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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음 Oct 24. 2024

내가 중심을 잡는 일

금요일의 날씨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게다가 글랜데일 풋볼팀이 리지우드팀을 무려 7대 5로 이겨 버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홈커밍데이에는 질만한 팀과는 붙지 않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원래는 약체인 브라운베어와 경기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날씨로 일정이 밀릴수록 약팀들이 떨어져 나갔고 선택의 여지없이 대진표대로 만나게 된 팀이 하필 카운티 10강에 드는 리지우드였다. 그 리지우드를 선전 끝에 이겨버린 것이다. 파티에 대한 기대감에 더해져서 아이들의 열광은 대단했다. 


치어리더인 윤이는 집에 들르지 못해서 파티 드레스를 학교로 가져다주었다. 친구들과 함께 하루 종일 다니면서 골라 온 군청색 롱 드레스였다.

안 가도 그만이라던 아이 같지 않게 윤이는 들떠 보였다. 그러고 보면 브렛의 프러포즈도 캐주얼하지는 않았다. 이미 허락을 했건만 격식을 차리겠다고 꽃을 들고 집에까지 왔었다. 두 아이는 집 현관에 서서 깜깜해질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드레스를 가져다주고 돌아왔을 때 베이커리에 조앤이 와 있었다. 그녀는 가게에서 자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포커 나이트가 끝나면 열쇠를 받아서 정리까지 하겠다는 것이다

“집에 와서 자지. 준이 방이 비었잖아.”

베이커리는 입식이라 불편할 것이고 10월이 되면서 밤에는 기온이 떨어져 추울 것도 걱정이었다.

“아니에요. 이런 부탁은 미안하지만 그냥 좀 혼자 있고 싶어서 그런 거라.”

 

조앤은 따뜻하고 명랑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하이스쿨에 다니는 두 아들과 살고 있었다. 아이들만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온 게 십 년 전이라고 했다. 교육에 열성인 남편의 권유였다. 

원래 그럴 작정이었는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이들이 미국에서 자라는 동안 남편은 새 살림을 차리고 두 딸을 낳았다. 조앤이 자리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할 때 처자식을 갈아치우고 먼저 자리를 잡은 것은 남편이었고, 그녀가 비자를 유지하느라 돌어가지 못하는 새 남편의 가정은 단단해졌고 딸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본처 행세를 하며 사는 딸들의 엄마는 조앤의 교훈을 깊이 새기고 절대로 남편 옆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재작년에는 딸들만 와서 머물다 갔다. 법적으로는 조앤의 딸들이었다. 

조앤은 남편의 새 살림에 마음이 쓰이지 않는 자신을 신기해했다. 둘 다 이혼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 남편의 의중은 모르겠으나, 

'이혼도 상대방한테 열정이 있어야 하는 거 더라고요'

조앤은 말했었다. 

딸들의 엄마가 연례행사처럼 전화를 걸어 이혼을 요구했지만 딱 한 번 만이었다. 조앤은 그때마다 그러라고 했다. 조앤의 남편은 딸들 엄마의 주제넘지만 타당한 요구를 매일같이 어떻게 막아내고 있는 걸까. 


무슨 일이 있는 거냐는 질문에 조앤은 별일 아니라고 했다. 늙은 여인들은 본인이 말해주지 않는 일은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묻지 않았는데 조앤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정말 별 일은 아니고요, 큰 애가 한국에 가서 군대를 가려나 봐요.”

“응? 사이먼이?”

사이먼은 두 아들 중 큰 아이였다. 이미 미국 아이로 자란 아들들은 그녀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영주권에 동반 자녀로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하이스쿨을 졸업하자 사이먼의 학생비자는 효력을 잃었다. 무비자 상태가 된 아이를 받아주겠다는 대학은 없었다. 사이먼은 매우 우수한 학생이었다. 아이는 원하는 대학마다 메일을 보내서 자신을 어필했으나 아쉽지만 불가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미국 내에서 학생비자를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조엔이 진행 중인 영주권의 동반 자녀 자격은 잃게 될 것이었다. 진퇴양난이었다.

