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어디에 있었는가
요즘 뉴스를 보면, 마음이 편치 않다.
캄보디아에서, 미얀마에서, 또 다른 나라에서
한국인이 납치당하고, 협박당하고,
심지어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이어진다.
그럴 때마다 한국대사관은 이렇게 말한다.
“현지 경찰에 신고하세요.”
“영사 조력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너무 차갑게 들린다.
그 사이에도 누군가는 감금되어 있고,
누군가는 두려움 속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국내 취업이 어려워지면서
많은 이들이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
‘캄보디아 IT회사’, ‘동남아 마케팅 직군’,
‘고수입 해외 근무’라는 말이 달콤하게 들린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한 순간,
그들을 맞이한 건 출입국 관리도,
회사의 인사팀도 아니었다.
여권을 빼앗고, 협박하며,
몸값을 요구하는 조직이었다.
해외취업이 희망이 아니라 덫이 되어버린 세상.
이건 단순한 개인의 부주의 문제가 아니다.
절박함을 이용하는 산업화된 범죄,
그리고 그 범죄를 제대로 막지 못하는 국가의 무능의 문제다.
물론 대사관에는 수사권이 없다.
현지 법을 따라야 하고, 주권을 존중해야 한다.
그 말,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 말이 너무 정직하게만 들린다는 게 문제다.
외교는 절차일 뿐이고,
국가는 결국 사람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국민의 생명보다 외교가 먼저일 수는 없다.
“우린 미국이 아니잖아요.”
“외교적 마찰이 생길 수 있습니다.”
늘 이런 말이 따라온다.
하지만 지금 이런 사건들이 일어나는 곳은
강대국이 아니라,
대부분 한국보다 훨씬 약한 개발도상국들이다.
그런 나라에게조차 제대로 항의 한마디 못 하는 모습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의지가 없어서다.
미국은 강해서 국민을 지키는 게 아니다.
국민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가 강해서 강대국이 된 거다.
캄보디아에는 2만 명이 넘는 교민이 산다.
그들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그 나라에서 한국의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면,
그건 곧 한국의 국격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 필요한 건 거창한 작전 이름이 아니라,
확실한 메시지다.
“한국 국민을 건드리면, 외교가 아니라 위기가 된다.”
2011년, ‘아덴만의 여명 작전’을 기억한다.
그때 대한민국은 말했다.
“우리 국민은 우리가 구한다.”
그 한마디에 모두가 울었다.
그건 단순한 군사작전이 아니라,
국민에게 보여준 ‘국가의 존재감’이었다.
그 이후로 우리는 너무 조용해졌다.
너무도 조심스러워졌고,
너무나 쉽게 체념하게 됐다.
하지만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 어떤 국력과 외교도
결국 껍데기에 불과하다.
이건 외교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태도에 관한 문제다.
국민이 납치되고, 협박당하고, 살해당했을 때
그 어떤 이유로도
“우린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말이
답이 되어선 안 된다.
사람의 목숨보다 우선하는 외교는 없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의지, 그게 진짜 국력이다.