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나의 장례식에 레이철이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레이철과 니나는 접점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와서 많이 울었고 가족들과 인사도 했다.
장례식 후 기숙 씨는 레이첼을 데리고 식당에 갔다. 밥 생각이 없다는 그녀에게 치킨누들슾을 시켜 주고 오믈렛과 펜케익을 구워 달라고 했다. 나눠 먹을 요량이었다.
레이철은 싫다 소리할 기운도 없는지 쥐어주는 대로 식전빵을 먹었다. 고맙다든가 하는 인사치레가 없어서 오히려 편했다.
“니나와는 3년 전쯤부터 만나기 시작했어요. 그녀는 테라피스트였거든요. 아줌마처럼요.”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며 레이철이 말했다. 그녀가 말하는 테라피스트란 심리상담사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제야 두 사람의 관계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니나는 경험이 많은 상담 전문가였다.
기숙 씨는 레이철의 말대로 몇 해 동안 상담심리 공부를 해 오고 있었지만 니나처럼 자격증이 있는 테라피스트는 아직 아니었다.
사실 레이철의 병에 관한 얘기 자체가 금기였다. 젠은 3년 전에 딸을 펜실베이니아까지 데려가 입원시켰다. 정신과 치료를 받는 동안에는 아무 말이 없다가 입원을 시키고 와서야 레이철이 스키조래, 하고 말한 게 다였다. 그리고는 질문을 용납지 않겠다는 듯이 입술을 일자로 닫고 노려보았기 때문에 늙은 여인들은 죄인이라도 된 양 젠의 눈을 피하느라 허둥댔었다.
“엄마는 내가 열네 살 때 처음 알았대요. 나한테 병이 있다구요. 그런데 훨씬 전부터 나는 알고 있었을 거래요."
한국어가 서툰 친구라 영어를 섞어가며 말하는 중에도 존대를 쓰려고 에쓰고 있는 게 보였다.
"닥터의 말을 듣고 보니 그랬더라고요. 사람들이 있는 데서는 네임이와 아는 척을 안 했거든요. 나한테만 보인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죠.”.
레이철은 어디까지 아세요? 하고 물었다. 늙은 여인들이 아는 게 딱 거기까지였다.
처음에는 그냥 혼자서 잘 노는 아이라고만 생각했다. 환청과 환시를 통해 네임이라는 친구를 만들어 사귀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그얘기를 들었을 때 늙은 여인들이 떠올린 것은 아이가 유치원 때 극심한 왕따를 당했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들이 더 잔인했다. 포장할 줄 모르는 순수 악은 검은 머리 여자 아이를 끝간 데까지 몰아갔다. 따돌림과 불리를 한꺼번에 겪어야 했던 레이철은 의연하게 잘 이겨 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허구의 친구를 만들어 내고 이름을 붙여야 하는데 ‘이름’이라는 이름이 상상력의 전부인 어린아이였다. 그 고통의 무게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왜 이름이 이름이야?”
“모르겠어요. 원래는 이름이가 아니고 네임이에요. 근데요 네임이에 대해서는 물어보셔도 아는 게 없어요. 언제 만났는지, 어떻게 만났는지...그냥...처음부터 있었거든요.”
웨이터가 반쯤 빈 접시들을 치우자 레이첼이 작정하고 털어놓으려는 사람처럼 몸을 세웠다. 기숙 씨는 덜컥 겁이 났다. 젠이 하지 않은 얘기를 이 아이를 통해서 들어도 되는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제 경우의 스키조는요,”
레이철이 의사처럼 자신의 증상을 또박또박 설명했다.
“치료의 기준이 네임이가 사라지는 게 아니었어요. 나만 본다는 걸 인정하는 게 기준인 거죠.”
기숙 씨는 머릿속이 빙빙 도는 것 같은 어지럼증을 느꼈다. 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젠은 딸이 환영을 본다고 했고 치료가 됐다고 했다. 늙은 여인들은 그 치료라는 것을 보지 않게 됐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네임이는 사라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함께 있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숙 씨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무거워져서 이 일방적인 대화를 얼른 끝내고 싶어졌다.
“그런 말은 엄마가 안 했는데… 엄마도 아시는 거지?”
레이철이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요. 엄마는.. 사라졌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죠."
레이첼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저 치료 잘 받았어요. 이제 닥터한테는 안 가도 되고 테라피스트만 만나고 있는 걸요."
그러나 치료와는 별개로 네임이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일은 다른 문제인 듯했다. 치료의 기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어쨌든 레이첼과 네임이는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게 맞았다.
“사람들은 왜 자기가 못 본다고 없다고 하는 거죠? 안 보이는데 없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
이 얼마나 그럴듯한 역설인가.
“보지 못하는 건 모른다고 해야 하지 않나요?”
기숙 씨는 이 아이가 왜 하필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는지 알아챘다. 니나를 대신해서 네임이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으로 그녀를 고른 것이다.
니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직 여름일 때 나무가 기억하는 가을을 믿었고,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알려주는 바람이 존재를 믿었다. 조상들의 땅이 바다 너머 아프리카에 있는 것처럼 돌아갈 영구한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땅의 주인인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하게 믿었다.
그리고 기숙 씨가 그랬다. 레이철은 니나가 죽었을 때 네임이도 함께 땅에 묻는 기분이었을 것이었다. 니나는 네임이를 알고 있고 인정해 주는 유일한 타인이었던 것이다.
기숙 씨는 아직 장사도 하지 않은 니나가 벌써부터 그리워졌다. 그녀는 어떻게 했는지 귀띔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을 것을 어쩌자고 그렇게 과묵한 채로 세상을 떠나버렸는지. 그녀는 이미 자신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레이철이 원한다면 아줌마는 얘기를 나눠줄 수 있어.”
레이철이 환하게 웃었다.
“니나만큼은 아니어도 네임이의 이야기도 들어줄 수 있지만.. 엄마한테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
“니나도 그렇게 말했어요. 엄마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고요.”
레이철이 동의라는 표현을 쓰자 안심이 되었다. 그녀가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마음이 가벼워진 것은 아니었다.
젠을 만나서 동의를 얻어야 하고 경험이 많은 전문가들에게 슈퍼비전도 받아야 하는 막중한 일이었다. 다행히 그녀가 다니고 있는 학교의 교수님들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적은 비용으로 훌륭한 슈퍼비전을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생각이 많은 그녀와 달리 레이철은 홀가분한 얼굴이 되어 창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작 한두 시간의 무게도 이렇게 무거운데 혼자 품고 살아왔을 레이첼의 마음의 무게가 가늠이 되지 않아서 더욱 안타까워지는 기숙 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