  

“네. 결정한 거 같아요.”

“잘했네. 영주권이야 또 방법이 있겠지. 군대마치고 정식으로 비자 받아서 오면 좋지. 사실 사이먼이 좀 아까웠어?”

“저그랬으면 하기도 했죠. 한국을 포기하지 않을 애라…. 좀 커서 왔다고 존처럼 미국 아이는 안 되더라고요.”

올해 하이스쿨에 들어간 작은 아들 존은 한국 말도 거의 못 했고 사고방식도 사이먼과는 달랐다.

“그랬으면 했던 일이라며 그게 심란해서 이러는 건 아닐 거고.”

“그게요, 사이먼이 제 아빠랑 의논한 거 같더라고요.”

“그랬대? 아무래도 군대 문제는 아빠가 잘 아시겠지.”

기숙 씨는 일부러 대수롭지 않은 척 말했지만 그녀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제 아빠에게 등을 돌리기를 원하지는 않았겠지만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에 엄마가 아닌 아빠를 떠올렸다는 사실이 조앤에게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사이먼은 원래 아빠를 아무렇지 않게 대했어요. 비난을 하면 내가 그러지 말라고 나섰을 텐데, 얘는 한국애들이 와도 그냥 동생 대하듯이 하더라고요.”

아빠의 딸들과 말도 섞지 않는다는 존과 달리 사이먼은 곧잘 데리고 다니기도 하면서 제법 오빠 노릇을 한다고 했다.

“대놓고 통화하면 내가 뭐랜다고 슬슬 피해 다니는 게,”

“사이먼이 그래?”

“눈치가 그래요. 새벽마다 통화하느라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다 들리는 걸. 요즘은 매일 한 시간 씩은 하는 거 같더라고요.”

조앤은 섭섭함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오늘 나한테 군대 다녀오기로 했다고, 그 말만 딱 하는 거예요. 의논 한 마디 없이 그냥 그 말만요. 그래서 알아서 잘 하라고 하고 나온 거예요.”

듣기에도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조앤에게는 위로보다 생각이 필요할 거였다. 살다 보면 자신을 설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다른 누구에게 하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스스로를 납득시켜야 하는 순간 말이다. 그것을 기숙 씨는 ‘내가 중심을 잡는 일’이라고 이름 붙였다. 

바라볼 곳이 엄마 밖에 없는 아이들은 생각보다 더 위축됐고 불안해 했다. 그래서 엄마가 조금만 흔들려도 먼저 눈치챘다. 작고 불안한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아이들을 가족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너무 쉽게 데리고 나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기숙 씨가 기를 쓰고 꼿꼭하게 버텨야 하는 이유였다. 지금 조앤에게도 자신에게 잘하고 있다는 확신을 줄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홈커밍데이 파티는 밤 열 시에 끝이 났다. 부모가 아이들을 데려가야 한대서 기숙 씨도 윤이를 데리러 갔다. 어깨에 브랫의 재킷을 걸치고 있던 윤이가 옷을 벗어 돌려주고는 차로 뛰어왔다. 즐거웠냐는 물음에 답하는 윤이의 얼굴이 반짝거렸다.

“엄청.”

“뭐 했는데?”

“춤추고, 먹고, 놀고.”

“브렛 부모님은 아직 안 오신 거야?”

“오셨어. 나 때문에 기다린 거야. 근데 홈파티를 간대서 차만 주고 가신대.”

“애들 술 마신다며 차를 주신대?”

“브렛은 안 마실 거랬어.”

단정적으로 말하는 윤이 얼굴에 순간 신경질 같은 것이 지나갔다.  브렛이 윤이에게 왜 그런 다짐을 주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디서 한다는데?”

“몰라. 걔 친구들이랑 하겠지. 난 걔 친구들 잘 몰라.”

윤이가 퉁명스럽게 말하고 나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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