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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전산망 화재

불씨보다 큰 관리부실

by 다소느림

국가 전산망 화재가 던진 불편한 진실


지난 9월 26일,

대전의 국가정보자원관리원 전산실에서 불이 났다.
겉으로는 단순한 전기설비 사고처럼 보였지만,

그 여파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리튬이온 배터리 하나가 발화하면서 국민신문고, 정부24,

모바일 신분증을 비롯해 70여 개의 정부 서비스가 멈춰 섰다.
국민이 매일같이 이용하는 행정 인프라가 한순간에 무너진 것이다.


불씨는 배터리였지만, 화약고는 국가였다


화재의 직접적인 원인은 UPS(무정전 전원장치) 배터리에서 비롯되었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작은 충격이나 내부 단락만으로도

폭발과 발화를 일으킬 수 있다.

특히 열이 쌓이면 ‘열 폭주(thermal runaway)’ 현상으로

불길을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히 “배터리가 터졌다”는 사실이 아니다.
왜 국가 전체 전산망이 단일 배터리의 고장에 연동되어 무너져야 했는가.
이것이 국민들이 분노하는 지점이다.


노후 시설과 이중화 부재


국가정보자원관리원은 2000년대 초반에 지어진 건물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IT 인프라는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관리원 시설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단일 센터 의존: 대부분의 핵심 서비스가 대전 본원에 몰려 있었다.

재해복구 체계 미흡: 형식상 백업 시스템은 있었으나, 실시간 동기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동 진화 장치 한계: 최신 데이터센터는 불이 나면 자동으로 질식 소화 설비가 작동한다. 하지만 국정자원관리원은 완전 자동화되지 않았고, 고온으로 인해 진입조차 어려웠다고 전해진다.


결국 하나의 전산실이 불타자,

국민 서비스 전체가 마비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안전 관리와 인력 부족


더 큰 문제는 관리 방식이다.
발화 지점은 UPS 배터리 교체·이전 작업 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과정에서 안전 매뉴얼이 제대로 지켜졌는지,

현장 감독은 있었는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게다가 최근 몇 년간 정부 부처의 IT 관리 인력은 줄고,

외주와 용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정작 국가 핵심 시스템을 책임지는 사람은 줄고,

위험한 작업은 하청 구조로 밀려난다.
이런 상황에서 작은 실수 하나가

큰 재난으로 이어지는 것은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다.


민간보다 못한 국가 시스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민간 클라우드 사업자들은 오래 전부터 다중 센터를 운영하며,
서울에 불이 나면 부산이나 해외 서버에서 즉시 복구되도록 설계했다.


하지만 정작 국가 전산망은 이 기본조차 지켜지지 않았다.
정부는 국민에게 “디지털 정부, 스마트 행정”을 자랑했지만,
막상 위기 상황에서는 민간 기업보다도 취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신뢰의 문제


이번 화재는 단순한 IT 사고가 아니다.
이것은 국가 신뢰의 붕괴다.

국민은 정부 서비스가 언제나 안정적으로 운영될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그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앞으로 누가 정부 앱을 안심하고 쓸 수 있겠는가?
“국가가 운영하니 더 안전하다”는 말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우리가 요구해야 할 것들


이제 필요한 것은 뻔하다.

그러나 그 뻔한 것을 제대로 하는 것이 어렵다.


노후 시설 개선 – 20년 넘은 전산실을 그대로 두고 “첨단 정부”를 말할 수 없다.

이중화 체계 구축 – 단일 센터 의존을 끝내고, 다중 센터·실시간 백업을 필수화해야 한다.

안전 관리 강화 – 위험 작업에는 반드시 전문 인력이 투입되고, 감독 체계가 작동해야 한다.

IT 인프라 투자 확대 – 정치적 성과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고 뒤로 미뤄서는 안 된다. 국가 기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켜지는 법이다.


결론


리튬이온 배터리 하나의 폭발은 단순한 불씨였다.
그러나 그 불씨가 국가 전체를 흔든 이유는 구조적 부실 때문이다.

배터리 하나로 멈추는 국가는,
국민에게 더 이상 안전을 약속할 수 없다.
이제는 “IT 강국”이라는 허울이 아니라,
진짜 국민의 신뢰를 지킬 수 있는 인프라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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