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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음 Oct 13. 2023

새모이협회에 관한 고찰

10월이 되자 마켓에서는 땔감용 나무를 팔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벌써 벽난로의 굴뚝을 손보며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북부 뉴저지의 겨울은 길고 눈이 많이 내렸다. 

뉴저지는 나무가 많아서 가든스테이트라고 불렸다. 나무들은 아름이 어른 팔로 두 개만큼씩은 되었는데도 잘 넘어졌다. 거센 바람이라도 불고 난 아침이면 큰 가지가 뚝뚝 부러져 있거나 그루가 통째로 뽑혀 길을 막고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밤 새 비바람이 치더니 베이커리 앞의 나무가 가게 쪽으로 기울어졌다. 열매가 많이 달리는 떡갈나무였다. 늦가을이 되면 잘 익은 도토리가 하루 종일 지붕을 딱딱 두드려댔더랬다. 그 바람에 바빠진 회색 다람쥐들이 지붕과 나무 사이를 쉴 새 없이 들락거렸다. 

섭섭했지만 뿌리가 드러나 있어서 잘라야 했다. 타운홀에 전화를 했더니 다행히 시에 속한 나무라고 했다. 조금만 더 안쪽으로 들어와 있었어도 가게 소유가 될 뻔했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랬다면 천 불이 넘는 비용을 기숙 씨가 내야 했을 것이었다. 

경찰차가 석 대나 와서 바리케이드를 쳤고 나무 베는 차가 왔다. 한 나절은 꼬박 걸리는 작업이었다.  


경찰 중 한 명은 중국계였다. 아침에 학교 앞 건널목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경찰로 그녀와는 안면이 있었다.

“이 컨트리는 나무가 잘 넘어진다. 뿌리가 얕아서 그래.”

그가 와서 말을 걸었다. '이 컨트리'라는 표현에서 그가 골드러시 당시 쿨리라 불렸던 초기 이민자의 후손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기는 땅이 아주 좋아서 나무가 뿌리를 깊이 내릴 필요가 없는 거야. 그래서 잘 쓰러져. 땅이 좋은 게  나무에게는 나쁜 영향을 준 거지.”

그가 유창한 영어로 말을 이었다. 

“알아? 이 나라에 옮겨 심으면 어떤 작물도 훨씬 더 크게 자라. 아이들도 더 크게 자란다. 땅의 기운 덕분이야. 어때? 그런 것 같지?” 

귤화위지라고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기숙 씨는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해 쓰러진다는 나무 얘기에 더 마음이 쓰였다.


뉴저지의 오래된 나무에는 엄청난 양의 잎이 달렸다. 내도록 수고해도 그 많은 잎들을 다 떨궈 내지 못한 나무들은 가을이 지나도 빛바랜 잎들로 성성했다.

무성하게 달린 마른 잎들 위로 눈이 쌓이고, 얼음이 얼고, 눈이 녹고, 새순이 났다. 

그러니까 이 이민자의 땅에 새로 나오는 순은 날 때부터 자기 자리라고는 없는 것이었다. 성성한 잎들을 비집어서 밀어내고 움 틀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숙명을 타고 태어나는 것이다. 

어린 새순이 가장 강했다. 한파를 견디고 눈 폭풍을 이겨낸 장한 잎들이 새순의 생명력을 이기지 못하고 툭툭 떨어졌다. 고군분투하는 새순을 돕느라 얕은 뿌리로 숨차게 양분을 끌어올렸을 나무의 모정이 눈물겨웠다. 

뿌리만 깊이 내릴 수 있다면. 


와이오밍에서 돌아와 처음 한 일은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에 가는 일이었다. 

주택가에 있는 Peace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한인교회였다. 아이들 때문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녀 역시 그 교회의 안온함이 눈물 나게 좋았다. 

영주권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그녀와는 다르게 일찍 정착한 사람들의 가정은 안락하고 부요했으며 심성은 부드러웠다. 

실한 열매 같은 자녀들은 단정하고 순해서 어른을 잘 따랐고 우애가 좋았다. 

어릴 때부터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국의 역사를 배우게 한 덕분으로 아이들은 태극기를 그릴 줄 알았고, 독도가 우리 땅인 것을 알았으며 한국계인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미국의 풍조를 경계하고 교회 안에서 자란 자녀들은 새처럼 명랑하고 꽃처럼 당당해서 교회의 자랑이 되고 부모에게는 기쁨이 되어 주었다. 

미국은 아이들이 마냥 안전하게 자랄 수 있는 나라는 아니었다. 살면 살수록 아이들을 분방한 풍조로부터 지켜줄 울타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기숙 씨는 처음부터 크리스천은 아니었지만 교회의 울타리는 든든하고 안전해 보였다. 포스트모더니즘 이래 경계가 무너진 세대를 염려하는 지역의 미국인들도 자녀들을 한인 교회에 보내고 싶어 했다. 

이 타운의 한국계 아이들은 지역에 좋은 본을 보이고 있었다.


이 나라는 어느 한 사람이 어떤 주장을 하면 법으로 보장을 받을 수 있는 사회였다. 그것은 일면 자유인 것 같아도 이면으로는 철저한 방임이 강요되는 또 다른 속박이었다. 차별을 반대한다는 명목으로,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자유를 억압하는 이중적 메커니즘의 극치라고 할까. 그러나 넘쳐나는 주장의 대부분이 의미조차 분명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궁금해하지도 않고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짧은 역사에도 그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일상생활에서조차 자주 경험할 수 있었다.


페어론에는 버드생츄어리라고 푯말이 세워진 습지가 있다. 나중에야 새들의 서식지로 보호되고 있는 곳임을 알았지만 생츄어리라고 하면 교회 예배당만 떠오르던 때였다.

“저긴 뭐 하는 데니? 생츄어리에 또 무슨 뜻이 있지?”

푯말이 세워진 습지를 처음 지나칠 때 기숙 씨가 아이들에게 물었었다.

“새들 협회 아냐. 모여서 회의하고 하는.”

준이 말을 받았다.

“누가 회의를 하는데?” 

농인지 참인지 감을 잡지 못한 그녀가 정말로 궁금해하자 준이 짐짓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누가 하긴. 새가 하지.”

윤이가 여기에 한 술을 더 얹었다.

“새들 대표가 저기 모여서 회의를 하는 거지.”

그제야 농인 줄 알아챈 그녀가 장단을 맞춘다고 보탠 말에 웃음들이 터졌었다.

“새들이 대표까지 뽑아서 무슨 회의를 할 게 있는데? 새 모이에 관한 회의라도 하나?”

새들 대표가 모여서 모이에 관한 회의를 하는 상상이 어찌나 웃겼던지 셋이 한참을 깔깔대고 웃었었다. 얼마나 시끄러울까.

“그러니까 새모이 협회네”


그런데 베이커리의 손님들도 그렇게 불렀다. 버드생추어리라고 안 하고 기숙씨네가 하는 대로 버드소사이어티라고 부르면서 왜 그렇게 부르는지 묻는 사람이 없었다.

미국 사회가 그랬다. 마치 오늘 건국이 된 나라처럼 갖다 붙이는 대로 새 이름과 새 법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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