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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음 Oct 13. 2023

늙은 여인들의 여름

여름이 지나면서 북부 뉴저지는 해가 빨리 졌고 한국 아줌마들이 더 자주 모였다. 

기숙 씨의 베이커리를 아지트 삼아 모이는 이 들은 신분이 없거나 영주권을 기다리고 있는 여자들로 미국 할아버지들이 돌아가고 난 저녁과 밤 사이에 왔다. 

한국에서 생활비가 오는 사람들은 좋은 형편에 속했다. 돌아갈 집이 있고 명분도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원래 남편이 없거나 있던 남편이 없어졌거나, 어쨌든 이런저런 모양으로 아이들만 데리고 미국으로 왔다가 발이 묶인 여자들이었다.

이미 미국 아이로 자란 자녀를 데리고 돌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엄마들은 단기취업이 가능한 허가서로 일을 하고 있었고 대부분 한국에서 받아온 비자가 만료된 상태였다. 당연히 한국 방문도 불가능했다.


아이들은 공립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미국 아이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졸업할 때가 되면 미국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다. 사회는 영주권이 없는 외국인 체류자의 성인 자녀들에게 혹독하고 잔인해졌다. 갑자기 할 수 있는 일이 없게 되는 것이다. 대학에 진학하는 일도 취업도 합법적으로는 쉽지 않았다. 

베이커리에 모이는 여자들의 가장 큰 바람은 자녀가 성인이 되기 전에 영주권이 나와주는 것이었다.


이들이 스스로 '늙은 여인들의 여름'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2년 전이었다. 첫서리도 이미 내렸건만 여름이 더디 가던 10월의 어느 저녁이었다. 

인디언 서머였다.

“독일에서는 인디언 서머를 늙은 여인들의 여름이라고 부른대요.”

그날도 베이커리를 아지트 삼아 모여있던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린 은영 씨가 말했었다. 

은영 씨는 학생비자를 유지하기 위해 필름스쿨에 적을 두고 있었지만 본업은 사진작가였다. 웹에 배너나 텍스트로 광고를 올리고 예약을 받아 여행자와 동행하며 사진을 찍어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똑똑한 데다 영어도 똑 부러지게 하는 언니들의 자랑이자 해결사였다. 

“독일에도 인디언 서머가 있대? 왜 그렇게 불렀을까? 지긋지긋해서 그랬나?”

수지의 농담에 다들 하하 웃었다. 늙은 여인을 지긋지긋하다고 하는 것은 매사 쿨하게 받아들이는 수지만의 농담 방식이었다. 그녀가 지천명을 훌쩍 넘겨 늙어가는 처지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우리 여름이 끝나기는 할까요? 혼자 치열하느라 아직도 한복판에 있는 거지.”

수지의 농담이 무색하게 은영 씨가 웃음기 없이 말을 이었다.

여자들은 특별한 설명이 없어도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는 했다. 이네들은 각자 인생의 어느 한복판에서 인생의 어느 치열한 전쟁을 아직 끝내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나이도 젤 젊은 게…”

젠이 그녀의 목을 해드록 하는 것처럼 팔로 감으며 웃었다. 

은영 씨는 자기에 관한 말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차로 십 분 거리인 오라델에 살고 있고 아들이 하나 있다고 들었지만 본 적은 없었다. 

“하긴 언니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되겠다 싶은 거겠지. 다들 잘 좀 살아 봐. 희망을 좀 줘보라고”

젠의 말에 다들 우리가 죽어야 한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은영 씨는 여전히 웃음기 없이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늙어 있던 여인이 여름을 반복해서 사는 거야. 젊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더 늙는 거 말고는 상상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더 늙고 늙어서 꼬부라지면 그때 쉼을 얻을 텐데 늙을 수조차 없다잖아요."

“젊은 게 뭐라고 생각하는데?”

젠의 질문에 은영 씨는 조금의 틈도 없이 대답했다.

“자신을 위한 꿈을 꾸는 거요. .”

은영 씨의 대답은 오래 생각했던 것처럼 거침이 없었다.

“난 아이에서 바로 늙은 여인이 된 거 같아요.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남편 말을 믿고 결혼을 했는데, 그 사람은 한 번도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어주지 않았어요.”

그녀의 말에서 지금과는 다른 수동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아이의 꿈을 위해 살라잖아요. 게다가 끝나지 않는다니. 아, 지겨워.”

은영 씨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늙은 여인이 어때서.”

조앤이 말했다.

“자식의 꿈이 우리 꿈인 게 뭐 어때서. 자식을 위해 꿈을 꾸고 자식의 꿈을 위해 수고하는 게 왜 내 꿈이 되면 안 되는데?”

젠이 따지듯이 말하는 조앤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얹고 은영 씨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자기야, 대신 아이들이 자랐잖아. 우리가 늙은 여인들이어서 얼마나 다행이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자랐겠지. 나무 두 그루가 한 터에서 자라는 게 쉽겠어? 하나가 썩어야 다른 나무가 단단히 서는 거야.”

대답이 없는 은영 씨의 눈은 먼 데 어디를 바라보는 것처럼 미동이 없었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려는 것처럼 수지가 일부러 수다스럽게 말했다.

“우리 모임을 '늙은 여인들의 여름'이라고 하면 어때? 독일 사람들이 왜 그렇게 불렀든지 간에 우리는 자식들을 위해 여름을 기꺼이 사는 늙은 여인네로 살면 되는 거지.”

“그래요. 늙은 여인들이여, 가을이 올 때까지 늙은이의 현명한 기도를 멈추지 마라.”

다들 한 마디씩 하는 동안에도 은영 씨는 끝내 말이 없었지만 아무튼 모임의 이름은 그렇게 지어졌다.

이름에는 지은 사람의 바람이 담겨 있다고 했다. ‘늙은 여인들의 여름’이라는 이름에도 자식들만은 결실하기를 바라는 어미들의 간절한 기도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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