠은 올봄에 영주권을 받더니 가게에 발을 끊었다.
맏언니 격인 수지는 코리아타운에 있는 한인마트에서 저녁까지 일했다. 그녀는 퇴근길에 자주 베이커리에 들러서 문을 닫을 때까지 있었다.
“우리 딸이 드디어 입대하라고 연락을 받았네.”
수지가 의자에 앉기도 전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드디어. 얼마를 기다린 거야?”
먼저 와 있던 은영 씨가 탄성을 지르며 수지의 허리춤을 끌어당겨 자리에 앉혔다.
“1년 됐지요? 합격만 시켜놓고 연락이 없다고 걱정하시더니. 헤나는 어쩜 똑똑하게 알아서 잘 할까요?”
헤나는 수지의 딸이었고 그녀가 똑똑하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하이스쿨을 졸업한 한인 아이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헤나는 당차게 한국으로 돌아갔다. 재입국이 막힐지도 모르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기적같이 학생 비자를 받아 낸 아이는 돌아와서 커뮤니티 컬리지를 졸업하고 곧바로 매브니 모병 프로그램에 지원해 미군 입대 자격을 따냈다. 당시로서는 시민권의 길이 열린 것이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모병이 잠정 중단되기 바로 직전에 막차를 탄 것이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좋다고 해야 하는데 그 말이 안 나오네. 분쟁지역으로 보낸다고 하니까.”
수지의 목소리가 다시 떨렸다.
“다 그런 건 아니잖아?”
조앤이 수지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런 데 보내자고 시민권까지 줘 가면서 뽑은 거 아니겠어?”
수지가 참고 있던 눈물을 쏟았다. 꽃 같은 딸을 푸른 군복을 입혀 분쟁지역으로 보내야 하는 불안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할 수밖에 없는 자괴감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딸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곤 했었다.
수지가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온 것은 헤나가 세 살 때였다. 남편은 금융회사 주재원이었다. 그는 한국에 있을 때부터 알코올 문제가 있던 사람이었다는데 미국에 오면서 더 많이 술을 마셨고 더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되더니 얼마 안 돼 무면허 음주운전으로 카운티 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회사에서 제공해 준 변호사 덕분으로 위기는 넘겼지만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자 귀국 명령이 떨어졌다.
그는 사표를 내고 남는 쪽을 택했고 그때부터 빠르게 진창으로 굴러 떨어졌다. 한동안은 일자리를 구해 보겠다고 애도 썼고 얼마간의 생활비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곧 아무것도 하지 않고 종일 술을 마셨다.
퀸즈의 남미계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허름한 이층 집에서 수지는 어린 헤나를 끌어안고 두려움에 떨며 살았다. 수지는 남편에게 어린 헤나를 맡기고 한인 식당으로 일을 하러 다녔다. 밥을 해두면 아이 입에 들어가게끔 하는 정도는 그도 했다. 일을 마친 수지가 피곤한 몸으로 돌아가면 취해 늘어진 남편 옆에서 어린 헤나는 만화 영화를 보거나 자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중독은 진화하고 있었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간 수지는 남편의 취한 눈에서 이질의 공허를 발견했다. 아, 이 사람이 약을 하는구나.
그때부터 그녀는 절대 돈을 주지 않았다.
값싼 독주를 사서 식탁 위에 올려 두고 아이가 먹을 음식을 따로 만들어 놓은 후 출근을 했다..
약이 흔해서 담배 값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지만 돈이 없으면 도리가 없겠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그의 눈이 다시 이상한 흥분으로 넘실대는 것을 보았을 때도 그냥 외면했다. 그녀 역시 일신이 나날이 고단해지고 정신도 피폐해져 가던 때였다.
“그 약이 어디서 왔는지 알아?”
수지는 이 이야기를 할 때 가슴을 뜯었었다.
“우리 헤나가.. 프리스쿨에 갈 나이가 지나니까.. 이만저만 산만한 게 아니었어. 생각을 해봐.. 여섯 살짜리가 매일 집에서 술에 쩌든 아빠랑 있으니… 맨날 떼쓰고 소리 지르고.”
ADHD 판정을 받으면 환각효과가 있는 약을 처방해 준다는 말을 들은 아이 아빠는 헤나를 한인 커뮤니티에서 운영하는 무료 아동심리 치료센터에 데려갔다. 아이의 행동과 아빠의 매우 조리 있는 상담 결과를 바탕으로 헤나는 ADHD 진단을 받게 됐다고 한다. 진단이 남용되던 시절이었다.
약물 처방만 받고 행동 치료를 받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직원이 집으로 찾아갔을 때 남편은 거실에 시체처럼 쓰러져 있었다. 약을 과용량으로 독주에 섞어 먹고는 정말 약 기운 때문이었는지 독주 때문이었는지 눈을 까뒤집은 채 늘어져 있었다고 한다. 술 병과 약병이 뒹구는 거실에 헤나는 없었다.
그는 아이를 든든히 먹이고 이층 방 티브이 앞에 앉혀 두었다는데 방문 바깥 손잡이에는 안에서 열지 못하도록 의자가 받쳐져 있었다고 한다.
고발될 위기에서 헤나 아빠는 시어머니와 형에게 이끌려 한국으로 돌아갔고 수지는 이를 악 물고 미국에 남았다.
아빠 손에 이끌려 ADHD 판정을 받았던 헤나는 라크로스 팀의 주전으로 뛰었고 오프시즌에는 밴드에서 드럼을 연주하는 씩씩한 아이로 자랐다. 이 씩씩한 아이는 수지의 염려보다 바람을 좇아 자랐던 것 같다. 엄마의 염려와는 달리 헤나는 행복해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기숙 씨는 따뜻한 홍차에 우유를 듬뿍 넣어서 수지 앞에 놓아주고 그녀의 손등을 꼭 잡아 주며 말했다.
“헤나 걱정은 말아요. 우리가 헤나를 모르나? 군대도 우리 헤나를 막지 못하지.”
손을 뒤집어 맞잡고 악수하듯이 흔들며 고개를 끄덕이는 수지의 눈에서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아이고 좋은 일에 눈물도 많네. 늙은 여인은 어디 간 거야?”
수지가 다른 손으로 붉어진 눈을 훔치다가 그녀의 말에 활짝 웃었다.
"늙은이의 기도를 멈추지 마라."
조앤도 수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